75. 바꿀 수 없는 것 (8)
호랑이 저택의 별채.
기대에 차 미소 지으며 잠들었던 용제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마 잠든 지 얼마 안 되어 김신록의 부고를 들은 듯했다.
용제건의 이능파 상태를 체크하던 황지호가 말했다.
“적호 때와 비슷하다. 이능파는 정상이다. 몸 상태에도 딱히 문제가 없는 것 같군.”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리플레이는 처음이었기에 다른 이상이 발생할까 걱정했는데, 참 다행이었다.
용제건이 리플레이 속에서 겪을 일을 생각하면 전혀 다행이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해 놓고 아무 정보도 얻지 못하면 어떡하지.’
용제건에게 리플레이를 사용해 얻고자 한 정보는 두 가지다.
첫째,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가 진행되던 은광고의 상황.
리플레이를 한 적호가 크리스마스에서 풍백과 우사에 관한 단서를 찾았듯, 용제건도 무언가를 알아챌 가능성이 있었다.
당시 은광고는 흑막의 계략과 학교 부지에만 내리는 삿된 눈으로 인해 공간이 이질적으로 변해 있었다.
용제건은 적호보다 오래 생존했고, 공간의 용인 만큼 무언가를 더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가장 기대하는 건 다른 정보지만.’
둘째, 용족 내부의 사정.
용족이 플마고 스토리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건 내년에 발생할 용왕신의 무녀 시나리오가 시작된 후다.
용궁에서 벌어질 용왕신의 무녀 시나리오를 대비해 안배를 해 두었지만, 흑막도 미리 수를 두었을 게 분명했다.
용제건이 흑막이 두었을 수에 관한 단서를 잡는다면 좀 더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거다.
잠든 용제건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황지호가 말을 걸었다.
“조의신, 별채 안에 쉴 곳을 마련해 뒀다. 내가 보고 있을 테니 자고 와도 좋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악몽 속에 밀어 넣고 잠이 올 리가 있나?
고개를 젓자 내가 거절할 줄 미리 알았다는 듯, 황지호가 내 앞에 있던 찻잔을 가져가 찻물을 버리고 새로 차를 따랐다.
한 입도 마시지 못했는데 차가 다 식었나 보다.
“그게 싫다면 차라도 마시도록.”
황지호가 내오는 차는 식어도 마실 만하니 굳이 버릴 필요는 없었는데.
지금 이 차가 식으면 또 내다 버리고 다시 차를 내릴 것 같아 얌전히 마시기로 했다.
오늘 황지호가 내준 차는 용차호수(龍茶虎水), 용정차로도 불리는 차였다.
그윽한 향의 차를 눈앞에 두고도 용제건 생각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막상 권하는 차를 마시니 비취옥 같은 빛깔과 차 맛에 감탄했다.
용정차를 몇 모금 마시자 황지호가 말을 걸었다.
“적호의 보고서에서 나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지.”
적호의 보고서 속 리플레이 내용 중 황지호가 언급되긴 했다.
바로 적호가 황지호와 인연을 끊을 때.
그 이후로 적호는 황지호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
적호는 황지호가 무엇을 했는지도 설명하지 않았다.
적호는 아들의 복수를 제힘으로 마칠 때까지 그의 삶에서 황지호를 밀어낼 생각인 듯했다.
“조의신, 내가 용제건이 본 꿈에서 등장할 가능성이 있나?”
플마고 속에서 용제건과 황지호가 만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용제건은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에서 사망하고, 황지호가 배경이나 설정이 아닌 캐릭터로서 등장하는 건 주수혁이 2학년 0반에 들어간 이후니까.
하지만 플마고에서 담지 못한 장면 속에서 둘이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있어.”
“그렇군. 그 게임에서 내가 용제건과 마주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 건가.”
황지호가 곧바로 내 말뜻을 이해했다.
황지호는 리플레이 속 자신이 어땠을지 몹시 궁금한 모양이다.
여전히 리플레이의 사용 대상자로 황지호를 택할 수 없는 것 같으니 현재로선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러자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네가 그 상황이면 용제건 선생님을 만나러 갈 거야?”
“…….”
어쩐지 용제건이 황지호를 만나러 갈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역이라면 모를까.
황지호는 바로 답하지 않고 잠든 용제건을 바라보다 말했다.
“……한 번쯤은 얼굴을 보러 가겠지.”
그렇게 말하는 황지호의 목소리에 묘한 비장감이 묻어났다.
마치 칼로 찔릴 각오를 한 것 같은 음성이었다.
* * *
은휘관, 이사장실.
은광고의 이사장, 황명호의 모습을 한 황호의 제안을 받아들여 용제건은 은휘관의 이사장실로 향했다.
황호의 비서가 자리를 비운 후, 입을 먼저 연 건 용제건 쪽이었다.
“황호 이사장 씨, 오랜만이야.”
“그래, 오랜만이군.”
“신록이 장례식장에서 본 이후로 처음이지.”
용제건이 황호와 마지막으로 본 건 김신록의 장례식장이었다.
황호는 그날 후예를 잃은 호족의 수장이 아닌, 교내에서 죽은 교직원의 장례식장에 방문한 은광고의 이사장으로서 그 자리에 왔다.
비서를 대동하고 이사진 중 몇 명만을 이끌고 온 황호의 태도는 상당히 사무적이었다.
향을 올리다가 눈물을 참으려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애써 위엄을 유지하던 청룡과 대비되었다.
청룡은 참았지만 눈물을 보인 용도 몇 명 있었다.
먼 옛날 용제건의 손에 이끌려 용족의 신역에 놀러 온 어린 제호를 귀엽게 여기던 용도 꽤 있던 탓이었다.
“신록이는 이사장 씨가 아니라 가족처럼 지내던 황호 씨가 와 줬으면 했을 텐데.”
용제건의 친우는 절대로 입에 담거나 티 내지 않으려고 했겠지만, 내심 호족이 방문하는 걸 기다렸을 거다.
물론, 호족이 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왔다 간 청호의 제자들.
사람이 없는 시간을 노려 몇 시간이고 자리에 앉아 있다 간 백호.
마지막까지 아들의 죽음을 부정하다가 발인 전날이 되어서야 장례식장에 온 적호.
상주를 한 용제건의 눈에 다들 나름의 슬픔과 조의가 느껴졌다.
그 예외가 황호였다.
아예 그 자리에 오지 않은 호족보다야 낫다지만, 용제건의 친우가 그걸 봤다면 많이 씁쓸해했을 게 분명했다.
“…….”
황호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용제건의 말을 들었다.
황호는 말없이 용제건에게 차를 내주었는데, 하필 그게 용정차라 용제건은 옥으로 된 찻잔을 던지고 자리를 박차고 나갈 뻔했다.
그러나 용제건의 이성이 아슬아슬하게 그 충동을 저지했다.
용제건이 맺은 교원 계약은 황호의 마음이 바뀌면 얼마든지 파기될 수 있다.
용제건은 그 사실을 머릿속에 되새기며 자신을 다스렸다.
‘신록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는 은광고에 다니고 싶은데.’
용제건은 찻잔에서 눈을 떼고 황호를 응시했다.
무례한 행동을 하는 건 억눌렀지만, 비수같이 날카로운 말이 흘러나왔다.
“적호 씨는 몇 번 봤는데, 이사장 씨는 오랜만에 보네. 많이 바빴나 봐.”
“……처리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었다.”
용제건은 황호의 대답에 비웃음을 흘릴 뻔했다.
용제건은 황호가 얼마나 태만하게 행동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필요하다고 여긴 일은 했으나, 흘러가게 내버려 둔 일이 많았다.
그가 그나마 공을 들이는 건 사라진 신인과 청호의 수색이었다.
그렇게 태만하던 황호가 황명 그룹을 세우고, 은광고 운영에 공을 들인 이유가 그들 때문이었다.
이계 충돌이 일어난 혼란한 현세 속에서 그들을 찾고, 무사히 맞이하려면 부와 권력과 한반도에서의 입지를 유지해야 한다는 게 황호의 지론이었다.
그렇게 신인과 청호에게 애틋했으면서 제 친우는 그리 방치한 건지, 용제건은 알 수 없었다.
“그랬구나. 신록이가 죽고 나서 그런 취급을 받게 내버려 둘 만큼 급한 일이었어?”
“…….”
황호가 김신록의 건을 두고 움직이지 않은 건 적호와의 계약이 있던 탓이었다.
적호는 황호가 더 이상 제 아들의 건에 개입하지 말 것을 원했고, 황호는 이를 들어줬을 뿐.
그러나 용제건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용제건이 평소의 반만큼의 통찰력을 발휘했다면 그 사실을 짐작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했다.
용제건의 심신은 슬픔과 고통으로 망가져 있었고, 감각도 무뎌져 있었으니까.
황호는 단 한 번의 반박도 없이 용제건의 칼날 같은 말을 모두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사장 씨, 왜 부른 거야?”
황호가 한 방울도 줄지 않은 용제건의 찻잔을 바라봤다.
차는 이미 식어 버린 지 오래였고, 용제건은 찻잔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그 아이의 친우에게 차를 대접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제 와서?
용제건은 그렇게 대꾸하려다가 인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제건의 친우가 돌아왔을 때, 황호와 용제건의 사이가 틀어져 있으면 그가 매우 불편해할 게 뻔했다.
그 원인이 자신이라면 더더욱 힘들어할 거다.
하지만 그의 친우는 도통 용제건의 부름에 응해 주지를 않았다.
모든 게 부질없게 느껴졌다.
“하하하하…….”
이사장실을 나가기 직전, 용제건이 홀로 웃었다.
“……용제건?”
자리에서 일어나 용제건을 배웅하려던 황호가 그를 불렀다.
용제건은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나와 당신은 역사와 신화에 이름을 새긴 존재인데, 그런 존재들이 그 아이에게 살고 싶은 이유 하나 주지 못한 게 우스워서 웃었어.”
용제건은 황호의 대답을 듣지 않고 밖으로 향했다.
분명 무녀를 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맨정신으로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만두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용제건은 무녀를 만날 생각이 든 것 자체를 잊었다.
무모하게 소원을 비는 행위가 그의 심신을 소모시키고, 은광고에서 터지는 수많은 사건들이 그의 사고를 어지럽힌 탓이었다.
‘신록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괜찮았을까? 아니, 신록이가 그 자리에 없어서 다행인 걸까?’
여름방학 청소년 수련회 때, 1학년 0반, 1반, 2반이 큰 사건을 겪었다.
전조 현상 없는 이계의 발생, 유례없는 규모의 에너미의 습격, 0반 학생의 광림 폭주 등 학생들은 지옥을 경험하고 왔다.
김신록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피해는 다소 줄었겠지만, 사상자를 0으로 만드는 건 후예 한 명의 힘으로는 부족했을 거다.
친우가 자책했을 모습이 선했다.
용제건은 그 여름방학 사건 이후 학생들을 더 신경 썼다.
용제건은 변덕스럽게 주수혁의 부탁에 응해 사건 해결에 협력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주수혁과는 그럭저럭 친해졌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열리는 학교 행사에 얼굴을 비추기로 약속할 정도로.
“……용제건 님.”
크리스마스이브, 용족이 한반도에서 거점으로 삼고 있는 붉은 사자의 빌딩.
용제건이 밖으로 나설 때, 누군가가 그를 붙잡았다.
홍색의 옷을 입고 면사로 얼굴을 가린 걸 보니 용왕신의 무녀 중 하나인 홍(紅)이었다.
용왕신의 무녀는 총 다섯 명으로 각각 녹(綠), 벽(碧), 유황(硫黃), 자(紫), 홍(紅)이라고 불리었다.
그중 홍이는 가장 낯을 가려 말을 나누기 어려웠다.
“……저,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저 말에 용제건은 데자뷔를 느꼈다.
비슷한 말을 작년에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아마 용제건이 친우를 잃던 날이었다.
그날 용왕신의 무녀 중 하나가 그에게 날씨에 관해 말했었다.
용제건이 그날 무슨 말을 들었는지 떠올리려 했지만 머리가 멍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 보니 기억력에도 영향이 간 듯했다.
“그래? 우산을 챙겨야겠네. 다녀올게.”
“아…….”
무녀는 용제건을 붙잡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용제건은 바로 학교로 향했다.
요즘 용제건의 상태가 안 좋은 탓에 툭하면 그 자리에 붙잡아 두려는 용족이 한둘이 아니어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친우를 잃고 맞이하는 용제건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이브, 은광고에 눈이 오기 시작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