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바꿀 수 없는 것 (9)
눈이 내리기 전, 용제건은 스테일메이트 부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창밖을 보니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준비하는 아이들 몇 명이 돌아다니긴 했으나 한산했다.
일반인 입장이 시작되긴 했으나 아직 공연 시작까지는 한참 남았고, 준비가 덜 끝난 곳도 있어 그런 듯했다.
‘나 혼자라도 뭔가를 할 걸 그랬나?’
비록 활동 중인 체스 소모임 부원은 없지만 부원 명단에 이름만 올려 둔 아이들 덕에 스테일메이트는 폐부되지 않았다.
하지만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스테일메이트의 존속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름을 올린 학생들은 졸업하고, 부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소모임에 누가 들어올지 의문이었다.
‘언젠가 사람이 더 늘어나고, 정식 동아리로 승격됐으면 했는데.’
용제건의 기나긴 일생에 비해 체스 소모임 스테일메이트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았다.
스테일메이트가 창설된 건 용제건의 친우가 김신록이라는 신분을 사용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김신록은 초대 지익회 고문을 맡았으나 지익회가 안정된 후에는 고문을 그만뒀다.
그러자 김신록을 따르던 학생들이 새 동아리를 만들 때마다 그를 한 번씩 찾아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김신록은 온갖 핑계를 대며 고문 자리를 고사했다.
하지만 체스 소모임 소속 아이들은 조금 집요했다.
―김신록 선생님! 저번에 체스 기보 연구하시는 거 봤어요.
―흑을 잡은 게 선생님이셨죠? 백을 두신 분이 프로급으로 잘하셨던 것 같은데, 선생님이 받아친 수도 굉장히 좋았어요!
―맞아요, 미들 페이즈부터 스테일메이트를 준비하셨죠?
―상대가 눈치채는 게 한 수만 더 늦었더라면 스테일메이트로 끝낼 수 있었을 텐데……!
김신록은 최근 쉬는 시간만 되면 체스 기보를 연구했는데, 그게 학생들의 눈에 띈 듯했다.
마침 체스 소모임 창설을 위해 움직이던 아이들이 곧바로 김신록을 초대 고문으로 모시기 위해 애썼다.
김신록은 부드럽게 거절 의사를 밝히자 아이들은 한 번 물러났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김신록이 홀로 체스 기보를 연구하던 게 발각되어 아이들이 다시 불타올랐다.
―김신록 선생님, 내가 대신 거절해 줄까?
―…….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김신록이 용제건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그렇구나. 그런데 진지하게 체스를 둘 거면 체스 소모임을 만들어서 아이들과 연구해 보는 게 어때? 신화계 호족을 이기는 건 쉽지 않을 텐데.
―네가 어떻게 그걸……! 아.
김신록의 반응을 본 용제건이 즐겁게 웃었다.
김신록은 용제건의 말장난에 당했다는 사실에 짜증을 냈다.
김신록의 교우 관계는 상당히 좁았고 체스를 둘 만한 상대는 한정되어 있었다.
김신록이 틈틈이 기보 연구를 할 정도로 열중할 상대라면 상당히 가까운 관계일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대상은 용족이나 호족이 된다.
‘준열이가 태어난 후에는 신록이가 놀러 오지 않았으니까 용족은 아닐 거야. 그럼 호족이겠지.’
호족 중에서 김신록과 체스를 둘 법한 호랑이는 셋.
후보 첫 번째는 가능성은 적지만 아버지 적호.
극적으로 화해해 체스를 둘 정도로 가까워졌을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김신록의 기분이 훨씬 더 좋았어야 할 거다.
그렇다면 남은 후보는 황호와 백호, 즉, 신화계 호족이다.
―황호 씨는 아닐 것 같네. 신역의 수호자께서는 요새 은광구를 자주 비우셨으니까. 백호 씨가 체스를 잘 두나 봐?
―…….
김신록이 순식간에 대국 상대를 추려 낸 용제건을 질린 표정으로 쳐다봤다.
용제건은 김신록으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듣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말장난을 시도했다.
결국 김신록이 포기하고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줬다.
―……백호 님께서 체스를 가르쳐 주셨어. 그냥 한 번 이겨 보거나 스테일메이트로 비겨 보고 싶어.
이계 충돌이 일어난 후, 진명을 잃었다고 고한 백호가 천신의 분노를 샀다는 건 유명한 일이었다.
백호는 신역의 수인(囚人)이라는 낙인이 찍혀 은광구에서 나갈 수 없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도통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백호는 천신에게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권능을 달라고 할 만큼 자유로운 호족이었으니 갑갑한 기분에 은광구 여기저기를 방황하는 듯했다.
백호의 제자인 김신록은 이를 매우 서운히 여겼다.
그러다가 김신록은 얼마 전 백호와 마주쳐 체스를 배우고 대국을 했다고 한다.
김신록은 스승과의 연결 고리가 생겨 기쁜 듯했다.
―체스는 계속 하고 싶지만, 만든 지 얼마 안 된 신분으로 학생들과 가까워지는 건…….
김신록의 짧은 말에서 고뇌가 묻어났다.
용제건은 친우의 고민을 덜어 주기 위해 제안했다.
―그러면 나도 체스를 배워 볼까.
―……응?
―다음에 그 아이들이 너를 찾아오면 나를 불러.
그 결과, 용제건은 무사히 체스 소모임의 고문이 되었다.
체스 소모임의 이름은 스테일메이트로 정했다.
백호와의 대국에서 스테일메이트라도 노리겠다는 김신록의 말이 인상 깊었던 탓이다.
계기는 김신록이 제공했지만, 용제건은 나름 체스와 스테일메이트에 애착을 가졌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고문으로 지낼 정도로.
‘신록이는 결국 백호 씨한테 스테일메이트도 따내지 못했지.’
김신록은 나름 노력을 거듭했다.
용제건은 김신록이 백호에게 이길 수 있도록 도왔다.
체스 소모임 아이들과 함께 백호가 둔 수의 파훼법을 연구하기도 하고, 용제건이 김신록의 대국 상대도 했다.
그럼에도 이기거나 비기지 못했다.
‘대국 횟수도 적었고, 매번 백호 씨가 더 강해졌지.’
백호가 워낙 신출귀몰한 탓에 김신록과 대국을 자주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문제는 대국 횟수만이 아니었다.
백호는 지나치게 강했고, 대국을 할 때마다 성장하는 것 같았다.
특히 스테일메이트를 시도할 때마다 귀신같이 눈치채고 모든 수를 박살 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언젠가 신록이가 이기는 걸 보고 싶었는데.’
역시 내년에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체스 소모임을 존속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침 내년에는 유학 간 용족의 후예, 염준열이 돌아온다.
후배 중에 체스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 없나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눈이다.’
창밖으로 눈이 내렸다.
날씨에 영향을 받는 용족들은 기상 변화에 민감했다.
본체가 여의보주인 용제건은 다른 용족에 비해 날씨의 영향을 덜 받지만,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용제건은 가만히 눈을 주시하다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평범한 눈이 아니야!’
눈은 삿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용제건은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밖에서 짐을 나르고 리허설을 하던 학생들이 눈을 보며 좋아하고 있었다.
“와,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인가 봐.”
“일기 예보에 눈 온다는 말 없었는데. 천막 설치해야 되나?”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어, 정문 쪽에서 무슨 일 있나 본데. 동문…… 아니, 서문 쪽에서도…… 어? 통신이 끊겼네.”
통찰계 스킬을 보유했거나 예민한 학생들은 겁에 질려 눈을 응시했다.
자치 기구 소속 학생들은 디바이스로 연락을 시도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용제건 선생님?”
“다른 아이들한테도 연락해서 건물 안으로 대피시켜. 눈을 맞으면 안 돼.”
“네? 저, 지금 통신이 먹통이라서…….”
용제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은광고에 내릴 리가 없는 삿된 눈,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끊긴 통신.
누군가가 은광고를 공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1년 넘게 은광고를 조금씩 좀먹어 가던 악의가 거대한 눈이 되어 은광고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무언가 온다!’
펑펑 내리는 눈에 신발이 잠길 만큼 쌓였을 때였다.
눈에서부터 무언가가 나타났다.
우왕좌왕하던 학생들이 눈에서 나타난 것을 보고 탄식했다.
“에너미……!”
“말도 안 돼, 은광고에는 결계가 있어서 에너미가 못 들어오잖아!”
“아니야, 작년 실기 시험 때에도 에너미가 들어왔었으니까…….”
경악하던 학생들이 하나둘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아이템 카드를 실체화하려던 학생들이 멈칫했다.
아이템 카드가 실체화되지 않았다.
체내에 흐르는 이능파의 흐름이 꽉 막힌 것처럼 제대로 운용되지 않았다.
삿된 눈에 닿은 이들은 마치 온몸의 이능파가 얼어붙은 것 같은 감각을 맛보았다.
끼이이이……!
눈보라 사이로 기괴한 소리를 내며 에너미가 학생들을 향해 다가왔다.
얼어붙은 학생들과 천천히 접근하는 에너미 사이, 용제건이 부른 공간이 나타났다.
파아아아!
막 움직이기 시작한 에너미들은 아직 지성이 부족한 듯 학생들을 노리는 대신 용제건의 공간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주먹으로 두드리다 칼날을 불러 찌르기도 하는 등, 마치 무언가를 학습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안으로 피해. 눈을 맞지 않으면 이능파가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네……!”
그 이후, 용제건은 은광고를 헤매며 학생들을 구하러 다녔다.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준비하느라 학생들은 중앙 구역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에너미들과 교전하게 된 학생들은 도주하다가 다른 구역에 고립되기도 했다.
용제건은 그런 학생들을 하나하나 구하며 이동했다.
‘이상해, 오늘은 굉장히 상태가 좋아.’
용제건의 친우가 사망한 이후에는 생각이 맑지 못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마치 아주 명석한 플레이어의 정신을 빌린 것처럼 사고가 또렷했다.
용제건은 전략적이고도 효율적인 방법으로 에너미를 격파하고, 최소한의 이동 거리로 다음 학생을 구하며 이동할 수 있었다.
‘오늘은 유난히 컨디션이 좋네. 다행이야.’
용제건은 아이들을 구하면서 은광고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했다.
비록 통신은 막혔지만, 학생들이 이능이나 아이템을 통해 외부에 상황을 전달하고, 내부에 있는 이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용제건이 파악한 은광고의 상황은 다음과도 같았다.
첫째, 눈이 내린 직후, 은광고가 봉쇄되었다.
둘째, 은광고의 내부와 외부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현재 은광고의 10시간은 외부의 1시간에 해당되었다.
‘아마 이 눈과 은광고의 결계를 왜곡한 누군가가 벌인 짓이겠지.’
뒤틀린 은광고의 결계를 파괴하고, 그 안으로 프로 플레이어 팀을 파견하려면 몇 시간은 걸린다.
학생들은 외부의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안에서 삿된 눈과 불어나는 에너미를 상대하며 몇십 시간을 버텨야 했다.
전 학생회장 도원우의 지휘를 중심으로 학생들을 구조하고 바리케이드를 구축하였지만 에너미 수가 급속도로 늘어 가고 있어 점점 전황은 위태롭게 흘러갔다.
‘은광고에 분명 긴급 비상구, 탈출로가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은광고의 결계가 오작동하는 것을 염려한 건지, 내부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비상구가 몇 개 존재했다.
처음에 도원우는 학생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움직였으나 모든 비상구는 어쩐 일인지 전부 막혀 있었다.
최편득으로부터 언질을 듣고 앞서 탈출한 어느 1학년 학생들이 사람이 많으면 도망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비상구를 폐쇄하고, SSR급 아이템으로 이를 봉인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학생들과 교사진은 이를 알지 못했고 막힌 비상구에서 학생회관으로 후퇴하는 사이에 사상자를 몇 명 내고 말았다.
카앙, 카아앙……!
낙오된 학생들을 구출하며 헤매던 중, 용제건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눈보라로 가득해 시야가 막혔지만, 용제건은 자신이 학교 부지 외곽에 도착한 걸 깨달았다.
카앙, 카앙, 카아앙!
그 소리는 왜곡된 결계에서 들렸다.
누군가가 결계를 파괴하려는 게 분명했다.
그곳에 가까이 다가간 용제건은 밖에 누가 있는지 깨달았다.
‘백호……!’
결계를 부수려고 하는 건 백호의 힘이었다.
백호는 결계 밖에서 대검을 휘두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12지의 힘과 알 수 없는 누군가의 거대한 힘이 뒤섞인 이 결계를 혼자서 깨는 건 불가능할 텐데도, 백호는 계속 결계를 파괴하려 한 거다.
‘……지금이라면 밖으로 나갈 수 있어.’
용제건에게는 비장의 아이템이 있다.
‘용왕신의 비늘’.
용왕신이 아끼는 여의보주, 총아 용제건을 위해 내어 준 비늘이었다.
백호가 대검을 휘두르는 순간에 맞추어 이 아이템을 사용하면 탈출할 수 있다.
용제건 하나는 탈출할 만한 틈이 생길 거다.
‘……하지만 이 밖으로 나가면 돌아올 수 없겠지.’
눈이 내리고 있는 한 결계는 금방 수복될 것이다.
결계 안과 밖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 용제건이 용족을 모아서 오는 사이 은광고 안은 초토화될 거다.
그렇게 되면 용제건은 다시는 여의보주에 친우의 부활을 빌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학생들을 아끼던 친우였으니, 학생들을 버리고 밖으로 나간 용제건의 소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자꾸 무언가가 등을 떠미는 기분이 들어 용제건은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지금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데.”
카아앙! 카앙!
용제건은 귀에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때, 쏟아지는 눈송이 사이로 본 하늘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저건?’
용제건이 생각을 잇기 전, 멀리서 학생의 비명 소리가 들려 몸을 날렸다.
용제건은 그렇게 힘이 다할 때까지 학교를 헤매고 학생을 구했다.
쌓이는 눈, 학생들의 비명과 비보, 늘어 가는 에너미 속 용제건은 이 학교에 닥친 거대한 음모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꼈다.
자신이 온 힘을 다해 학생 몇 명을 구해 봤자 그 결말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파스스…….
그의 육신과 혼이 한계에 달한 순간,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용제건의 본신, 여의보주는 조금씩 금이 가다 결국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