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36화 (534/925)

75. 바꿀 수 없는 것 (10)

용제건의 본신, 여의보주가 산산이 흩어져 형태를 잃은 순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용제건의 육신과 혼은 현세에 머물렀다.

보통이라면 곧바로 혼이 흩어지거나 윤회의 굴레로 향해야 했다.

그러나 이 땅에 미련이 많아서일까, 하필 그 자리에 용제건을 부르는 학생들이 있던 탓일까.

그것도 아니면 아직 이루지 못한 소원이 있는 탓일까, 용제건은 잠시 이 땅에 남았다.

“선생님? 왜 갑자기 멈추셨…….”

“용제건 선생님……! 몸이…….”

“회복 아이템 쓸게요! 잠깐만요!”

용제건이 구한 학생들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학생들은 얼마 남지 않은 회복 아이템을 꺼내 용제건에게 사용하려고 했으나 이미 생명이 끝난 용제건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어서 도망가라고 해야 하는데 용제건은 이 땅에 머물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이미 흩어진 여의보주처럼 용제건의 육신도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용제건은 학생들에게 도망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 주변을 바라봤다.

하지만 걷기 어려울 정도로 눈이 쌓인 은광고에는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어 보였다.

“용제건 선생님을 모시고 지익회가 있는 쪽으로 가자!”

“그래, 여기는 거주 구역이 가까우니까…….”

그 말을 들은 한 1학년 학생이 고개를 저었다.

높은 도수의 안경을 끼고 있는 학생의 이름은 박승현으로, 용제건이 구하기 전에 이미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보아하니 에너미가 아닌 다른 학생에게 공격받아 다친 듯했다.

“……지익회 쪽으로 가면 안 돼요. 학생회가 있는 중앙 구역으로 가야 돼요.”

“뭐? 그게 무슨…….”

“전 지익회장 형이 준 아이템인데…… 검게 변했어요.”

박승현의 손에 들린 것은 SR---급 소모형 아이템, ‘메시지 없는 전서구’였다.

사전에 설정한 목적지에 이능파를 전하는 아이템이었는데, 사용할 수 없는 카드처럼 검게 변해 있었다.

목적지가 사라졌다는 뜻이었는데, 즉, 전 지익회장이 사망했다는 의미였다.

“우…… 흐윽…….”

검은 카드를 내미는 박승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박승현은 담담하게 상황을 전하려다가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다.

전 지익회장 성시완은 오지랖이 넓은 학생으로 유명했고, 박승현은 다른 학생들에게 괴롭힘당하는 처지였나 보다.

성시완은 박승현의 처지를 알고 그를 돕기 위해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을 부르라면서 저 아이템을 건넨 것 같았다.

박승현은 단 한 번도 그 아이템을 쓰지 않고 가지고만 있던 것 같지만.

‘……성국언의 사촌 동생, 성시완이 죽었구나.’

용제건은 지익회가 전멸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올해 들어 지익회 소속 학생 수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1학년 학생들은 주수혁과 안다인의 카리스마에 이끌려 대부분 선도부와 학생회에 지원했는데, 거기에 더해 지익회 고문으로 들어선 최편득과 맞지 않아 그만둔 학생이 많았다.

또, 성시완에 이어 지익회장을 맡을 만한 인물이 없어 지익회장 선정에 고생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지익회는 수도 적고 성시완만 한 인물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성시완이 당했다면 지익회는 금방 무너졌을 거다.

용제건은 탄식하며 하늘을 바라봤다.

‘……저건.’

하늘에서 내리는 눈송이를 응시하던 용제건의 시야에 아주 낯익은 것이 들어왔다.

용제건의 최후의 순간, 그는 결계의 외곽에서 느꼈던 하늘의 위화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그동안 삿된 기운을 머금은 눈송이 탓에 잘 보이지 않았고, 지나치게 높은 곳에 있어 감지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오색 채운……!’

산산이 가루가 되어 허공에 녹아드는 여의보주의 작은 조각을, 오색의 구름이 정성스럽게 모으기 시작했다.

오색 채운은 계속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여의보주의 잔해를 삼키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거다.

패닉에 빠진 아이들은 전혀 느끼지 못했으나 용제건은 하늘을 뒤덮은 오색 채운의 존재를 알아챘다.

용왕신의 무녀가 다루는 오색의 빛으로 아롱진 구름 속으로 여의보주의 잔해가 점점 사라졌다.

‘……생각이 이어지지 않아.’

조금만 더 생각하면, 조금만 더 이 광경을 보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여의보주의 잔해마저 사라지고 나니 용제건의 의식이 버티지 못했다.

본신은 오색 채운에 삼켜지고 육신은 완전히 망가졌는데 혼이 이만큼 의식을 갖고 있던 것도 지나치게 오래 버틴 셈이었다.

용제건의 끝이 다가왔다.

*    *    *

황지호는 플마고에 관해 이렇게 고찰했다.

―내 가설은 이러하다. 그 게임, ‘플마고’는 이 세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자 이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다.

―그 게임은 새벽 별이 없는 이 세계의 미래를 시뮬레이션한 것일지도 모른다.

황지호는 플마고는 이 세계의 미래를 게임의 형태로 구현한 일종의 시뮬레이션이라고 가설을 세웠다.

나도 황지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황지호의 가설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면 리플레이의 정체도 추측할 수 있었다.

리플레이는 내가 플마고에서 플레이한 기록을 선택한 캐릭터 입장에서 보여 주는 일종의 재생 기능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재생 기능을 사용하면 게임을 플레이할 때 플레이어 입장에서 살필 수 없었던, 해당 캐릭터가 경험한 것들을 재생시킬 수 있는 듯했다.

‘리플레이가 시작하는 시점은 전부 게임의 튜토리얼부터였고, 리플레이에는 내가 모르는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이렇게 보면 리플레이는 단순히 게임의 기록을 재생하는 것뿐이지만, 당하는 캐릭터 입장에선 그렇지 않다.

최악의 미래가 현실감 넘치는 악몽으로 구현되는데 어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용제건은 괜찮을까…….’

용제건은 밤이 깊도록 눈을 뜨지 않았다.

‘퍼스트 크리스마스’ 도입부에 사망한 적호와 달리 용제건은 시간축이 왜곡된 은광고 내에서 에너미를 상대하고 학생을 구출한다.

용제건은 플레이어블 캐릭터였던 만큼 리플레이 때 움직인 곳, 구한 학생 수에 따라 다양한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리플레이를 사용할 때, 나는 용제건이 은광고의 결계 주변까지 도달했던 회차를 택했다.

즉, 용제건이 오래도록 살아남는 리플레이 회차를 택했으니 용제건은 적호보다 더 긴 악몽 속을 헤맬 거다.

‘……그냥 플레이 시간이 짧았던 쪽을 택했어야 했나.’

눈을 감고 있는 용제건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리플레이가 짧으면 용제건이 조금이라도 덜 고통받지 않을까?

그러면 눈 속에서 경험한 비참한 순간이 더 짧아지지 않을까?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쳤다.

‘아니, 가장 긴 리플레이에서 정보를 얻을 확률이 커.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지 못해 또 용제건을 악몽으로 밀어 넣느니 이게 나아.’

맵을 탐색한 범위가 넓고, 학생들을 여럿 구했으니 학생들로부터 정보를 얻을 가능성이 크다.

결계에 가까이 접근했으니 뭔가를 발견했을 수도 있다.

표정을 잃은 채로 잠든 용제건을 보니 나도 모르게 계속 변명을 하게 되었다.

“슬슬 용제건이 일어날 시간이 된 것 같으니 걱정 마라. 용제건은 멀쩡하다.”

황지호가 이 방에 있는 이들 중 누구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저런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전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용제건의 몸에 문제가 없는 건 안다.

문제는 일어났을 때다.

몇천 년을 형틀에 묶여 있어도 이성을 잃지 않았던 적호가 리플레이에서 일어났을 때 얼마나 흐트러졌던가.

적호가 눈을 뜬 순간 감격에 겨워 아들을 끌어안은 건 그렇다 쳐도 황지호에게 공격을 할 정도로 혼란스러워할 줄은 몰랐다.

어쩌면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노친네야 공격당해도 알아서 피하거나 막겠지만.

“용제건이 눈을 뜨겠군.”

백호군의 말과 동시에 용제건의 안색이 변하고, 그 주변의 이능파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리플레이에서 눈을 뜨기 전에 항상 있던 일이었으나 막상 눈으로 보니 용제건이 몹시 걱정되었다.

억지로라도 깨워야 하는 게 아닌가 망설여질 정도였다.

‘……김신록이나 적호 때보다 눈을 뜨는 게 조금 늦어.’

여태까지 리플레이에서 일어나는 이들을 관찰한 결과.

눈을 뜨기 직전에 죽음을 경험해서 그런 건지 다들 기상 직전에 상태가 가장 좋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현상일 뿐, 곧바로 정상으로 돌아와 눈을 뜨곤 했다.

용제건은 유독 눈을 뜨기 직전의 상태 악화 현상이 길었다.

“이제 일어날 것 같군.”

다행히 용제건의 이능파가 점차 정상으로 가라앉았다.

용제건의 이능파를 체크하는 황지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니 별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용제건이 악몽으로부터 깨어나 눈을 떴다.

파아아……!

용제건이 눈을 뜬 순간, 그의 긴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시안색으로 물들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용제건이 혼란스러워했다.

눈이 내리는 하늘이 아니라 호랑이 저택의 별채 천장이 눈에 들어와서 놀란 걸까.

용제건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

용제건의 시선이 제일 먼저 닿은 곳은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백호군이었다.

백호군을 알아본 용제건의 얼굴에서 눈에 띄게 핏기가 가셨다.

용제건은 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용제건은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왜 용제건이 백호군을 보고 놀라는 거지?’

용제건은 백호군을 보다가 손을 들어 올려 이능파를 운용했다.

용제건이 펼친 손바닥 위로 옥빛이 모여 서서히 형태를 갖추었다.

우우웅……!

옥빛은 곧 구형의 형체로 변하였다.

용제건의 손 위에 등장한 건 그의 본신인 여의보주였다.

용제건의 눈, 머리카락과 같은 색을 띤 여의보주는 찬란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여의보주에서 느껴지는 힘과 광채에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일순 말을 잊은 듯했다.

‘이것이 용제건의 본신, 소원을 이루어 주는 여의보주……!’

역시 용왕신의 총아, 가장 아끼는 여의보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이자 우리 반 부담임다운 힘에 감탄했다.

나만 감탄한 게 아닌 건지 황지호도 흥미진진해하는 얼굴로 여의보주를 바라봤다.

“저 모습을 보니 이능파 쪽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 같군.”

실체화한 여의보주를 손에 꽉 쥔 용제건이 뭐라고 입을 열려고 했다가 멈췄다.

용제건은 여의보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니, 용제건은 여의보주를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용제건은 여의보주에 비추어진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

용제건은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 여의보주에 비추어진 누군가를 확인했다.

용제건의 뒤에는 리플레이 도중 적호와 함께 별채로 온 김신록이 있었다.

김신록은 이 자리에 올까 말까 고민을 많이 한 듯했는데, 적호가 설득하여 결국 오기로 결정한 듯했다.

안 오려 한 것치곤 김신록은 용제건을 몹시 걱정하였다.

용제건이 일어나자마자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도록 계속 찻물을 데우고 우릴 정도로.

“……자.”

김신록이 숨을 몰아쉬는 용제건을 향해 찻잔을 내밀었다.

용제건의 시선이 용정차가 담긴 찻잔에서 차를 내민 김신록 쪽으로 향했다.

찻잔을 받아 드는 용제건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용정차가 담긴 찻잔을 받아 든 용제건은 기적을 보는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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