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바꿀 수 없는 것 (11)
“…….”
용제건은 한참 동안 김신록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실제인지 아닌지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용제건은 김신록에게 시선을 떼지 않다가 겨우 손을 움직여 용정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를 마시고 난 용제건이 처음으로 말했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구나.”
리플레이 속에서 이 상황과 비슷한 꿈이라도 꾼 걸까?
그 말을 한 용제건이 환하게 웃었다.
평소에 실눈을 뜨고 다닌 게 무색하게 용제건은 계속 시안색 눈을 크게 뜨고 있었는데, 눈을 휘며 밝게 미소 지었다.
언뜻 보기에 용제건 특유의 황홀한 표정과 비슷해 보였으나 지금 용제건의 미소에는 꺼림칙한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다.
‘적호처럼 황지호를 공격하거나 격한 반응을 보일 줄 알았는데.’
처음에 백호군을 보고 힘을 개방해 여의보주를 꺼내 든 걸 제외하면 용제건은 침착해 보였다.
적호가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용제건은 1년 내내 김신록의 부활을 소원으로 빈 듯했다.
그 소원의 대상인 김신록을 발견해서 그런 걸까?
용제건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이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나.’
용정차를 한 잔 비울 때쯤에는 김신록에게서 눈을 떼고 상황 파악을 할 여력이 생긴 것 같았다.
이 자리에 있는 건 용제건을 제외하면 김신록, 적호, 백호군, 황지호, 나.
용제건은 차례차례 시선을 옮겨 얼굴을 확인했다.
적호를 봤을 땐 반가워 보였고, 백호군에겐 당혹스러움을 느낀 듯하나 이내 ‘아.’ 하고 중얼거린 후 무언가를 납득했다.
황지호와 눈이 마주쳤을 때에는 한순간 표정이 사라졌으나 평소의 능글거리는 얼굴로 무표정을 덮어 버렸다.
‘황지호에겐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나 보네.’
그리고 용제건이 마지막으로 날 발견했다.
용제건은 가만히 나를 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혹시 내가 기억이 안 나나?
여기에 있는 이들은 다 나를 제외하면 신화 시절부터 알고 지낸 이들이고, 용제건의 악몽 속에서는 내가 등장하지 않았으니 그럴싸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진 말을 들으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오랜만에 그 이름으로 부르고 싶은데, 괜찮을까?”
“무슨 이름.”
“네가 나한테 처음으로 알려 준 이름. 은인인 의신이한테도 네 첫 이름을 소개해 주고 싶어서. 내 이름의 기원도 말해 주고 싶고.”
용제건이 김신록에게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나한테 김신록이 처음으로 사용한 이름을 알려 주고 싶다고?
용제건이 리플레이가 아닌 이 세계, 나 조의신을 인식하고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용제건의 사고 흐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잠자코 지켜보던 적호가 김신록에게 말을 걸었다.
“아들아, 은인은 아직 내가 네게 붙여 준 이름을 모른단다. 이번 기회로 알려 주는 게 어떻겠느냐.”
“적호 님…….”
용제건이 내게 말하려는 김신록의 이름은 적호가 붙인 이름인가 보다.
그럼 신화 시대에 사용하던 이름인 건가?
여전히 왜 용제건이 그걸 나한테 알려 주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뜻깊은 이름인 건 분명하다.
김신록이 머뭇거리다가 용제건에게 말했다.
“……마음대로 해.”
“고마워, 제호야.”
제호?
그게 김신록의 첫 이름인 건가?
은호의 후예 막내인 은재호와 이름이 비슷한 것 같은데.
처음 느낀 인상은 그러했는데 제호라는 이름을 곱씹다 보니 뭔가 마음에 걸렸다.
‘가만, 용제건과 이름이 겹치는 것 같은데…… 아까 용제건이 이름의 기원을 알려 준다는 것과 관계가 있나?’
용제건이 내 의문을 풀어 주려는 것처럼 ‘제호’의 유래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신록이가 처음 사용한 이름은 제호야. 붉은 비단, 붉은색을 가리키는 제(緹)에 호랑이 호(虎)를 써. 제호의 색과 어울리지?”
“이거 놔.”
용제건이 김신록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집어 들며 말하자, 김신록이 재빠르게 용제건의 손을 쳐 냈다.
용제건은 순순히 손을 쳐 내는 대로 물러났다.
김신록은 본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서 붉은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과연 붉은 비단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았다.
“내 이름 용제건 석 자 중 ‘제’ 자는 제호의 이름에서 따왔어. ‘건’ 자는 제호가 지어 준 거야. 처음 만난 날 내가 하늘에서 비행하다 내려온 걸 보고 하늘 건(乾) 자를 붙여 줬지.”
용제건의 이름에 그런 비화가 있었나!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이름 유래를 이제야 알게 되다니.
플마고 설정집에는 캐릭터 이름에 한자 병기가 안 된 캐릭터도 꽤 있었고 용제건은 그중 하나였다.
언제부터 사용한 이름인지도 알 수 없었는데 이런 비화가 있었나?
하긴 김신록의 존재와 이름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망겜이 그런 중요한 정보를 플레이어에게 전달할 리가 없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중요 정보를 알게 되어 기뻐하고 있을 때,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용제건은 자기 이름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어.’
단체로 방송국에 가던 날.
2학년 0반 소속 연가람이 용제건을 불러내 개명 허가 신청서를 내민 적이 있었다.
그날 연가람은 이렇게 말했다.
―제갈재걸 선생님의 ‘재걸’과 용제건의 ‘제건’의 발음이 너무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빠르게 말하면 차이가 별로 안 나요. 자주 이름을 바꾸는 진족도 있다는데 이참에 바꾸는 게 어떠세요?
이 말에 용제건은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난 이 이름이 마음에 드니까 안 바꿀 거야.
딱히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다짜고짜 이름을 바꾸라고 진상을 부리면 무시하는 게 당연하긴 하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걸 들으니 용제건은 정말로 자기 이름을 소중하게 여기는 듯했다.
친우의 이름에서 따오고, 친우가 붙여 준 이름이라 더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적호는 이걸 듣고도 괜찮을까?’
용제건이 이름 자랑을 하자 나도 모르게 적호 쪽을 봤다.
그렇게나 아끼는 아들한테 붙여 준 이름이 갑자기 유희계 용한테 붙어 있으면 기분이 좀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적호는 오히려 흐뭇해하며 용제건의 이름 자랑을 지켜봤다.
“제 아들과 그 친우의 사이가 좋아 보여 기쁩니다.”
“……적호, 처음에 용제건이 제호의 이름을 따왔다는 말을 듣고 네가 했던 말을 잊었나?”
황지호는 적호의 태도를 괴이쩍게 여기는 듯했다.
“제호의 이름은 저 용을 위해 지은 게 아니라며 노발대발했지 않았나. 용왕신의 탕아가 아들의 이름을 훔쳐 갔다고 이를 갈던 게 생생하군.”
“……네?”
“하하하하! 믿지 못하는 건가. 적호는 용제건과 네 친우 관계가 끝난 순간, 이름을 돌려받기 위해 용제건에게 결투를 신청할 거라고 선언했었다.”
김신록은 황지호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했는데, 뒤에서 지켜보던 백호군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백호군이 저렇게 진중하게 거들 정도이니 황지호가 거짓말을 하거나 과장을 하는 건 아닌 듯했다.
거기에 더해 적호도 그 말에 못을 박았다.
“그건 사실입니다. 제호의 이름은 저 아이를 위해 지은 겁니다. 갑자기 웬 용왕신의 탕…… 총아가 귀중한 이름을 채 가니 좋게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둘의 우애가 깊으니 보기 좋지 않습니까.”
황지호의 말이 전부 사실이긴 하지만 적호의 생각이 바뀐 거구나.
리플레이 이후 용제건과 술자리를 가져서 틈을 보인 것도 그렇고, 적호는 그 악몽의 영향을 크게 받은 듯했다.
이름 자랑을 마친 용제건이 내게 말을 걸었다.
“의신아, 네가 제호를 구한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어?”
유희계 용이 이유 모를 행동과 말을 갑자기 하는 건 이상하지 않지만, 방금 한 말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었나 보다.
“제호의 은인은 내 은인이나 다름없어. 고마워, 의신아.”
설마 그 이름 자랑은 이 말을 하기 위한 포석이었나.
김신록의 구조 과정에 있어선 정말 내가 한 게 없었기에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날 김신록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작전을 입안했으니 이렇게 감사받을 이유가 없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인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쓰러진 감독관 김신록을 시체 취급 했는데, 몸 둘 곳이 없었다.
용제건이 오해하기 전에 그날 있던 사실을 말했다.
“전 그날 김신록 선생님이 살아 계시다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시신이 온전한 형태로 남길 바라서 그 자리를 피해 움직였을 뿐이에요. 제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렇게 행동했을 거예요.”
객관적인 사실을 전했는데 어쩐지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호랑이들과 용제건은 따뜻한 시선을 보낼 뿐, 전혀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조의신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저도 그렇습니다.”
“기숙사로 찾아가 감사 인사를 했을 때에도 저렇게 말했죠…….”
“…….”
호랑이들이 저렇게 한마디씩 하고 나니 뭐라 더 말하기 힘들었다.
그나마 백호군은 평소대로 침묵하고 있었지만, 다른 호랑이들과 비슷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용제건은 방금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나를 은인이라 불러 댔다.
“은인의 소원을 이루어 주고 싶어.”
그 말에 순간 울컥했다.
소원이라고?
여의보주인 용제건이, 자진해서 소원을 들어준다고?
간단한 소원이라면 모를까, 내가 큰 소원을 말하면 용제건은 혼과 육신을 깎아야 하는데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하는 건가.
내가 용제건을 악몽으로 밀어 넣은 장본인이라는 걸 잊은 걸까?
총명한 용제건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못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만큼 리플레이의 영향이 큰 게 분명했다.
용제건은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두고 계속 말했다.
“내 소원은 이미 의신이 네가 이루어 줬어. 그러니 내가 네 소원을 들어줄게.”
용제건이 무작정 내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에 화가 날 뻔했는데, 저렇게 다정하게 말을 하니 화낼 수가 없었다.
친우가 살아 있는 현실이 그렇게 좋은 걸까.
용제건은 내가 소원을 말하기를 기다리고, 호랑이들은 이걸 말리지 않고 지켜봤다.
적어도 용제건의 친우인 김신록은 말려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김신록은 모르는 척 고개를 숙이고 차를 달이고 있었다.
결국 내 입으로 거절의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면 계속 의신이를 귀찮게 굴 건데? 괜찮겠어?”
그 말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긴 하지만, 용제건이 귀찮게 군다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성가실 게 틀림없었으니까.
다행히 김신록이 용제건을 말렸다.
“호족의 은인을 귀찮게 굴지 마.”
“하하하, 농담이야.”
전혀 농담 같지 않았는데.
나는 머리를 굴려 얼른 소원을 처리하기로 했다.
“그럼 소원을 빌게요. 악몽 속에서 본 것들을 설명해 주세요.”
“그건 무효야. 의신이가 묻지 않아도 말해 줄 생각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방금 왜 여의보주를 구체화했는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그것도 설명할 생각이었으니까 무효 처리 할게.”
용제건은 어지간한 소원이 아니면 성이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얼른 저 소원을 써 버려야 할 텐데.
“그 악몽이라는 것부터 무엇인지 말해 줘.”
“네가 본 건 조의신이 없었다면 일어났을 일이다. ‘리플레이’라고 부르지.”
“그렇구나.”
황지호의 대답에 용제건은 바로 납득했다.
저 반응을 보니 꿈에서 깨어난 이후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나 보다.
용제건은 백호군을 보며 말했다.
“일단 의신이의 두 번째 질문부터 답할게. 리플레이 속에서 내가 죽던 날, 은광고의 크리스마스 행사 당시 결계 밖에 백호 씨가 와 있었어.”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백호군은 그날 은광고 밖에서 결계를 파괴하려 시도했다.
용제건을 유도한 방향도 백호군이 결계를 깨려 했던 위치였다.
“그래서 백호 씨를 본 순간, 내가 구조당해서 은광고 결계 밖으로 나온 줄 알았어. 나갈 생각이 없었기에 당황한 나머지 급히 여의보주를 불렀지. 밖으로 나가면 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
나갈 생각이 없는 것과 여의보주를 부른 게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적호만이 그 말을 곧바로 이해한 듯 탄식했다.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한 용제건은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잘 생각해 보면 내가 살아남았을 리가 없는데 말이지. 내 본신, 여의보주는 산산이 흩어져 용왕신의 무녀들 손에 들어갔으니까.”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