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38화 (536/925)

75. 바꿀 수 없는 것 (12)

용제건은 담담하게 말했으나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용제건의 본신, 여의보주가 산산조각 난다는 말은 흔적도 남지 않고 죽는다는 말과 같다.

김신록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리플레이 속에서 용제건이 죽었다는 건 알아도 그렇게 죽은 줄은 몰랐나 보다.

시체조차 온전히 보존하지 못했다는 말과 다름없으니 충격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도 플마고를 플레이 안 했다면 충격받았겠지.’

여의보주에 금이 가다가 이내 허공으로 흩어지는 연출은 리플레이한 횟수만큼 봤다.

그 이후에 리플레이를 하겠냐는 문구가 떴고, 이에 응하면 처음부터 용제건 파트를 재시작하게 된다.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용제건은 사망 처리 되고 바로 다른 캐릭터의 시점으로 넘어간다.

즉, 용왕신의 무녀들 손에 산산이 흩어졌던 여의보주가 들어간다는 건 처음 안 사실이었다.

‘플마고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용왕신의 무녀가 이때 등장하다니.’

용왕신의 무녀가 직접 언급되고 이들이 배신을 했다는 걸 인식한 건 염준열의 사망을 계기로 한 붉은 사자와 용족의 봉기가 진행되던 중이었다.

용왕신의 가호가 사라져 염방열이 홍염에 휩싸여 사망한 직후에도 아무도 용왕신의 무녀들을 의심하지 못했다.

염방열이 사망하자 붉은 사자가 무너졌다.

그러자 용살자 카드모스를 억누를 수단이 사라지고 카드모스의 손에 수많은 용족이 스러져 갔다.

지력을 사용해 대항하던 용족의 수장 청룡이 극적으로 용왕신의 무녀들의 배신을 알아채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후였다.

‘……배신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루어져 있었구나.’

붉은 사자와 청룡에게 발각되지 않고 오랫동안 배신을 꾀해 왔다면 물밑에서 움직였던 게 당연할 거다.

여전히 왜 용왕신의 무녀가 배신했는지는 알 수 없다.

흑막이 회유를 한 건지, 협박을 한 건지, 조종을 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무녀가 자진해서 따른 건지.

이유를 판단할 근거는 없지만, 무녀들이 흑막을 도와 행동했다는 건 변함이 없다.

여의보주의 잔해를 모았다는 것도 분명 그 연장선일 가능성이 컸다.

“내 본신이 산산조각 나서 흩어질 때, 하늘을 보니 용왕신의 무녀들이 다루는 오색 채운이 보였어.”

“붉은 사자 팀 빌딩에 있던 오색 채운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오색 채운은 은광고 결계 내부 안에 있었어. 내가 죽을 때까지 삿된 눈 뒤에 숨어 있던 모양이야.”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 속, 은광고에 내리는 눈 뒤에 그런 구름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눈 아래에서 학생들과 교사들이 죽어 나가도 오색 채운은 모습을 감추고 기다리고 있던 거다.

용제건의 힘이 다해 여의보주가 산산조각 나는 그 순간까지.

섬뜩한 사실이었으나 김신록을 제외하면 동요한 이는 없어 보였다.

용제건에게는 내가 용왕신의 무녀들이 배신했을 가능성을 전했고, 다른 호랑이들에게는 은호가 말해 둬서 그런 것 같다.

한 명, 김신록은 아직 그 배신의 가능성이 100%가 아닐 경우를 고려하고 있는 듯했지만.

“……누군가가 용족을 분열시키기 위해 준비한 계략일 가능성은 없어?”

“없어. 이간질이 성공하려면 내가 생존해서 무녀의 배신을 청룡에게 전해야 할 텐데, 내 죽음이 확정되고 나서야 오색 채운이 나타났잖아?”

“그래, 그렇지…….”

용제건의 대답을 들은 김신록이 고개를 떨구었다.

김신록은 먼 옛날부터 용족과 교류가 있었으니 용왕신의 무녀들과도 안면을 텄던 모양이다.

용제건은 김신록이 고개를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방송국 사건을 계기로 용족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어. 그리고 용족의 은인이 한 조언도 있어서 무녀들을 의심하고 있었지.”

“그때 말인가? 용족이 호족의 은인에게 큰 빚을 졌지.”

그냥 이름을 부르면 될 것을 저 진족들은 왜 은인 운운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용제건은 용족의 은인이라고 표현했는데 황지호는 자연스럽게 저게 나라고 단정 짓는 걸까.

맞는 말이긴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눈앞에서 은인 소리 하는 걸 내가 민망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저 둘이 알아채고 일부러 쓰는 것 같다.

“용족의 은인은 우리에게 몇 가지 제안을 했어. 그중에서 두 가지를 들자면 첫째, 용살자의 옥지기로 무녀를 붙이지 말 것. 둘째, 무녀의 곁에는 늘 경호를 붙일 것.”

용제건은 꿋꿋하게 은인 소리를 하며 그날 내가 한 제안을 설명했다.

“경호라고 하긴 했지만, 감시라고 하는 표현이 옳을 거야.”

“감시 결과는 어떻지?”

“아직 별 소득은 없어. 용족의 은인이 한 제안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의심을 접고 감시를 그만뒀을 거야.”

저런 평가가 나올 정도라면 배신자는 철저히 본색을 감추고 있는 듯하다.

1년도 안 되는 감시 기간 중에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배신자의 정체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과연 그 흑막이 중요한 순간에 비장의 수로 사용할 만한 걸물인 건 확실하다.

그때, 적호가 질문을 던졌다.

“오색 채운이라고 하면 다섯 가지 색의 구름 아닙니까. 용왕신의 무녀 다섯 명 다 배신자라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딱 잘라서 단정 지을 수는 없어.”

용제건은 그 말을 하며 이능파로 허공에 다섯 개의 원을 그렸다.

다섯 개의 원 위에는 녹(綠), 벽(碧), 홍(紅), 자(紫), 유황(硫黃) 각각의 글자가 새겨졌다.

용왕신의 무녀들을 상징하는 오간색이었다.

“용왕신의 무녀들은 오간색에서 따온 이름을 받았어. 참고로 무녀들의 이능파의 색도 상징하는 색과 같아. 구름을 다룰 때에도 보통 제 이름과 같은 색의 구름을 다뤄. 하지만…….”

용제건이 허공에 떠오른 다섯 개의 원을 하나의 선으로 이었다.

그러자 오각형의 꼭짓점 위, 무녀들의 색 이름이 쓰인 원이 떠 있게 되었다.

용제건은 ‘벽(碧)’이라고 새겨진 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녀들은 인접한 색에 위치한 구름을 다룰 수 있어. 예를 들어 벽의 무녀는 벽색의 구름 외에도 홍색과 녹색의 구름도 부릴 수 있지.”

“유사한 색을 부릴 수 있는 겁니까? 그렇다 해도 배신자는 한 명이 아니군요.”

적호의 말대로였다.

용제건이 말해 준 정보에 따라 상황을 분석하면 배신자가 없거나 한 명일 경우의 수가 사라진다.

“배신자는 최소 두 명이야. 한 명이 최대 구름을 세 개 부릴 수 있으니, 다섯 색의 구름을 다루려면 적어도 두 명이 필요하지.”

“두 명 이상이라는 건 다섯 명 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거군.”

용제건이 고개를 끄덕이곤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허공에 떠올라 있던 옥색의 이능파 글씨들이 입자로 변해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능파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자 용제건이 여전히 침울해하는 김신록에게 말을 걸었다.

“꿈속에서 눈을 많이 맞아서 그런지 몸이 찬 것 같아. 차를 더 마시고 싶은데.”

“네 체온은 정상이다, 용제건.”

황지호가 사실에 근거하여 용제건의 말을 받아쳤다.

그러나 용제건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김신록은 악몽을 헤매고 온 친우가 걱정된 듯 군소리 없이 찻잔을 내밀었다.

“……자.”

“잘 마실게, 제호야.”

용제건은 용정차를 더 얻어 마시며 김신록의 주의를 돌렸다.

덕분에 김신록이 어두운 생각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은광고가 눈에 뒤덮였긴 했지만 나름 용제건이 눈을 많이 안 맞게 조심했는데…….

게임적으로 말하면, 눈에 맞으면 상태 이상에 걸리므로 이능파로 방패를 만들거나, 처마가 있는 건물 주변으로 이동하는 등 나름 다양한 전략을 활용했다.

플레이어로서 항의하고 싶었지만, 용제건이 저런 소리를 할 만큼 여유를 되찾은 건 바람직한 일이므로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옛일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부고를 들었어. 그게 꿈의 시작이었지.”

무녀 이야기를 일단락한 용제건은 리플레이에서 겪었던 일을 차례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용제건은 나름 주요한 정보를 추려서 설명하고, 많은 부분을 생략했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김신록의 부고를 듣던 날,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가 시작되던 날. 아침에 용왕신의 무녀가 말을 걸었어.’

두 날 다 용왕신의 무녀가 날씨를 화제로 용제건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용제건이 어째서 리플레이를 처음부터 이야기하지 않고 용왕신의 무녀에 관련된 부분을 먼저 집어서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용제건의 악몽 속 처음과 끝에는 용왕신의 무녀가 있었으니까.

아주 짧게 이야기를 마쳤는데, 어느덧 해가 뜨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용제건, 네가 겪은 일을 보고서로 제출하도록.”

“교복을 입은 황호 씨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하네.”

일단 용제건이 1학년 0반 부담임이고 황지호가 0반 학생인데 모양새가 좀 그렇긴 했다.

용제건은 평소대로 실눈을 하고서 교복 차림의 황지호를 보며 말했다.

“이 보고서는 황호 씨만 보는 게 아니지?”

“그래,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보게 될 거다.”

“그래? 그러면 황호 씨가 신역의 수호자로서 얼마나 방만했는지 모두가 알게 되겠네.”

리플레이를 경험해서 그런 건가, 어째 용제건의 태도가 신랄해져 있는 것 같았다.

용제건에 이어 적호가 한마디 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건 그렇네.”

리플레이 경험자끼리는 통하는 게 있나 보다.

황지호가 태만했던 건 사실이라 반박할 길이 없는지 화제를 돌렸다.

“과거의 일은 어쩔 수 없지. 다들 등교 전에 아침이나 들고 가도록.”

리플레이로 밤을 지새웠지만 오늘은 평일, 등교일이다.

하루 내내 용제건에게 리플레이에 관한 정보를 캐고 싶었지만, 학교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축제와 크리스마스 이벤트가 닥쳐오는데 1학년 0반은 심각한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나중에 보고서를 보고 용제건에게 추가 질문을 하는 게 효율적일 거야.’

아침을 먹고 등교할 준비를 할 때.

호랑이들의 눈을 피해 용제건이 말을 걸었다.

“의신아, 예전에 내가 거래했다던 상대 기억나?”

용제건이 했던 거래라 하면, 비탄의 웅녀와 했던 걸 말하는 건가?

용제건은 많은 말을 생략했지만 리플레이가 끝난 시점에서 그 거래에 관해 언급하는 이유는 하나일 거다.

용제건은 리플레이에서 비탄의 웅녀와 만난 거다.

‘보고서에 그 이야기를 쓸 수는 없겠지.’

용제건이 비탄의 웅녀와 만난 걸 알면 호랑이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거래에 관해서 쓸 수도 없을 테니, 용제건은 보고서에서 그 부분을 생략할 거다.

“그 거래 대상에게 조언을 들었는데…… 올해가 가기 전에 그걸 따를 생각이야.”

용제건은 비탄의 웅녀와 이야기한 직후 용궁에 언제 같이 가지 않겠냐며 제안했다.

비탄의 웅녀는 용제건과 만나 용궁에 관해 언급한 걸까?

현실에서도, 어쩌면 리플레이 속에서도.

“의신이 너는 내년에 용궁에 갈 예정이지?”

“……네, 계승식에 맞춰서 갈 예정이에요.”

용제건은 흥미진진해하는 얼굴로 웃었다.

리플레이도 용제건의 저 성정을 바꿀 수 없었나 보다.

“나는 해가 바뀌기 전에 용궁에 들를 생각이야.”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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