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39화 (537/925)

76. 은광고 입학 시험 (1)

방과 후, 체스 소모임 스테일메이트의 부실.

축제를 맞아 스테일메이트에서는 체스 이벤트를 열 계획인지 이런저런 흔적이 많았다.

초심자를 위한 체스 강좌부터 고수들을 대상으로 한 묘수풀이, 스테일메이트 부원을 지목해 벌이는 다면 대국 등등.

정식 동아리가 아닌 소모임인 만큼 인원수는 그리 많지 않아 대규모 행사는 준비하지 못한 듯하나 남은 자취를 보니 부원들의 열의가 느껴졌다.

조금 식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을 때, 용제건이 온장고에서 캔 커피를 하나 꺼내 건넸다.

“오늘 학급 회의 고생 많았어. 아쉽네. 마실래?”

“감사합니다.”

“용족의 은인은 참 예의 바르구나.”

캔 커피를 받아 들며 감사 인사를 했을 뿐인데 용제건이 과장된 소리를 했다.

그리고 저 용족의 은인 소리는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아침 식사를 하고 등교를 하는 내내 황지호와 용제건이 짜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은인 소리를 해 대서 귀가 아플 지경이다.

용제건은 악몽 속을 1년가량 헤맸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멀쩡한 모습을 보였다.

속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앞에서 너스레를 떨고 호족의 눈을 피해 스테일메이트 부실에서 만나자고 나와 약속을 잡을 만큼 능청스러웠다.

‘그러니까 플마고에서 티가 안 났겠지.’

악몽에서 깨어나 살아 있는 김신록을 보고 나한테 용제건의 이름 유래를 알려 주고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제안할 만큼 용제건은 크게 감격했다.

용제건은 김신록을 잃고 크게 상심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플마고 상에선 용제건과 죽은 감독관이 친우 사이였다는 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용제건이 체스 소모임의 고문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용제건이 인기 있는 플레이어블 캐릭터였는데도 나는 아는 게 없던 거나 다름없었다.

“오늘 학급 회의에서 얘기 나온 거 말인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줘.”

용제건의 말에 오늘 수업을 마치고 진행한 학급 회의 결과가 떠올랐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우리 반은 수업을 마치고 임시 학급 회의를 열었다.

학급 회의의 주제는 축제 준비였다.

―길동…… 루이스랑 슬비한테 연락해 보셨나요?

―응, 축제 준비를 할 예정이니까 참석해 달라고 했는데…….

김유리는 관종들과 연락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별 성과를 얻지 못했다.

관종들은 테마파크 기념품을 만들어 우리에게 택배로 보낸 직후, 한반도를 떴다고 한다.

―모처럼 등교했는데 아쉽다……. 외국에는 무슨 일로 간 거래?

―음…… 물어봤는데 대답을 듣지 못했어. 나중에 깜짝 놀래켜 주고 싶다더라.

권레나의 의문에 힌트를 준 건 뜻밖에도 민그린이었다.

―……어, 루이스한테서 힌트 비슷한 걸 듣긴 했어.

―뭐! 그 오로라 관종 놈이랑 연락해?

옹길동과 민그린이 연락한다는 사실에 송대석이 발끈했다.

민그린은 그런 송대석을 바로 나무랐다.

―대석아, 반 친구한테 관종 놈이라고 부르면 어떡해! ‘놈’ 자는 빼!

관종이란 말도 별로 좋은 말이 아니긴 한데, 옹길동이 관종인 건 사실이라 그냥 그건 용인하기로 했나 보다.

―그래서 그 힌트가 뭔데?

―우리 반 급훈.

민그린은 옹길동과 나눈 메시지 로그를 공개했다.

옹길동의 메시지에는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미사여구와 함께 민그린의 작품 활동을 응원하는 말이 가득 쓰여 있었다.

어디 가냐고 묻는 말에는 밝힐 수 없는 대신 힌트를 주겠다며 사진 하나를 첨부했다.

그 사진에는 우리 반 급훈 ‘정시 등교’가 인쇄된 홀로그램 패널이 찍혀 있었다.

―사진 구도가 훌륭합니다. 또, 패널을 잘못 찍으면 글자가 선명하게 나오지 않는데, 빛 조절을 잘했군요.

―……학교도 안 오면서 저건 언제 찍은 거지?

한이의 물음은 지당했지만, 신출귀몰한 관종들이 관종 짓 중에 시간을 내서 찍었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정시 등교’.

도난당한 출석부.

등장 기회를 노리던 관종들의 관종력.

소풍을 즐기던 두 사람.

기념품까지 만들어 줄 정도로 친해진 옹길동.

갑자기 해외로 떠난 관종들.

뭔가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이 모든 걸 종합해 보니 관종들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설마 그 관종들은 그 아이들을 찾으러 간 건가?’

나와 같은 결론에 이른 건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저번에 걔들 출석부도 훔쳐 갔지.

―아하하…… 그렇네.

독고미로와 김유리는 바로 감을 잡은 듯했다.

두 사람을 시작으로 반 아이들도 차례차례 눈치를 챘다.

맹효돈만 빼고.

―……?

맹효돈은 답을 찾으려는 듯 ‘정시 등교’라는 급훈을 뚫어지게 바라봤지만, 그것만으로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때, 황지호가 입을 열었다.

―등교하지 않는 반 아이들을 찾으러 간 거겠지. 결석 중인 셋 중 둘은 해외에 있으니까.

1학년 0반은 총 열여섯 명.

그중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건 세 명.

이 셋 중 둘은 목우람처럼 해외 생활 중이었나 보다.

한 명은 한국에 있는데도 왜 등교를 안 하는 걸까?

한 번쯤 얼굴을 보이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황지호가 처웃기 직전의 얼굴로 나를 봤다.

뭔가를 기대하는 표정이었는데, 지금 노친네를 상대할 생각이 없었기에 무시하기로 했다.

―음…… 그럼 슬비랑 루이스는 축제 참가가 어렵겠네.

김유리가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반 아이들을 바라봤다.

반 아이들 대부분이 등교를 안 하고, 등교를 하는 아이들도 부 활동이나 대외 활동으로 바빴다.

―미안…… 태호권 소모임 일이 그렇게 바빠질 줄은 몰랐어.

―아냐, 나도 학생회 일로 계속 바빴으니까.

부 활동을 하는 아이들 중 그나마 시간을 낼 수 있던 건 한이였는데, 그것도 어렵게 되었다.

태호권 소모임에서 시연 연습 중에 부상자가 나오고 3학년 중 몇 명이 해외 봉사 활동을 가 인원수가 부족해졌다고 한다.

독고미로가 가서 잡일을 돕고 있다고 하는데, 결국 부원은 아니기 때문에 도울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다.

‘황지호가 돕는다고 해도 한계가 있겠지. 학교 측에서 아무리 지원을 해 줘도 부원 수가 모자란 건 어쩔 수 없어.’

이대로 가면 그럴듯한 축제 기획물을 준비하는 건 불가능하다.

반 분위기가 가라앉으려 할 때, 계속 지켜보고만 있던 함근형 선생님이 말했다.

―학교 축제는 학생들이 그간 얻은 성과를 발표하고, 함께 즐기는 행사다. 부담을 주기 위해 열리는 게 아니야.

―함근형 선생님…….

함근형 선생님의 말은 짧았지만, 의도는 반 아이들에게 전달되었다.

우리 반은 수가 적고 다들 각자의 사정으로 바쁘고 힘들었다.

그런 우리 반이 은광고의 역사 깊은 동아리들이나 2학년 0반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축제 참가물 같은 걸 준비하려면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부담에 짓눌리면 축제를 즐기는 건 불가능할 거다.

―우리 반이 얻은 성과…… 함께 즐겼던 것…….

김유리가 중얼거린 말에 반 아이들이 동시에 같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렇게 우리 반의 축제 참가 기획물이 결정되었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우리 반다운 축제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용제건 선생님은 스테일메이트 일로 바쁘실 테니 괜찮아요. 말씀 감사합니다.”

“우리 부원들은 다 알아서 잘해서 내가 도울 일이 없는데.”

“우리 반도 그럴 거예요.”

“그래, 그렇지.”

돕겠다는 걸 거절했는데 용제건은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다.

여기저기 축제의 준비로 어질러진 부실을 보고 황홀해하는 표정을 잠시 지었는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면 본론부터 말해 볼까. 의신이 네가 짐작한 대로, 보고서에 담기 어려운 내용에 관해 말하려고 불렀어.”

호족이 보는 보고서에는 담기 어려운 내용.

뻔뻔한 용제건도 차마 밝힐 수 없는 내용이라면 그 ‘거래했다던 상대’와 관련되어 있을 거다.

용제건은 여기에서 아침에 운을 뗐던 말을 이어서 할 모양이다.

“나는 리플레이 속에서 비탄의 웅녀 씨를 만났어.”

그 말을 시작으로 용제건은 리플레이 속에서 비탄의 웅녀와 만난 이야기를 했다.

“비탄의 웅녀 씨는 그 정보를 잡기 위해 마족(魔族)과 거래했대. 웅녀 씨가 제작한 아이템을 대가로, 은광고의 결계를 깬 자에 관해서.”

비탄의 웅녀는 마족과 불리한 계약에 응해 정보를 잡았다.

그 정보는 은광고의 결계를 깬 자가 용왕신의 무녀와 손을 잡고 용궁을 노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세계에서도 비탄의 웅녀 씨는 마족으로부터 정보를 캐내서 내게 용궁에 갈 걸 권했어. 아마 같은 마족이겠지.”

플마고와 이 세계의 다른 점이 있다면, 웅녀는 마족과 거래하지 않았다는 것.

웅녀가 마족과 거래하지 않은 만큼 자세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지만, 마족이 그 아이템 카드를 얻는 건 막았다.

‘그 아이템 카드는 지금 나한테 있지.’

‘부(富)와 생명의 무게’.

플마고대로 흘러갔다면 비탄의 웅녀가 마족에게 넘겼을 아이템 카드다.

하지만 일찌감치 선수를 쳐 내가 먼저 환몽 경매 때, 비탄의 웅녀와 거래를 해 손에 넣었다.

“웅녀는 올해 내가 용궁에 갈 걸 권했지만, 사실 조금 미룰 생각이었거든. 의신이 너는 내년에 용궁에 방문할 예정이잖아? 그냥 같이 가려고 했지.”

내가 용궁에 가는 건 ‘용왕신의 무녀’ 시나리오가 발생하는 계승식 즈음이다.

계승식이 열리는 건 내년 음력 정월 초하루.

나는 계승식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 움직일 생각이지만, 어쨌든 계승식은 내년이다.

‘용제건이 미리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무녀들이 한반도에 있는 사이에 용궁을 다녀오는 거라면 안전할 테고.’

용제건은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다음 주 입학 실기 시험 순찰이 끝나는 대로 출발할 생각이야.”

“……그럼 얼마 안 남았는데요?”

“빨리 용궁에 다녀와서 축제를 즐기고, 크리스마스를 보내려면 서둘러야지.”

그렇게 말하며 용제건이 시안색의 눈을 잠시 크게 떴다.

퍼스트 크리스마스를 경험한 용제건의 각오는 남다른 듯했다.

“같이 가고 싶은데, 의신이는 안 되겠지?”

“내년에는 같이 갈게요.”

“하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저녁도 안 먹이고 붙잡아 둬서 미안. 뭐 먹으러 갈까?”

이야기를 마친 용제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을 먹으러 가자며 용제건은 주변의 레스토랑의 이름을 늘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용제건은 염준열과 같이 하교하지 않나?

지금 시간이 좀 늦었는데 이미 염준열은 하교한 게 아닐까.

내 생각을 꿰뚫어 본 용제건이 말했다.

“준열이는 오늘 늦게 하교할 거야. 저녁 같이 먹으러 가자. 준열이가 보낸 메시지에 나와 있지 않았어? 다음 주가 입학 실기 시험이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여전히 준열이가 아침마다 메시지를 보내나 보구나.”

그냥 대답을 하지 말걸.

용제건의 말장난에 걸려 괜한 정보를 흘리고 말았다.

용제건은 해산물 레스토랑을 하나 정한 후,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냈다.

“학생회 아이들은 실기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마지막으로 동선을 체크하고 고사장을 점검하기 바빠. 우리가 기다려야 할 거야.”

오늘 저녁은 염준열, 용제건과 함께 먹게 될 것 같다.

그런데 염준열에게 보내는 메시지치곤 좀 길게 쓰는 것 같은데.

황홀하게 웃는 게 또 무슨 짓을 꾸미는 것 같았다.

“신록이도 불러야지.”

……김신록이 과연 이 식사 자리를 달가워할까?

김신록은 리플레이를 겪은 용제건을 내내 걱정하는 눈치였으니 억지로 나오겠지만.

예상대로 김신록은 식사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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