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은광고 입학 시험 (3)
13조가 웅족의 권속을 상대하던 날, 염준열은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플마고 속에서도, 이 세계에서도.
그날 염준열이 그 주변에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당시 13조가 입학시험을 치르던 체육관은 N+급 수험용 장외판정 결계로 가두어져 있었다.
희귀도만 따지면 은광고 학생 대부분이 쉽게 부술 수 있는 수준이지만, 그날 그 결계는 진족에 의해 강화된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도 염준열이 뚫지 못할 수준은 아니야. 홍룡을 불러내면 어떻게든 되겠지. 백호군처럼 가볍게 부수진 못하겠지만…….’
하지만 만약 염준열이 더 일찍 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김신록의 말에 의하면 그 자리에는 웅족의 권속 외에도 긴 꼬리, 12지 진족 수장 중 누군가가 있었다.
염준열은 흑막의 말살 대상 중 하나이니, 방해가 된다면 제거했을 거다.
‘염준열과 김신록을 동시에 처리하면 용족과 호족이 손을 잡을 가능성이 생겨. 흑막 입장에서는 따로 처리하고 싶겠지만…… 그 자리에서 김신록을 놓치는 것보단 낫겠지.’
플마고에서 김신록의 죽음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이 틀어졌던가.
예정보다 일찍 용족을 적으로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흑막 입장에선 김신록을 어떻게든 제거하고 싶었을 거다.
만약 그날 김신록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후예든 인간이든 가리지 않고 죽이거나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을 게 틀림없었다.
‘웅족을 이용해 쉽게 제압할 수 있는 김신록 대신 염준열을 먼저 죽였을 거야.’
염준열이 왔다면 13조가 무사 생환할 가능성은 올라가지만, 그만큼 그는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거다.
생각만으로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세계에 오기 전에 염준열이 사망했을 가능성도 생긴다.
“……제건이 형?”
한편, 염준열의 답변을 들은 용제건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염준열은 혹시 홍의 무녀가 혼나는 건 아닐까, 아니면 용제건의 장난질에 휘말릴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용제건은 속내를 헤아리기 어려운 얼굴로 웃었다.
“사실 나도 홍이한테 비가 온다고 들었거든.”
홍의 무녀가 그날의 날씨를 잘못 알려 준 건 염준열 외에도 더 있었나.
이건 김신록도 모르는 사실이었는지 놀란 기색이었다.
용제건이 무슨 뜻으로 이 화제를 이끌었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염준열은 그저 안심했다.
“아, 제건이 형도 홍이한테 날씨를 들으셨군요.”
“응, 나도 비가 온다고 들었어. 그래서 그날은 붉은 사자 팀 빌딩에 머물렀지. 시험이 끝나면 신록이랑 같이 놀러 가려고 했는데, 비가 오면 걱정하거든.”
“누가 걱정을 해.”
“신록이가.”
심각한 얼굴을 하던 김신록이 인상을 구겼다.
김신록은 용제건이 비 오는 날 외출하는 걸 걱정은 하는데, 티는 안 내고 싶은 모양이다.
용제건의 말에 김신록이 반박하려 했으나 장난기가 다분한 얼굴을 보고 말을 멈췄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입을 다문 듯했다.
과연 김신록은 용제건을 잘 아는 악우답게 눈치와 상황 파악이 남달랐다.
“아쉽네. 여기에서 신록이가 반박했으면 옛날이야기를 몇 개 하려고 했는데.”
“…….”
“옛날이야기요?”
“응, 신록이가 어렸을 때 일이야. 내가 비에 맞으면 힘이 약해진다고 하니까 황호 씨가 보관하고 있던 귀물(貴物)을…….”
“그만해.”
이 자리에 염준열이 없었으면 김신록은 즉각 용제건을 공격했을 거다.
언제 꺼내 든 건지, 김신록의 손가락 사이에 알록달록한 압핀이 보였다.
……그런데 용제건이 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좀 신경 쓰이는데.
어린 김신록이 용제건을 위해서 황지호가 보관하고 있던 귀물을 어쩌려고 했던 걸까?
백호군이 사고뭉치 김신록의 활약상을 간결하게 정리해 말해도 며칠은 걸린다고 했는데, 과장이 아닌 것 같다.
“두 분은 정말 사이가 좋으시네요. 어……?”
웃으면서 둘을 보고 있던 염준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들었던 말 중에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나 보다.
염준열은 잠시 기억을 되짚어 보는 건지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기다 입을 열었다.
“저…… 그날 집에 돌아왔을 때 제건이 형이 안 계셨던 것 같은데요. 학교에서 있던 일이라 상담하려고 했거든요. 청룡 삼촌께서 제건이 형은 외박할 거니까 나중에 이야기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염준열의 말이 나오자 방금까지 화를 내려던 김신록이 눈에 띄게 풀 죽었다.
어딘가 미안해하는 태도였는데, 그걸 보는 용제건은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둘만 봐도 그날 왜 용제건이 외박을 했는지 짐작이 갔다.
그날 염준열이 귀가한 시점에 용제건이 없었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날 신록이가 많이 다쳤잖아. 병문안 갔었지.”
처음 이 세계에서 온 김신록의 모습을 떠올렸다.
김신록은 내가 시체라고 착각할 만큼 이능파도 미미했고, 생체 반응이 거의 없었다.
김신록이 후예가 아닌 인간이었다면, 아마 그날 죽었을 거다.
김신록은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다쳐 재생 시술을 받았다고 들었다.
‘면회나 병문안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을 텐데.’
김신록은 처음에 의식을 잃었을 만큼 중상을 입었고, 걸을 수 없을 만큼 다쳐 재생 시술을 받아야 했다.
아마 완치할 때까지 며칠은 걸렸을 테니 용제건은 계속 김신록을 기다려야 했을 거다.
“사실 신록이가 의식이 없어서 병문안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 면회 허락을 받기 어려웠는데…… 신록이가 황명은광병원에 입원했잖아? 이사장 씨가 허락해 줘서 창 너머로 얼굴만 봤어.”
“그럼 그때 외박한 내내 병원에 계셨나요?”
“응.”
김신록은 용들의 대화를 말없이 들었다.
어느 사이엔가 김신록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던 압핀들이 사라져 있었다.
공격할 의사가 완전히 사라진 듯했다.
김신록은 거의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첫날이랑 퇴원한 날에만 온 줄 알았는데.”
용제건은 김신록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말하지 않은 걸까?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언젠가 이런 식으로 밝혀서 김신록의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입을 다문 것 같기도 하다.
용제건이 김신록을 관찰하며 얄미울 정도로 신이 난 걸 보면 후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울 것 같다.
그 이후로도 용제건이 김신록을 놀려 먹기도 하고, 염준열의 곧은 심성이 느껴지는 유익한 대화를 나누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럼 이만 일어날까. 내일 학생회 애들은 등교하지?”
“네, 일찍 일어나서 학교에 올 생각이에요.”
주말인데도 자치 기구 소속 학생들은 전원 다 등교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부지런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흐뭇해졌다.
레스토랑 앞에는 붉은 사자 엠블럼이 박힌 에어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었다.
에어 리무진에 오르기 전, 염준열이 내게 말을 걸었다.
“의신아, 시간 되면 토요일이나 일요일 저녁에 볼래? 일정대로라면 학생회 업무는 5시 전에 끝날 것 같아.”
모처럼 염준열이 제안해 줬지만, 이에 응할 수 없었다.
주말 동안에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죄송해요, 예정이 있어서요.”
“그래…… 그러면 다음에 보자.”
리무진 문이 닫히기 전, 염준열 뒤에서 웃고 있는 용제건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용제건은 내가 주말에 뭘 할지 알고 있을 거다.
‘용제건과 적호가 리플레이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준비해야 해.’
주말에는 호랑이 저택에서 리플레이와 플마고를 바탕으로 크리스마스 대비를 할 예정이다.
그 자리에는 물론 용제건도 참석할 예정이다.
‘자정이 되기 전에 보고서를 보내 준다고 했으니 읽고 가야지.’
용제건이 하는 모습을 보면 리플레이에서 일어난 다음 날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용제건은 평소대로 학교에서 교사로서 일을 하고, 김신록을 놀려 먹고, 염준열을 챙기고, 외식까지 하지 않았는가.
유희계 용이 얼마나 유능한지 새삼 체감이 되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조의신 군.”
“네,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숙사 앞, 김신록이 짧게 인사를 마치고 등을 돌렸다.
그렇게 혼자가 된 후 돌아온 기숙사 내 방.
또 미리 보일러를 켜는 걸 깜빡하는 바람에 기숙사 복도보다 방 안이 더 쌀쌀하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안 하면 춥게 느껴지니 서둘러 디바이스를 켰다.
저녁 식사 중에 메시지 알람을 꺼 두었는데, 그사이 메시지가 여러 개 도착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호랑이들이 보낸 메시지였다.
[은재호] (사진)
[은서호] 의신이 형, 선물 잘 받았어요. 감사합니다!
은호의 후예들에게 보낸 수험생 응원 선물이 도착한 모양이다.
은호의 후예들이 있는 단체 메시지방에는 막내 은재호가 찍은 사진이 여러 장 올라와 있었다.
은재호의 사진 찍는 기술이 좋아진 건지, 별거 아닌 내 선물이 화려해 보였다.
사진에는 합격 응원 메시지가 적힌 책갈피를 비롯한 학용품 세트, 호랑이가 양각으로 새겨진 은색 포크 세트와 그릇이 찍혀 있었다.
‘옥토연이 찹쌀떡 세트를 보낼 것 같아서 대신 다른 걸 보냈는데, 잘한 것 같네.’
사진 뒤쪽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달토끼떡 선물용 찹쌀떡 세트 박스가 보였다.
옥토연은 달토끼떡에서 파는 모든 종류의 선물 세트를 세 개씩 보낸 듯했다.
그 달토끼는 시험을 보는 은서호와 은이호 몫 외에도 막내 은재호 몫까지 챙긴 듯했다.
나도 그러긴 했지만.
은호의 후예들은 내가 선물한 포크로 달토끼떡을 먹는 사진도 첨부했다.
[은서호] 은광고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할게요. 선물 감사합니다.
[은이호] 저희들이 의신이 오빠의 1등 후배가 될 거예요!
딱히 시험 성적이 좋지 않아도 은호의 후예들은 좋은 후배인데.
그래도 괜한 말로 아이들의 의욕을 꺾을 수 없어서 응원의 인사만 남기기로 했다.
그다음에 확인한 것도 호랑이가 보낸 메시지였다.
[황지호] 조의신, 은호의 후예들에게 보낸 선물 확인했다. 몹시 기뻐하더군.
[황지호] 이미 아이들이 감사 인사를 했겠지만, 나도 인사하마. 고맙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상당히 상식적이었지만, 뒤는 그렇지 않았다.
[황지호] 그런데 어차피 내일 올 거면 와서 자고 가는 게 어떤가.
[황지호] 아침 일찍 움직이는 것보다 미리 와 있는 게 효율적이지 않나?
[황지호] 읽지도 않는군.
[황지호] 지금 김신록과 함께 밖에 있나? 둘이서 같이 저택으로 오면 되겠군.
저녁 식사를 하는 사이에 황지호는 쓸데없이 디바이스 추적이나 하면서 이런 메시지를 보냈나 보다.
그런데 김신록은 호랑이 저택에 못 갈 텐데.
오전에 지익회는 입학시험 대비 마지막 점검을 하니까 고문인 김신록이 빠지기 어려울 거다.
그 사실을 황지호도 뒤늦게 안 듯했다.
[황지호] 김신록은 지익회 업무가 있나…….
[황지호] 조의신, 너는 올 건가?
시간이 늦었으니 갈 생각은 없다.
일찍 확인했어도 안 갔을 것 같지만.
메시지 창을 닫으려 할 때, 알람 소리가 들렸다.
메시지를 보낸 건 용제건이었다.
용제건이 보낸 보고서가 담긴 파일이 도착해 있었다.
[용제건] (첨부 파일)
[용제건] 내일 보자, 의신아.
[용제건] ^^
굳이 ‘^^’를 쓸 필요는 없는데.
첨부된 보고서가 무거운 내용이라서 부담을 덜 주려고 이모티콘을 쓴 걸까?
……용제건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그건 아니다.
그저 보고서를 읽은 내 반응이 기대돼서 웃었을 가능성이 컸다.
용제건이 무슨 생각을 했든, 보고서를 받은 이상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용제건이 악몽 속을 헤매고 잡은 단서야. 철저하게 분석하자.’
용제건의 보고서를 몇 번씩이나 읽고 사고를 거듭하는 사이, 아침이 되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