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42화 (540/925)

76. 은광고 입학 시험 (4)

아직 해도 다 뜨지 않은 이른 아침, 지익회관.

계이담이 아무도 없는 지익회관 복도를 걷자 생체 반응을 인식한 조명이 차례로 켜졌다.

이 세계로 오기 전의 계이담은 이런 시간에 일하러 올 정도로 성실한 인간이 아니었지만, 은광고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계이담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것뿐인데 진중한 성격으로 오해받아 묘한 기대를 사게 되었다.

이제 와서 게으르게 굴면 오히려 눈에 띄었다.

거기에 기숙사생들의 지지를 받아 지익회장 자리에 올랐는데, 지익회를 말아 먹을 순 없었다.

그렇다 보니 지익회장이 된 이후부터는 이르게 등교해 먼저 업무를 처리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

지익회실 앞에 도착해 문을 열던 계이담이 멈칫했다.

‘내가 처음 온 게 아닌가?’

지익회실의 문은 잠그지 않는 게 원칙이다.

그러니 아무런 조작 없이 열리는 건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안에는 조명이 켜져 있었고 난방도 되어 있었다.

‘설마…….’

계이담은 사전에 고지한 집합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도착했다.

이런 시각에 올 만한 사람은 몇 없었다.

계이담은 한숨부터 쉬었다.

누가 여기에 와 있을지 알 것 같았으니까.

계이담의 예상대로 지익회실 안에 들어가자 성시완이 있었다.

성시완은 계이담이 올 줄 알았는지 바로 커피잔을 내밀었다.

“안녕, 이담이가 일찍 다닌다고 들어서 커피 두 잔 뽑아 놨어. 안 오면 내가 다 마셔야 됐는데 잘됐다.”

계이담이 큐브 타입의 캡슐 디스펜서들이 있는 쪽을 흘끗 봤다.

사용한 캡슐을 모아 두는 큐브 안에 각각 다른 색의 캡슐 두 개가 들어 있었다.

하나는 진한 우디 향의 디카페인 커피, 하나는 코코아 향이 첨가된 약한 산미의 커피였다.

척 봐도 전자는 계이담, 후자는 성시완 취향의 커피였다.

‘디카페인 커피는 안 마시면서 뭘 마신다고…….’

기다린 듯이 커피를 내준 건 참 감사한 일이지만 선뜻 고맙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젯밤 늦게까지 성시완은 옛 한국 지부장에게 도전했고 그 결과 처참하게 졌다.

계이담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친 성시완이 제대로 웃지도 못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한 번 더 도전하겠다는 걸 억지로 끌고 가 쉬게 했는데, 아침에 계이담보다 먼저 지익회실에 와 있는 걸 보니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플마고에서도 그렇게 이름도 못 남기고 허무하게…….’

신랄한 막말이 목 끝까지 나왔다.

하지만 쓴소리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계이담은 커피잔을 받아 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커피 드시고 쉬고 오셔도 됩니다.”

“아냐, 괜찮아. 수능 최저 등급 맞춰서 대학 합격도 결정됐고, 할 일이 없어.”

할 일이 없는 것과 성시완이 제대로 쉬지 않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그딴 식으로 몸을 혹사하니까 그 매정한 할배한테 이기질 못하는 거다.

계이담은 옛 한국 지부장을 속으로 욕했고, 성시완에게도 이것저것 마구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 험한 생각들을 성시완이 들어도 좋을 만큼 바르고 고운 말로 정제할 수가 없어서 평소처럼 입을 다물었다.

성시완은 계이담의 속도 모르고 입을 열었다.

“기환이가 한 이의 신청 결과 말인데,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아. 그 문제를 두고 자문을 했다는 대학교수들이 다 같은 의견이래. 내일쯤 평가원에서 정식으로 발표할걸.”

은광고 3학년 중 성적으로 가장 우수한 학생 둘을 꼽으면 도원우와 우기환이다.

이 둘은 역대급 불수능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도원우는 만점을 받고 우기환은 하나를 틀려 각각 수석과 차석을 차지했다.

또 2등을 하게 생긴 우기환은 그 틀린 문제를 두고 이의 제기를 했는데, 실패한 모양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기환은 은광고 마지막 정기 고사, 3학년 2학기 기말고사에서도 도원우에게 졌다.

마지막까지 우기환은 ‘어차피 수석과 차석은 도원우기환’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계이담은 2등을 할 때마다 우기환이 저지른 기행을 떠올리니 어질어질했다.

“임연화 선생님께 상담드리겠습니다.”

“응, 그러는 게 좋을 거야. 기환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1학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은광고 입학시험 중 면접을 치를 때, 우기환은 도원우를 이기고 1등을 차지하는 게 목표라고 포부를 밝혔다.

겉보기에 우기환은 멀쩡해 보였고 1등을 목표로 하는 학생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그의 답변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0반 학생을 감별해 온 베테랑 면접관은 우기환의 눈에 어린 광기를 읽어 내고 0반행을 제안했다.

우수한 성적과 이능을 보유하고 지극히 정상으로 보이는 우기환을 0반에 넣느냐 마느냐를 두고 교사진 사이에서 의견이 많이 갈렸다.

결국 우기환의 의사에 맡기기로 했는데, 우기환은 자신이 어느 반에 배정되어도 상관없다고 답해 0반에 넣었다.

그리고 2등을 거듭할수록 점차 맛이 가는 우기환을 보며 모두가 면접관 교사의 선구안에 감탄했다.

우기환은 참으로 0반다운 인재였다.

“어, 두 분 일찍 오셨네요.”

“나도 커피 마셔야지, 너희도 더 마실래?”

계이담과 성시완이 우기환 대책을 논의하는 사이에 지익회 학생들이 하나둘 출석하기 시작했다.

지익회 소속 학생이 그리 많지 않은 탓에 지익회실 공간이 넉넉해 의자를 두 개 붙여서 앉거나 구석 책상에 드러눕는 아이도 있었다.

계이담이 체육복 차림으로 책상 위에 누워 있는 김현구에게 한 소리 하려 했을 때였다.

계이담은 갑자기 섬뜩한 감각에 등을 휙 돌렸다.

‘저건……!’

창밖에 용제건이 있었다.

꽤 멀리 있는 데다가 기척을 감추고 있는 탓인지 눈치챈 건 계이담밖에 없는 것 같았다.

용제건은 계이담을 관찰하고 있었다.

용제건의 가늘게 뜬 시안색 눈에는 호기심과 동시에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는 무언가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대체 왜?’

계이담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용제건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용제건이 순식간에 이동했거나, 계이담이 헛것을 본 게 분명했다.

귀신에 씌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용제건 선생님이 왜?”

김현구의 목소리에 계이담이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긴장한 계이담을 두고 박승현이 계속 말을 이었다.

“어제 용쌤이랑 김신록 선생님이 식사하러 갔는데, 1반 아이들이 그거 두고 엄청 열받아 했어. 자기네들도 신록 쌤하고 저녁 먹고 싶다고.”

“걔들은 뭐 그런 걸 갖고 열을 받아.”

둘이 식사한 걸 뭐 어쩌라는 거지?

계이담은 김현구와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은 그런 거보다 왜 용제건이 지익회실 창문에서 자신을 노려봤는지가 신경 쓰였다.

그때, 김신록이 지익회실로 들어왔다.

“얘들아, 안녕.”

김신록이 서글서글한 얼굴로 웃으며 아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평범한 교사와 학생이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는데, 방금 김신록과 친분이 있는 용제건과 마주친 탓일까.

계이담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    *    *

황명호 대저택, 은호가 머무는 현대식 별채.

기숙사에서 조식을 먹고 왔다고 하자 황지호가 아침상 대신 차와 다과를 내줬다.

오늘의 다과는 달토끼떡 찹쌀떡이었다.

옥토연이 떡을 너무 많이 보낸 탓에 후예들 말고 다른 호랑이들도 떡 처리를 돕는 모양이었다.

오색 찹쌀떡 중 수리취가 들어간 걸 먼저 집어 먹고 있을 때, 황지호가 혀를 찼다.

“꼴을 보니 또 안 잔 것 같군. 밤을 지새우는 사이에 메시지 답장을 한 번이라도 해 줬으면 좋았을 것을.”

“바빴어.”

바쁘니까 밤을 지새운 건데, 왜 사람이 논 것처럼 말을 하는 걸까.

구시렁거리는 황지호를 무시하고 디바이스를 켰다.

용제건의 보고서와 플마고 설정집을 두고 분석한 자료를 홀로그램에 전개해 띄우고 있을 때였다.

“의신이 형, 어서 오세요. 현관까지 마중 가지 못해서 죄송해요.”

은호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든 순간.

천성헌의 모습을 한…… 아니, 천은하의 모습을 한 은호가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어린 모습이었지만.

‘……그래, 이제 저 모습으로 학교에 가겠구나.’

플마고 플레이를 통해 이전 세계에서 여기로 온 것으로 확인된 건 현재 총 셋.

나, ‘계’새끼, 은호.

나는 ‘조의신’ 이름 그대로 왔지만, 둘은 달랐다.

적합체와 후보의 차이인 걸까, 둘은 가족 관계 등의 영향을 받아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셋 다 외모는 그대로였다.

‘계’새끼의 경우 사고로 얼굴이 바뀌기 전의 외모인 듯했지만, 어쨌든 이전 세계 본래의 외모임에는 틀림없다.

“곧 은광고 입학시험을 치러야 하니 이 모습을 하고 있어요. 어때요?”

어떻긴, 천성헌의 미성년자 시절 모습은 본 적이 없지만 아마 저대로일 거다.

겉모습만 보면 누구도 저 아이가 신화 시절을 지낸 은호라고 생각하지 못할 게 틀림없다.

나는 고심 끝에 소감을 입에 담았다.

“중학생 같아.”

“그래요? 이제 곧 고등학생이 돼서 의신이 형 후배가 될 건데, 너무 어려 보이나…….”

좀 더 조정을 하겠다는 은호의 말을 듣자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말이 중학생이지 벌써 키가 나와 비슷한데.

천성헌 모습일 때에도 나보다 키가 컸고, 천은하와 나는 한 살 차이라는 설정이니 당연하겠지만.

“흠…… 굉장하군.”

한편, 나보다 떡을 다섯 개나 더 먹은 떡보 황지호가 은호를 관찰하다가 감탄했다.

은호가 외모를 바꾼 걸 보고 놀란 걸까?

하지만 은호가 역용술로 천은하의 모습을 한 건 하루 이틀이 아닌데.

“뭐가 굉장한 건지 궁금한가? 미리 알려 줄 수도 있다.”

“됐어.”

내가 의문을 품은 걸 금방 눈치챈 노친네가 금방 헛소리를 했다.

황지호가 알려 주지 않아도 은호가 굉장하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괜찮았다.

천성헌 시절 때부터 은호는 과분한 후배였으니까.

노친네를 무시하고 차를 마실 때였다.

“안녕, 나 왔어.”

“…….”

왕왕!

현관을 보자 시야가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딱히 역광이 비춘 것도 아닌데, 나의 천사 올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인 백호군과 용제건이 함께 있어서 그런 걸까, 하여튼 눈이 부셨다.

“백호는 학교 주변을 산책하고 온다고 했거늘, 어디에서 마주친 거지?”

“잠깐 나도 아침 산책을 다녀왔거든.”

내 품으로 달려든 천사를 안아 들고 멍하니 있는 사이,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 갔다.

백호군이 자리를 비워 어디에 갔나 했는데, 올무와 함께 산책할 때 마주친 용제건을 데려왔나 보다.

산책할 때 아침 바람을 맞은 탓일까 올무의 털이 좀 차가웠다.

물론, 산책하느라 수고한 천사를 위해서 온기를 나눠 주는 것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교원 계약이 걸려 있는데, 은광고에 아침 산책이라니. 또 장난질을 하러 간 거겠지.”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보고 온 것뿐이야. 아침에 신록이를 귀찮게도 좀 하고, 산책도 할 겸.”

대놓고 김신록을 귀찮게 하고 왔다고 선언했는데도 적호는 가만히 있었다.

아들 바보 적호라면 ‘당신이 뭔데 제 아들을 귀찮게 합니까? 작작 좀 하십시오.’라고 한마디 했을 텐데.

적호가 리플레이의 영향을 많이 받은 모양이다.

‘그런데 용제건이 대체 뭘 보고 온 거지?’

나중에 물어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용제건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 뭘 보고 왔는지는 알려 줄게. 의신이가 더 나한테 알려 줘야 할 것 같긴 하지만.”

……대체 용제건은 뭘 보고 온 거지?

뭔지 모르겠지만, 용제건보다 내 쪽이 더 정보를 제공하게 될 것 같다.

미묘한 기분이 들어 올무를 끌어안으며 안정을 찾기로 했다.

“먼저 질문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때, 용제건의 시선이 은호 쪽으로 향했다.

은호가 깨어난 걸 아는 건 백호군, 황지호, 적호, 김신록, 천동하, 올무, 산령 그리고 나.

용제건은 은호의 후예가 이 저택에 머무는 건 알고 있어도 은호가 깨어난 건 모르고 있을 거다.

그러니 은호를 보고 질문을 하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용제건은 뜻밖의 말을 입에 담았다.

“이 저택에 출입하는 인간이 더 있을 줄은 몰랐어. 호족의 관계자야? 이름을 물어도 될까?”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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