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은광고 입학 시험 (5)
이 저택에 출입하는 인간이라니.
방금 용제건이 은호에게 한 소리를 듣고 귀를 의심했다.
외모야 신화 시절과 달라졌다고 하지만, 진족과 후예가 서로를 알아보는 건 이 세계의 법칙 중 하나 아닌가.
적호가 사용하는 적연 같은 스킬로 몸을 완전히 감추지 않는 한, 아무리 모습을 바꿔 봤자 그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염준열의 집중력이 떨어졌을 때 황지호를 인식하지 못한 경우가 있는 걸 보면, 어느 정도 대상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금 용제건은 은호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데, 어째서?’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예전에 교장실에서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황보윤 교장은 진족과 후예가 서로를 알아보는 매커니즘을 두고 이렇게 설명했다.
―진족과 후예는 무의식 깊은 곳, 심중(心中)에 진명을 봉인해 둬.
―진명이 있는 존재는 본능적으로 서로를 알아보는 모양이야.
그렇다면 지금 용제건은 은호에게 진명이 없다고 느낀 듯하다.
그러니 인간이라고 판단해 저렇게 말한 걸 거다.
‘그러면 진명을 분실한 백호군은 어떻게 보이는 걸까.’
백호군은 역사와 신화에 남은 존재다 보니 얼굴만 마주쳐도 만나는 진족들이 곧장 그의 정체를 알아봤다.
백호군이 진명을 잃어버렸다는 것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것 같으니 백호군을 보고 진명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아도 납득했을 거다.
‘플마고에서 염준열이 백호군과 마주치고 놀라는 장면이 있었지.’
주수혁이 백호군을 소개하자 염준열이 잠시 놀랐다가 못 알아봐서 죄송하다고 인사하는 장면이 있었다.
백호군이 신화계 호족이라고 하나 초면이니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데, 저걸 저리 정중하게 사과하다니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답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때 염준열은 백호군이 신화 속의 백호라는 걸 못 알아본 게 아니라 아예 진족임을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은호가 진명을 분실한 것 같지는 않은데…….’
용제건의 말을 들은 호랑이들은 약속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황지호는 처웃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으나 참고 있는 듯했다.
“의신이 정도 되는 나이에 은광고 입학시험 기출 문제를 보고 있는 걸 보니 수험생인가 보네. 호족과 연이 있는 은광고 입시 수험생이라…….”
용제건은 은호 앞에 놓인 인쇄물을 훑어보며 말했다.
은광고 홈페이지에는 교사진이 직접 출제한 입학시험 기출 문제와 답안 해설이 매년 공개된다.
제일 위에 놓인 한 페이지만 보고 은광고 기출 문제인 걸 알아보다니, 과연 용제건의 눈썰미는 남달랐다.
‘그래서 용제건을 시험해 볼 대상으로 삼은 건가.’
속을 읽기 어려운 모호한 표정으로 용제건을 응시하던 은호가 엷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오랜만이라는 말에 용제건이 기억을 더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용제건의 기억 속에 천은하의 얼굴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용제건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은호가 몹시 만족해했다.
“당신은 깊은 통찰력을 지녀 ‘보는 것’에 남다른 재주가 있죠. 한눈에 영리하고 재주 많은 호족의 후예를 알아보고 위기에서 구한 후 냉큼 이름을 받아 갈 정도로요.”
그냥 듣기에는 용제건을 칭찬하는 듯했지만, 어째 뒷말을 들으니 말에 뼈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은호는 김신록이 용제건에게 이름을 준 게 별로 탐탁지 않았던 걸까?
용제건은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흥미진진해했다.
“여의보주의 눈을 속일 수 있다면 문제없겠군요. 이제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하하하하!”
은호가 허락을 내리자 황지호가 처웃기 시작했다.
말을 해도 좋다고 했지 처웃어도 좋다고 하진 않았는데.
침착하게 황지호의 꼴을 단서로 삼아 추리를 이어 가는 용제건과 대비되었다.
“부드러운 말투를 사용하고, 황호 씨가 마음껏 웃지 못하게 제지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는데. 그리고 내 눈을 속였다는 건…….”
용제건은 정답에 거의 다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호랑이들을 가만히 보는 걸 보니 말을 삼가는 것 같았다.
용제건은 은호가 호족의 역린이라는 걸 의식해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신역 곳곳에 은호의 이름을 사용해 은광구, 은광고라는 이름을 붙을 정도다.
은호를 두고 말실수를 하면 교사직이 위험해질 거다.
용제건이 제멋대로 사는 유희계 용이긴 하지만, 최저한의 선은 지킨다.
‘용제건은 역린을 건드린다기보다는 관찰하고 고찰하고 꿰뚫어 보고 지켜보는 타입이니까.’
말꼬리를 흐린 용제건을 대신해 은호가 정답을 입에 담았다.
“은호예요. 곧 ‘천은하’라는 이름으로 은광고에 입학할 예정이에요.”
“유희계 용이 알아보지 못하다니. 놀랍군! 하하하하!”
용제건은 속아서 분하다기보다는 은호가 중학생의 모습을 하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신기하고 흥미로운 듯했다.
황지호가 속 긁는 말을 했으나 용제건은 관심을 주지 않고 말했다.
“은호 씨가 깨어났구나. 시기는 아마 10월 말쯤?”
은호가 깨어난 건 플레이리스트 최종회가 방영되기 전, 즉 10월 말이다.
방금까지 은호를 알아보지도 못한 용제건이 어떻게 그 시기를 알아낸 거지?
황지호의 처웃는 소리가 조금 작아지자 용제건이 확신을 갖고 말했다.
“적호 씨와 화해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신록이가 굉장히 들떠 보였을 때가 있었어. 뭔가 있겠다 싶었지. 방송국 사건이 터져서 캐 볼 타이밍을 놓쳤지만.”
용제건은 금방 평소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가늘게 뜬 실눈 사이로 시안색의 눈동자가 움직여 시선이 내 쪽으로 왔다.
내가 연관된 것도 눈치챈 것 같다.
“마침 그때 의신이가 며칠 등교를 안 했었지. 의신이와도 관련이 있겠구나.”
“네, 의신이 형은 호족의 은인이에요. 방송국 사건으로 크게 다치고 용족의 은인이 되기 전부터요.”
은호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크게 다치고’라는 말은 다소 딱딱하게 들렸다.
내가 크게 다친다는 뒤숭숭한 말을 입에 담기 어려워서 그런 걸까.
은호가 아직도 저번 일로 은혜를 느끼나 보다.
용제건은 웃으면서 은호의 말을 받아쳤다.
“그래, 그 사건으로 의신이는 용족의 은인이 됐어. 물론, 의신이가 신록이를 구했을 때부터 내 개인적인 은인이었지만.”
“조의신이 남의 후예를 구한 걸로 왜 용제건이 은인 운운하는 거지?”
그러게 말이다.
황지호가 시큰둥한 목소리를 냈는데, 별거 아닌 걸로 계속 은인 어쩌고 하는 황지호도 용제건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사태를 수습한 건 적호였다.
“오늘은 용제건과 정보 공유를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조의신이 사용한 ‘리플레이’에 관한 설명과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이건 참고로 읽어 주십시오.”
“적호 씨, 잘 읽을게.”
적호는 그렇게 말하며 용제건에게 데이터칩을 건넸다.
데이터칩 안에는 적호가 리플레이를 바탕으로 작성한 보고서가 있었다.
용제건은 데이터칩 안의 내용물을 바로 확인하고 반쯤 황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황지호는 그 모습을 보며 한마디 툭 던졌다.
“……적호, 많이 변했군.”
“어디가 변했다는 겁니까? 황호는 5천 년 동안 성장하지 않았으니, 상대적으로 제가 변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군요. 그럼 설명 부탁합니다, 조의신.”
적호의 말을 들으니 속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용제건과도 필히 정보 공유를 하고 싶었기에 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설명을 시작했다.
호족과 공유한 대부분의 정보를 요약하여 전달했는데, 용제건은 곧바로 모든 걸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용제건의 표정이 점점 황홀하게 일그러지는 걸 보니 어쩌면 내가 생각지 못한 부분까지 추리해 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세계에서 게임의 형태로 구현된 이 세계라…… 흥미롭네.”
다소 긴 이야기였는데, 용제건은 한순간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경청하다 처음 입을 열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집중력과 이해력에 감탄하고 있는데, 그 뒤에 이어진 말은 다소 불쾌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용제건이 불쾌한 게 아니라 그 말에 포함된 이름이 그랬다.
“지익회장 계이담, 이담이도 그 게임과 관련이 있어?”
어떻게 그 이름이 바로 나왔지?
용제건의 우수한 사고 능력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지만.
“내가 겪은 리플레이 속에서 이담이가 없었어. 우리 학교에, 지익회에 그 정도 자질이 있는 아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었을 텐데.”
계이담 그 허접한 쓰레기한테 용제건이 기억해 둘 수준의 자질은 없는데.
플마고가 그냥 망겜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아직 리플레이 속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혼란스러워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용제건의 말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의신이 설명을 들으면서 가능성을 두 가지 생각했어. 첫째, 이담이는 의신이가 뒤에서 움직여 구한 인물이다. 의신이가 환몽 경매를 무너뜨리면서 구한 아이들이 등교한 것처럼 말이지.”
환몽 경매의 피해자인 사월세음을 비롯한 선량한 플레이어와 악플러 ‘계’새끼를 동일 선상에 둘 수 없는데.
용제건은 잠시 나를 관찰하다가 말했다.
“하지만 저번에 이담이와 한 대련도 그렇고, 지금 의신이 얼굴을 보니 그건 아닌가 보네.”
“…….”
“그렇다면 이담이도 의신이와 비슷한 존재인 거구나. 의신이 쪽이 더 우수한 것 같지만…… 하하, 비교하는 것도 불쾌한가 봐. 미안해, 의신아.”
“아니에요.”
용제건이 내 마음을 알아주고 사과했다!
병 주고 약 준 꼴이었으나 잘 생각해 보면 모든 건 용제건 탓이 아니라 계이담 탓이므로 사과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용제건이 하는 말을 들으며 차를 다리던 은호가 알 듯 모를 듯한 이야기를 했다.
“그자도 플마고를 플레이했나 보군요. 계씨 성을 가진 인간은 많지 않죠.”
한편, 실컷 이야기한 용제건은 아직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게임의 형태로 구현된 시뮬레이션이라면, 마지막 날 나를 플레이한 건 의신이겠구나. 당연한 말이지만.”
“……네?”
“눈이 오던 날, 나는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았어. 정신력도, 신체도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 하지만 전투는 아주 효율적으로 치르고, 전략적으로 갈 곳을 결정했어. 마치 뛰어난 플레이어의 정신을 빌린 것처럼.”
용제건은 내가 그를 조작한 걸 인식한 걸까.
용제건의 말을 들어 보니 리플레이 속에서 명확하게 인식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내가 개입한 걸 감지한 것 같다.
그야 내가 플레이한 기록을 용제건 입장해서 재생한 셈이니 당연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누가 자신을 조작했다는 게 그리 좋은 기분일 리는 없었다.
“혹시 백호 씨가 있는 곳까지 유도한 게 의신이야?”
용제건은 나가고 싶지 않아 했는데, 나는 억지로 그를 끌고 갔다.
게임이 정한 룰과 한계가 허용하는 선에서밖에 움직일 수 없었지만, 결국 용제건은 나가는 걸 거부했다.
그렇게 멋대로 조작해 댄 걸 사과하는 게 좋을까?
나는 일단 용제건의 말에 긍정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용제건은 의외의 말을 입에 담았다.
“날 살리려고 했구나.”
살리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결국 리플레이 속 여의보주는 산산이 조각났으니까.
“엉망인 나를 거기까지 끌고 가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고마워, 의신아.”
수백 번의 리플레이.
리플레이 수만큼의 용제건의 최후.
그 무력했던 겨울이 생각나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