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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44화 (542/925)

76. 은광고 입학 시험 (6)

“…….”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보고 용제건과 호랑이들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차라리 황지호가 처웃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노친네다운 연륜이 묻어나는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적호가 황지호에게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를 간접적으로 해서 그런 걸까?

그래도 이런 때에 노친네 흉내는 안 냈으면 좋겠다.

왕!

나를 민망한 상황에서 구해 준 건 내 품에 안겨 있던 천사였다.

올무는 꼬리를 파닥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어쩐지 올무가 나를 격려해 주는 기분이 들어서 지금 상황은 아무래도 좋아졌다.

‘용제건이 고맙다고 말은 하지만, 내가 수백 번 용제건을 조작해 리플레이했다는 걸 알면 좀 그렇지 않을까?’

용제건이 그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할 거다.

정확한 루트를 계산해 움직인 걸 보고 의심할지도 모르겠지만.

혹시 용제건이 그 사실을 추측해 내기 위해 날 떠볼 가능성이 있으니 경계해야겠다.

그러나 내 마음가짐은 몇 초 만에 헛된 짓이 되었다.

“의신이 형은 당신을 살리기 위해 리플레이를 수백 번 하셨죠. 꽤 고생하신 것 같더라고요.”

은호의 증언으로 바로 들키고 말았다.

나는 리플레이를 할 때마다 누구나 열람 가능한 블로그에 공략 기록을 남겼다.

딱히 내가 고이고 썩은 걸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내 기록을 참고해 더 좋은 공략을 찾아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은호는 예전 세계에서 내가 남긴 공략 기록을 봤으니 그 고여 버린 리플레이 횟수에 관해 알 수밖에 없을 거다.

용제건은 그 말을 듣고 꺼림칙해하기는커녕 아주 신나 했다.

“와, 그래? 내가 경험한 건 몇 번째야?”

“당신이 제출한 보고서를 기준으로 추측했을 때, 306번째 이후로 추정되네요.”

“거기까지 가는 데 그 정도 걸린 모양이네. 백호 씨의 위치를 파악하고, 눈 속에서 에너미를 상대하고 아이들을 구하려면 그 정도 노력은 필요하겠지.”

……어떻게 그 회차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거지?

은호의 기억력에 감탄하면서도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굉장하군요. 조의신은 호족의 은인다운 노력가였군요.”

“조의신…….”

“…….”

은호와 용제건의 대화를 듣던 호랑이들이 내 고인 게임 이력에 감탄한 건지, 질린 건지 모를 소리를 했다.

딱히 내가 게임 폐인이란 걸 숨기려던 건 아니었고 그걸 부끄럽게 여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게임 속 존재라고 생각했던 이들 앞에서 그 이력이 밝혀지는 건 낯뜨거운 일이었다.

오늘도 묵묵히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백호군과 꼬리를 살랑이는 올무 덕에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내 속도 모르고 용제건과 은호는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도 의신이를 용족의 은인이라고 자주 불러 줘야겠다. 감사 인사도 잊지 말고 해야지.”

“의신이 형은 이미 호족의 은인으로서 잘 대우받고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용족은 의신이 형에게 큰 빚을 졌으니 은혜를 갚아야겠지만요.”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게 있었는데, 의신이 ‘형’이라고……? 은호 씨는 일어나자마자 황호 씨 영향을 많이 받았나 봐.”

“당신도 황호 님의 영향을 받아서 호족의 어린 후예와 친우 관계를 맺으신 건가요?”

“하하하하! 왜 내가 둘 사이에 낀 건지 모르겠지만, 구경하는 건 유쾌하군.”

용제건에게 설명할 때, 은호가 나와 같은 세계에 있다가 넘어왔다는 건 생략했다.

그저 내가 은호를 깨웠다는 것만 간략히 전했다.

그렇다 보니 은호가 예전 세계에서 나와 선후배 관계라는 걸 몰라 오해한 듯하다.

현명한 은호가 노친네의 영향을 받아서 어린 척할 리가 없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용제건도 마찬가지다.

수천 년을 산 진족들에게 형과 동생, 친우 사이에 나이는 별로 상관없지 않을까?

나는 둘의 신경전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그때, 지익회의 오전 업무를 마친 김신록이 등장했다.

위잉.

“다녀…… 안녕하십니까.”

나름 요약해서 말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져 어느새 점심시간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저번에도 김신록은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하려다가 말을 바꾸지 않았나?

그냥 포기하고 다녀왔다고 인사하는 게 좋을 텐데.

호랑이들과 용제건은 김신록이 말을 급히 바꾸는 걸 보고 흐뭇해했다.

“어서 와라, 아들아.”

“하하하하! 조금 더 일찍 왔으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아쉽군.”

“식전에 마실 만한 차를 내어 드릴게요. 앉으세요.”

김신록이 등장하자 용제건이 바로 환하게 웃으며 속을 긁었다.

김신록을 아끼는 호랑이들 앞인데도 참 용감한 태도였다.

“잘 왔어, 신록아. 지익회 애들이랑 점심 먹고 올 줄 알았는데 일찍 왔네. 애들이 서운해하겠다.”

“뭐라는 거야.”

“이담이는 별말 없었어? 살기를 날려 봤는데 반응 속도가 빠르더라.”

“아침부터 뭐 하러 학교에 일찍 왔나 했더니…….”

용제건은 그놈한테 살기를 날렸나 보다.

기왕이면 살기를 날리는 선에서 그치지 말고 직접 행동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아니,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그런 쓰레기 처리를 맡길 수는 없어.’

점심을 먹는 중에는 오전에 한 대화 내용을 김신록에게 전했다.

오전에는 용제건과의 정보 공유를 위주로 했으니 김신록이 새로 알아야 할 사항은 많이 없었다.

용제건은 오랜만에 보는 은호에게서 진명이 느껴지지 않은 게 아직도 신기한 듯했다.

“은호 씨 정말 감쪽같아. 백호 씨처럼 진명을 분실한 건 아니지?”

“깊은 잠으로부터 눈을 뜨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했어요. 저는 그걸 이용하기로 했어요. 나름의 리스크는 있지만, 이편이 더 안전할 거라고 생각해요.”

은호에게 리스크가 있다고?

하긴, 용제건도 눈치채지 못할 힘이니 그걸 사용하려면 대가가 존재할 거다.

은호는 진명을 숨기는 게 안전할 거라고 했지만, 그 리스크가 신경 쓰였다.

“백호와 은호, 둘 다 자칫하다간 인간으로 보일 지경이지. 힘을 쓰는 걸 보면 누구나 우리 호족의 정예라는 걸 알아채겠지만.”

“황호 님이 높게 평가해 주셔서 영광이지만, 저는 백호 형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의 무예를 지니고 있지 않아요. 그 리스크 탓에 더 약해지기도 했고요.”

“하하하! 무예에 능한 자만이 호족의 정예는 아니지 않나.”

황지호는 내내 기분이 좋아 보였다.

황지호는 점심을 직접 준비하느라 수고를 들였는데도 생색 한 번 내지 않았다.

오늘도 식탁을 채운 이들이 많아서 그런 걸까?

노친네는 북적이는 걸 좋아하나 보다.

“의신이 형, 선물 잘 받았어요. 형이 응원해 주셨으니 좋은 결과로 보답드릴게요.”

그때, 은호가 내게 말을 걸었다.

은호는 수험생 응원 선물 세트를 받자마자 바로 감사 인사를 했으니 또 할 필요는 없는데.

은호의 인사에 아주 평범한 입시 응원의 말을 담았는데, 몹시 기뻐했다.

은호도 은광고 입시를 앞두고 긴장한 걸지도 모르겠다.

“은호, 저번에 한 약속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무슨 약속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은광고 입학시험이 끝나면 후예들을 보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입학시험이 끝나고 그 건에 관해 여러분과 상의하겠다고 동의했지만, 그 아이들을 보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어요.”

“은호……!”

적호가 울컥한 목소리를 냈다.

여차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기세였는데, 이러다가는 저번처럼 번개를 날리고 결계를 치며 싸우는 것 아닌가.

둘을 말린 건 상석에 앉아 있던 황지호였다.

“은호의 말이 옳다, 적호. 시험은 아직이고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니다.”

황지호가 식탁에 앉아 있는 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밥상머리에서 싸울 생각이었나? 네 아들과 네 형이 보고 있다.”

“제가 아들 앞에서 싸우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적호 님과 싸울 생각이 없어요.”

저번에 적호가 별채에 적뢰를 날리는 장면을 김신록이 목격했는데…….

어쨌든 상황이 수습되었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김신록은 어리둥절해했고, 용제건은 재미있는 장면을 놓쳐 아쉬워했다.

오전과 식사 중에는 어수선했으나, 오후에 한 회의는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별채 응접실에는 은광고의 지도가 크게 전개되어 있었고, 지도 여기저기에 마커와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회의 중에는 용제건과 적호의 보고서, 학생 자치 기구 내부에서 논의된 크리스마스 이벤트 기획서, 내가 알고 있는 것 등을 바탕으로 다양한 플랜들이 제시되었다.

마커를 옮기고 마커를 잇는 선을 새로 그어 가며 몇 차례나 작전을 새로 입안하고, 취소하고, 개선하기를 반복하던 중.

“용제건 마음에 걸리는 게 있나 보군. 말해 보도록.”

“딱히. 그런데 이대로 하려면 선도부의 협력이 필요할 텐데, 얘기가 된 거야?”

“동하 형은 호족과 협력 관계를 맺었어요. 저에 관해서도 알고 있어요.”

“은호 씨가 형이라고 부르는 학생이 또 있었구나.”

“네, 동하 형은 제 호적상의 형이니까요. 앞으로 저는 ‘천은하’라는 신분을 사용할 예정이에요.”

용제건의 실눈이 잠깐 크게 뜨였다.

어쩌다가 은호가 천은하가 된 건지 자세하게 캐묻지는 않았지만, 저 모습을 보니 언젠가 알아낼 예정인 것 같았다.

조만간 용제건이 천동하를 긁으러 갈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하지. 크리스마스 전에 또 다른 변수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 계획을 구체화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황지호의 말에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이야기하는 사이에 어느덧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회의가 끝났다는 말에 갑자기 긴장이 풀리고 졸음이 쏟아졌다.

‘……요새 잠을 별로 안 잤지.’

용제건에게 리플레이를 사용하기 전부터 계속 못 잔 것 같은데.

내가 중간에 잤던가?

이렇게 졸린 걸 보면 안 잔 것 같기도 하다.

호랑이들 앞에서 잠들면 잔소리가 쏟아질 테니 억지로 참고 몸을 일으켰다.

저녁 식사 제안을 거절하고 빨리 기숙사로 가기로 했을 때였다.

“조의신.”

백호군이 내 품 안을 가리켰다.

품 안을 보니 올무가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다.

회의가 길어진 사이 잠들었나 보다.

지루했을 텐데 놀아 주지도 못하는 내 품 안에서 꾹 참고 있었을 천사를 생각하니 죄책감이 몰아쳤다.

“따라와라.”

백호군이 그렇게 말하며 앞장섰다.

올무를 재울 곳으로 안내해 줄 모양이었다.

잠든 천사를 두고 갈 수도 없어서 일단 그 뒤를 따르기로 했다.

잠들지 않으려고 집중하며 사고를 이어 갔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데…….’

졸음 탓에 안개가 낀 것 같은 사고 속.

여태까지 이 세계에서 경험했던 것과 오늘 나눈 대화 속에서 뭔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 않고, 의문을 해결하지 않는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사항도 아니었다.

하지만 모순이 존재하는 건 분명했다.

그 모순을 확인할 방법도 떠올랐다.

딱히 초상우주와 교신하지 않아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잘 자라.”

생각을 거듭하던 중,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번에 묵었던 방의 침대 위였다.

나는 올무를 품에 안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휙.

잠들 듯 말 듯 몽롱한 정신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어느 사이엔가 이불이 몸 위에 덮여져 있었다.

“넌 잘하고 있다.”

문을 나서는 백호군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한데, 내 눈은 어느덧 감기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 걱정할 필요 없다.”

그 말에 안심이 되어 순식간에 잠들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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