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은광고 입학 시험 (7)
현대식 별채, 응접실.
백호와 신수를 안은 조의신이 사라진 후에야 황호가 말했다.
“피곤해 보였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군. 얼른 재웠을 것을.”
“의신이 형이 회의하는 동안 체스를 할 때처럼 집중하셨나 봐요. 저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황호가 혀를 찼다.
조의신이 잠을 못 잔 건 눈치챘으나 회의가 끝나자마자 저렇게 무너질 정도일 줄은 몰랐다.
조의신은 회의 중에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개진하고 수정안을 제안하며 모두의 감탄을 샀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대부분 조의신이 그렇게 지쳐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거다.
단 한 명, 백호를 제외하고는.
“백호 씨가 제일 먼저 눈치챈 것 같은데.”
용제건은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 주제에 다른 호족을 약 올리듯 말했다.
은호는 자신이 형으로 모시는 백호가 조의신을 배려해 준 걸 다행으로 여겼기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의신이 형이 대국할 때에는 늘 표정을 잘 감춰요. 평소에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요.”
“스테일메이트에서 주최한 체스 시합 때에도 그랬지. 은호 씨는 의신이를 잘 따르니까 직접 와서 보면 좋았을 텐데.”
“동하 형이 영상을 구해 주셔서 대국 장면을 전부 봤으니까 괜찮아요. 다음 대국부터는 직접 보러 갈 거고요.”
용제건의 말을 받아친 은호가 황호를 응시했다.
황호는 회의가 끝난 후부터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졸음기가 가득한 눈으로 사라진 조의신을 떠올리니 황호는 머리가 아팠다.
은호는 황호의 두통을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의신이 형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계속 자리에 머무르셨을 거예요. 황호 님께서 억지로 수면을 권해 봤자 들은 척하지 않았겠죠.”
“……그건 그렇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으나 은호가 맞는 말을 한 덕인지 두통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조의신이 저리 고집을 부리면 보통 황호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실컷 은인 소리를 했는데 매번 조의신을 혹사시켜서 면목이 없었다.
그때, 용제건이 입을 열었다.
“아, 깜빡하고 말 안 할 뻔했는데.”
용제건의 말에 김신록이 대놓고 인상을 썼다.
저 용제건이 무언가를 깜빡하는 일은 거의 없다.
계속 말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을 텐데, 막 생각난 척 떠들어 대는 게 뻔뻔해 보였다.
“입학시험이 끝나는 대로 용궁에 다녀올 거야. 황호 씨, 연차 좀 쓸게.”
“뭐?”
저 말은 김신록도 처음 듣는 것 같았다.
내년에 용왕신의 무녀 선발식으로 용궁에 갈 거라는 건 알았지만,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자리를 비울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김신록이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사이 황호가 물었다.
“중요한 일인가 보군. 혼자 다녀올 생각인가?”
용제건의 리플레이에 의하면 배신자는 용왕신의 무녀.
무녀들은 내년 정월 초하룻날까지 한반도에 머무를 테니 배신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다.
그래도 걸리는 게 있었다.
은호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이 일을 꾸미는 자, 가칭 흑막은 용왕신의 무녀들을 포섭한 자입니다. 용궁에 어떤 안배가 있을지 모릅니다.”
“응, 알아.”
“알면서도 용궁에 방문하실 생각인가요? 보고서에는 지금 용궁에 가야 할 이유가 나와 있지 않은데요.”
은호는 입가에 너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언뜻 용제건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용제건은 오늘 들어 가장 긴장하고 있었다.
사실 긴장했다기보다는 스릴을 느끼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지금 용제건이 느끼는 감정에 가까웠다.
‘여기에서 비탄의 웅녀 씨에 관해 말하면, 신록이를 제외한 모든 호족이 나를 죽이려 들겠지. 정보를 캐기 위해 죽이지는 않겠지만.’
용제건에게 용궁에 갈 것을 조언한 것은 비탄의 웅녀다.
그러나 이 사실을 호랑이 굴에서 밝히는 건 죽음을 자처하는 일이었다.
비탄의 웅녀와 선을 대고 있는 걸 알면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호족은 올해 들어 웅족과 몇 번이나 대치하지 않았던가.
“리플레이를 겪고도 이 시점에 자리를 비운다니, 이상하군.”
“개인적으로 용궁과 관련된 정보를 입수한 게 아닙니까? 용제건은 저래 보여도 발이 넓습니다.”
황호와 은호가 의구심을 품자 적호가 이를 수습하려 했다.
비탄의 웅녀에게 가장 사감이 많을 적호가 용제건을 감싸는 상황이 되었다.
적호는 딱히 용제건을 위해서가 아니라 묘한 분위기에 안절부절못하는 김신록을 위해서 용제건 편을 드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플레이를 경험해 본 입장에선 그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적호 씨는 그때 일이 아직도 미안한가 보네.’
용제건은 악몽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적호가 시체 같은 얼굴을 했던 게 떠올랐다.
적호는 마주칠 때마다 희미한 희망을 품고 빛을 잃은 여의보주를 응시해 왔다.
그 눈에는 혼과 육신이 깎여 가면서 헛된 소원을 비는 용제건에 대한 미안함도 섞여 있었다.
적호의 말이 계속되었다.
“출처를 밝힐 수 없는 정보도 있는 법이죠. 추궁하기보다는 차후 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추궁하려는 게 아니다. 납득이 가지 않을 뿐이다만…… 나중에 정보 공유를 한다면 용제건의 용궁 방문을 막을 이유는 없다.”
황호는 적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호는 이번 건에서 한발 물러설 모양이었다.
그러나 은호는 아직 의심을 접지 않은 것 같았다.
“누구로부터 정보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의신이 형은 아닐 거예요. 의신이 형은 당신을 위험한 곳으로 보내려 하지 않을 테니까요.”
“용궁이 위험한 곳이라니, 너무하네.”
“의신이 형은 용족과 엮여 용살자의 용아(龍牙)에 몸을 꿰뚫렸는걸요. 호족의 은인을 아끼는 분이라면 누구나 용족의 본거지인 용궁을 경계하겠지요.”
은호는 방송국 사건에서 조의신이 다친 건 때문에 용족이 탐탁지 않은 듯했다.
호락호락하게 속내를 내보일 생각은 없지만, 이대로 은호에게 추궁당하다가는 꼬리를 잡힐 가능성이 있다.
이번 건만으로 용제건과 비탄의 웅녀 간의 거래가 밝혀지지 않겠지만, 작은 계기가 쌓여 중요한 순간에 모든 게 발각될 수도 있다.
용제건은 정보의 출처를 파헤쳐지는 걸 막기 위해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걱정해 주는 거였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용궁은 위험하지만 갈 만한 곳이야. 아, 그러면 누가 나랑 용궁 같이 갈래?”
용제건이 너스레를 부리자 공기가 바뀌었다.
용제건은 가볍게 말했으나, 용궁 출입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잘 알고 있던 탓이었다.
“황호 씨는 저번 소풍 때 보물찾기 이벤트에서 1등을 했잖아.”
“1학년 0반 소풍과 용궁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용제건은 화제를 돌리는 데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바뀐 화제도 마음에 들어 저도 모르게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그걸 지켜보는 김신록이 질린 표정을 짓고 있어 더 신이 났다.
용제건은 황호를 보며 말했다.
“1등 상품은 용궁 초대권이었어.”
* * *
다음 날.
숙면을 마치고 눈을 뜨니 해가 떠 있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대체 몇 시간을 잔 건지 모르겠지만, 12시간 이상 잔 건 확실했다.
품 안에 천사가 있어서 그런가?
유독 호랑이 저택에 머물 때마다 잘 자는 것 같다.
‘……집주인 허락도 없이 뻗어 버리다니.’
잘 자서 몸 상태는 최고였으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회의하러 온 방문객이 회의가 끝나자마자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잠들면 그게 무슨 민폐인가.
일어나면 대저택 주인 황지호와 별채에 머무는 은호에게 사과부터 해야겠다.
그때, 밖에서 ‘드르륵’ 하고 창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창문을 열어 복도를 환기하는 중인 것 같았다.
‘보폭이나 기운을 보니까…… 백호군인가?’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아침부터 성실하게 움직이고 있구나.
불청객 주제에 편히 자고 있는 게 미안해서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품 안의 솜뭉치가 꿈틀거렸다.
올무의 눈이 초롱초롱한 게 먼저 눈을 떴으나 계속 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린 것 같았다.
왕!
올무가 밝게 아침 인사를 했다.
문밖에 백호군이 있는 것 같으니 같이 산책을 다녀오거나, 아침을 먹어도 됐을 텐데 올무는 착하게 아침 인사를 하려고 기다린 모양이었다.
올무의 넓은 배려심과 인내심에 벅차올랐다.
올무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잘 잤어? 배고프지는 않고?”
왕!
“씻고 나올게. 먼저 아침 먹으러 갈래?”
끄응…….
계속 밝게 대답하던 올무가 끙끙거리며 품을 파고들었다.
먼저 아침을 먹으러 가기 싫다는 뜻인가 보다.
천사는 또 나를 기다려 줄 생각인 건가!
감격을 억누르며 겨우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 같이 먹자. 기다려 줘.”
왕!
그런데 올무는 내가 하는 말을 전부 알아듣는 걸까?
올무는 천사에 천재니까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거실로 나와 보니 적호와 김신록을 제외한 호랑이들이 모여 있었다.
일단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 할 때였다.
“의신이 형, 좋은 아침이에요. 설마 아침 인사로 사과를 하시진 않겠죠?”
……어떻게 알았지?
은호의 말에 잠깐 머뭇거리다가 나도 아침 인사를 했다.
결국 사과할 타이밍을 놓치고 아침밥을 먹고, 어쩌다 보니 호랑이 저택에서 점심과 저녁까지 먹게 되었다.
호랑이 저택에 머물면서 딱히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거나 정보 공유를 한 건 아니었다.
올무와 놀아 주고, 처웃는 황지호가 해 주는 밥을 먹고, 은호와 옛날이야기를 조금 하다가 공부를 봐주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말이 공부를 봐주는 거지, 은호는 지금 하는 만큼만 하면 만점을 받을 것 같은데.’
은호는 기출 문제를 풀다가 의문점이 생긴 건지 질문을 몇 개 던졌는데, 이미 완벽하게 출제 의도와 답안을 이해하고 있어서 딱히 내가 답할 게 없었다.
서술형 문제다 보니 다양한 답안이 나올 수 있어 개인적인 의견을 알려 주긴 했지만.
결국 일요일은 거의 호랑이 저택에서 쉬다가 가게 되었다.
날이 쌀쌀하긴 했으나 기숙사로 오는 길에 백호군과 올무와 한 산책도 완벽했다.
백호군은 은호나 황지호와 달리 말이 없었으나 밤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주말이 끝나고 주중.
은광고 입학시험이 시작되었다.
수험이 치러지는 건 주중 오후였다.
‘시험이 끝날 때까지 오후 수업이랑 부 활동이 없으니 한가하겠네.’
안내역 겸 안전 요원으로 움직일 예정이지만, 다소 한산한 지역에 배치되어 할 일이 거의 없을 것 같았다.
나와 같은 조에 배정된 파트너, 김유리는 의욕에 차 보였다.
“이제 우리도 선배가 되는구나. 좀 떨린다.”
김유리는 좋은 선배가 될 거다.
중학교 시절, 안다인이 학생회장이고 김유리가 학생부회장이었는데 그해 학생회 평판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인망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둘이 고등학생이 되고도 간간이 소문이 들려올 정도였다.
중학교는 고등학교에 비해 학생 자치 기구의 제약이 많은데도 그렇게 활약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뿌듯한 기분을 느끼며 순찰을 하고 있을 때였다.
“수험증을 목에 걸고 있는 거 보니까 수험생 같은데…… 길을 잃었나?”
김유리의 시야 끝에 은광고 교복이 아닌, 타교의 교복을 입은 학생이 있었다.
다소 어려 보이는 학생의 목에 은광고 인장이 새겨진 수험증이 걸려 있는 걸 보니 김유리의 추측이 맞을 거다.
그 수험생은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저 학생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광림으로 몇 번 힘을 빌린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무녀 후보생이다……!’
지금 저기에 있는 건 ‘용왕신의 무녀’ 시나리오의 주역, 무녀 후보생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