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은광고 입학 시험 (8)
희대의 망겜 플마고의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어떤 식으로든 은광고와 연관되어 있다.
은광고 재학생이거나, 은광고 졸업생이거나, 교직원이거나, 가족이 은광고인이거나, 친해진 사람이 은광고인이었다거나 등등.
즉, 플마고의 주요 무대는 은광고다.
그러나 그 무대에 제대로 오르지도 못한 채 사망한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있다.
그중 내 기억에 가장 오래 남은 건 두 사람.
첫 번째는 현재 황지호가 접수했다는 광일초등학교에 재학 중인 초등학생 플레이어블 캐릭터다.
워낙 뛰어난 자질을 품었다 보니 나이가 차면 은광고에 들어갔을 거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기는커녕 중학생이 되기도 전에 흑막의 손에…….’
흑막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졌다면 살아남았다 해도 큰 의미가 없겠지만.
그 어린아이가 그렇게 떠난 건 아직도 씁쓸했다.
‘다른 한 명은 은광고에 합격하고, 17세가 되었지만 개학하기 전에 용궁에서…….’
은광고에 가지 못한 두 번째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용왕신의 무녀 후보생이었다.
17세가 된 용왕신의 무녀 후보생은 용궁으로 향한다.
후보생은 총 셋, 그중 정식 무녀가 될 수 있는 건 한 명이었다.
무녀 후보생들은 여러 시험을 거쳐 기량을 뽐내고 마음가짐을 평가받았다.
마지막 시험은 용왕신을 직접 마주하고 시를 읊는 것이었다.
순서를 정해 용궁의 깊은 곳, 용왕신이 강림하는 장소를 다녀온 무녀 후보생들이 시를 지어 용족과 후예, 무녀들의 앞에서 발표했다.
[저는 오색 채운 속에서 찬란히 빛나던 용왕신의 비늘에 관해 시를 썼답니다.]
첫 번째 무녀 후보생은 용왕신이 두른 채운과 비늘에 관해 시를 썼다.
마치 직접 눈으로 보는 것처럼 채운과 비늘을 시로 그려 내는 솜씨가 훌륭했다.
상위 존재의 눈만큼은 아니지만, 용왕신의 오색 채운과 비늘에는 강력한 힘이 담겨 있었다.
첫 번째 후보생은 그 힘의 상징을 똑똑히 보고 섬세한 묘사를 펼쳤다는 점에 큰 점수를 받았다.
다음은 두 번째 후보생 차례였다.
[저는 위엄이 넘치는 울림을 품은 용왕신의 목소리에 관해 시를 써 왔답니다.]
두 번째 후보생은 용왕신의 말씀과 목소리를 시적으로 풀어냈다.
이계 충돌 이후로 신과 인간의 세계는 단절되어, 용왕신과 용들을 잇는 존재인 용궁과 무녀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무녀 후보생이 용왕신의 목소리에서 느낀 위용의 묘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무녀 후보생이 정식으로 무녀가 된다면 용족과 용왕신의 연결이 더욱 돈독해질 것 같았다.
다음은 마지막 후보생,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차례였다.
마지막 후보생의 손에 들린 비단으로 된 족자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시의 발표를 기다리던 이들이 동요했다.
[시를 발표하라고 했지, 이를 반드시 써서 제출해야 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외워서 발표하겠다면 그 뜻을 존중하겠다.]
황룡이 그렇게 말하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한편,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족자지를 바닥에 내려놓은 마지막 무녀 후보생이 고했다.
[시를 쓸 수 없어요.]
[……시험을 포기하는 것이냐?]
[아뇨, 포기할 거면 진작에 했을 거예요. 전 끝까지 시험을 치를 생각이에요. 하지만 시는 쓸 수 없어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앞서 시를 발표한 첫 번째, 두 번째 무녀 후보생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는 악의 한 점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시험은 용궁 깊은 곳에 계신 용왕신을 뵙고 시를 쓰는 거였죠. 하지만 용왕신이 부재중이신데 어떻게 시를 지어낼 수 있죠?]
[……용왕신께서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고?]
황룡이 되묻자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확신하고 있는지, 그녀의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네, 용궁 저편에 있는 건 가짜였어요. 그럴듯하게 구름을 두르고, 비늘로 몸을 감추고, 그분을 흉내 내 말한다고 해도 진짜 용왕신에게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걸요.]
[진짜 용왕신을 따로 뵈었던 것처럼 말하는구나.]
[물론이죠, 17살이 된 후에는 꿈에서 자주 뵈었으니까요. 그분이 안 계셨으면 길을 잃어서 용궁에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아, 혹시 진짜 용왕신과 가짜 용왕신을 가려내는 시험이었나요?]
마지막 후보생의 말에 용궁 전체가 술렁였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식 무녀가 되지도 않은 후보생이 꿈을 통해 용왕신의 계시를 여러 번 받았다는 뜻이 된다.
황룡은 그녀의 말이 허풍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듯했다.
이 난리 통 속에서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순수하게 이 모든 것이 시험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배신자는 이때를 기점으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본 건 전부 사실이었겠지. 그렇게 용궁 속에서 죽인 걸 보면.’
흑막은 이 재능 넘치는 무녀 후보생이 정식으로 용왕신의 무녀가 되는 것도, 살아서 용궁 밖으로 나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정식 무녀 시험에서 탈락이 확정된 이후 흑막의 손에 사망했다.
사인은 용왕신의 분노를 사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
그렇다 보니 용족들은 그녀가 한 말을 모두 거짓이라 판단했다.
용왕신의 계시를 받았노라 허언을 떠들고, 용궁 깊은 곳에 강림한 용왕신을 가짜라 치부한 죄가 있으니 죽어도 싸다고 생각한 용족이 있을 정도였다.
‘……그 시기의 용족은 상태가 안 좋았지.’
용제건을 잃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보니, 다들 판단이 흐려져 있었다.
거기에 더해 무녀 중에 배신자들이 있었으니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그나마 용궁을 지키고 있던 황룡이 중립을 지키고 있었으나 그 혼자서 모든 사건을 감당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렇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무녀 후보생은 어린 나이에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은 채로 암살당했다.
그 무녀 후보생, 윤여랑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저기, 안녕하세요! 제가 길을 잃었는데요!”
나와 김유리를 발견하자 그녀가 불안해하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달려와 말을 걸었다.
멀리서 손을 흔들면서 뛰어오는 게 아주 활기차 보였다.
심각한 방향치, 길치인 그녀가 한 번도 미아가 되지 않은 건 엄청난 붙임성이 있는 덕이었다.
“응, 안내해 줄게. 이름하고 수험 번호를 확인해도 될까?”
“감사합니다! 제 이름은 윤여랑이고 수험 번호는…….”
김유리가 웃으며 응대하자 윤여랑이 이름과 수험 번호가 적힌 수험증을 앞으로 내밀며 말을 걸었다.
수험 번호를 검색해 보니 수험장이 꽤 먼 곳이었다.
현재 위치에서 먼 거지, 정문에서는 아주 가까운 곳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길을 헤맸기에 여기까지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눈치 빠른 김유리는 이 아이가 심각한 길치인 걸 안 것 같다.
“수험장이 좀 멀다. 중간에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바래다주자.”
“나도 그럴까 했는데, 잘됐다. 여랑아, 같이 가자.”
“감사합니다! 저, 은광고 언니, 오빠들 만나면 질문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이동하는 동안 윤여랑은 나와 김유리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었다.
윤여랑은 순식간에 김유리와 통성명을 하고 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김유리도 남다른 사교력을 가지고 있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친해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몇 년은 알고 지낸 사이처럼 보일 거다.
“유리 언니는 학생회구나……! 키도 크고 멋있어!”
“아하하, 고마워. 은광고 합격하면 학생회 올래?”
“음…… 생각해 봐도 돼요? 제가 합격 후에는 또 시험 준비할 게 있어서요!”
용왕신의 무녀 시험 말하는 건가?
그때 본 시험 내용을 생각하면 딱히 대비할 만한 것들이 아닌데…….
어차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윤여랑은 모든 시험에서 비범한 모습을 보여 줬기에 별문제 없을 거다.
윤여랑은 나한테도 말을 걸었다.
“저 무명의 초신성이 TV에 나온 거 몇 번 봤어요! 그때 같은 조였던 분들도 학교에 계시나요? 아, 손 모씨 근황은 안궁금해요!”
“유상훈은 같은 학교야. 장남욱은 사관학교에 갔어.”
윤여랑은 궁금한 게 많은지 화제가 끊이질 않았다.
윤여랑은 이동하는 중에 딴 길로 샐 뻔하기도 했는데 김유리가 목적지까지 잘 이끌어 줬다.
그 덕에 윤여랑은 김유리와 더 친해졌다.
비록 윤여랑의 머릿속 내비게이션에 심각한 문제가 있긴 하지만, 호기심 많고 높은 친화력을 갖고 있는 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다웠다.
“감사합니다! 선배님들이 길 안내해 주셔서 시험도 잘 볼 거 같아요! 나중에 알려 주신 디바이스 코드로 메시지 보내도 돼요?”
“응, 언제 맛있는 거 사 줄게. 은광고 주변에 맛집 많아.”
김유리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메시지를 보낸다는데 당연히 응해 줘야지.
만약 윤여랑과 마주칠 줄 알았다면 미리 은광고 주변의 맛집들에서 파는 간식거리를 사 두는 거였는데, 내 배려가 부족했다.
다음에 연락을 해 오면 꼭 뭐라도 사서 먹여야겠다.
오늘 필기는 좀 늦었지만, 곧 실기 시험을 치를 예정이니 그때에는 잊지 말고 간식을 준비해 둬야겠다.
시험을 치르기 전에 가볍게 먹을 만한 간식거리를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히히히, 하하하하, 흐흐흐하하하!”
어디선가 미친놈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섬뜩했지만, 올해 은광고에 다녔던 이들은 천익산이나 3학년 구역에서 한 번쯤은 들었을 웃음소리였다.
웃는 소리는 곧 가까워졌다.
미친놈의 정체는 우기환.
우기환은 데이터 칩과 손바닥만 한 크기의 서적을 뿌리면서 질주하고 있었다.
우기환 주변에는 종이로 인쇄된 우기환 얼굴 가면을 쓴 이들도 서적과 칩을 뿌리는 중이었는데, 아마 3학년 0반 일당인 듯했다.
“야, 잡아!”
“정문으로 못 가게 해! 호연관 쪽으로 몰아!
“예비 신입생들도 알아야 될 거 아니야! 날 막지 마! 히히히, 흐하하하하!”
“아, 저 미친놈 며칠 조용하다 했더니!”
우기환을 쫓는 건 전 학생부회장, 지명수였다.
3학년들이 2등의 저주를 벗어나지 못한 우기환을 철저히 감시한 듯한데, 그간 조용하게 지냈었나 보다.
하지만 그건 그저 오늘을 위해 힘을 아꼈을 뿐.
우기환은 미친 짓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환이부터 잡자!”
파아앗!
지명수의 손짓에 공기의 무게가 변한 것 같은 감각이 들었다.
지명수의 광림, ‘부유선물(浮遊選物)’은 지정한 범위 내에서 선별한 것을 하늘로 떠오르게 한다.
부유할 대상을 택하는 과정과 컨트롤이 까다로워 지명수는 보통 범위만 지정하고 모든 것을 떠오르게 한다.
원하는 때에 상대의 틈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어찌 사용하든 강력한 광림이긴 하지만, 지명수는 그 힘을 상당히 비효율적으로 쓰고 있었다.
‘그렇게 쓰면 이능파가 금방 바닥이 날 텐데.’
지명수가 광림을 사용하자 범위에 들어간 이들이 둥실 하고 떠올랐으나 그중 우기환의 본체는 없었다.
종이 가면을 쓴 3학년 0반 선배놈들이 히죽거리는 게 보였다.
지명수의 광림의 한계를 가늠하고 다른 아이들이 대신 광림의 범위 안에 들어가 떠오르는 사이, 우기환이 빠져나간 듯했다.
지명수가 탄식하고 추적을 재개했다.
“……우리도 도와야 할까?”
“우기환 선배님이 폭주하면 1학년은 물러나 있으라는 지시가 있었어.”
“아하하, 그랬지.”
나는 행여 김유리가 우기환의 미친 짓에 휘말릴까 봐 바로 선을 그었다.
“대체 선배님이 뭘 뿌리신 거지?”
김유리는 추적을 포기한 대신 우기환이 뿌린 책과 데이터 칩을 몇 개 집어 들었다.
데이터 칩에는 책 표지와 같은 라벨이 붙어 있는 게, 책을 데이터화 시킨 듯했다.
‘표지는 다른데, 다 같은 책 같다.’
우기환이 뿌리는 책은 자체 제작 서적 같았는데, 표지 디자인과 제목은 달랐지만 두께는 전부 똑같았다.
같은 제품을 광고해도 여러 모델, 영상이 존재하듯 다양한 표지로 사람들을 낚으려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책 제목은 멀쩡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신입생을 위한 은광고 팁 모음집.’
‘우주의 기운을 찾아서.’
‘강한 담임과의 대결 기록.’
‘어차피 수석과 차석은 정해져 있다.’
‘공부를 하든 안 하든 똑같은 2등의 삶.’
‘천익산 비장의 관광 가이드.’
책 제목은 다양했으나 예상대로 모두 같은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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