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47화 (545/925)

76. 은광고 입학 시험 (9)

‘왜 굳이 이런 걸 책으로 만든 거지?’

3학년 0반 선배놈들이 뿌린 책자에는 헛소리가 잔뜩 적혀 있었다.

책자 내용 전부가 이상한 건 아니었다.

초반부터 정신 나간 소리를 써 두면 아무도 읽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던 탓일까.

아니면 글을 쓰던 중에 옛 기억이 떠올라 점점 미쳐 갔던 걸까.

처음에는 차분하게 입학 후 어려웠던 점, 느낀 점을 중심으로 팁을 나열했으나 10페이지 정도 지나니 브레이크 없이 급발진한 흔적이 엿보였다.

“우주의 기운을 찾아라, 길은 열릴 것이다. 비록 우리 반은 졌지만, 아직 모른다. 천익산에 비밀이 숨어 있다. 우주의 기운은 보고 있나…….”

옆에서 책자를 훑어보던 김유리가 소제목을 읽다가 말을 멈췄다.

학교 선배라는 것들이 중학생들한테 이런 게 쓰여 있는 걸 뿌리고 있으니 학생회 소속으로서 머리가 아플 거다.

우기환의 심연을 엿본 김유리는 책을 덮고 애써 웃었다.

“아하하, 선배님들이 시험 끝나고 많이 심심하셨나 보다! 아직 우주의 기운을 찾고 계신가 봐.”

착한 김유리는 우기환 일당에게 실드를 쳐 보았지만, 별로 소용없었다.

김유리가 예전에 우기환이 쓴 광림 논문을 보고 글이 논리정연하다며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그 생각을 바꿀 것 같다.

그때, 뒤에서 달관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환이가 신입생들한테 이렇게 관심이 많은 줄 몰랐네. 날뛸 건 예상했지만, 오늘 이렇게 나올 줄이야.”

뒤를 돌아보니 성시완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성시완이 나와 김유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성시완 선배님, 안녕하세요.”

“응, 안녕. 안내역 하느라 고생이 많네. 여긴 곧 정리될 테니까 뭐 마시러 갈래?”

곧 정리된다고?

성시완은 오늘 습격할 줄은 몰랐어도 일단 우기환 대책을 세워 둔 모양이었다.

성시완의 말이 사실인 듯, 지명수를 피해 달아나던 3학년 0반 놈들의 퇴로 앞에 안개가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어둡고 음침한 느낌을 주는 안개를 발견한 순간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쓸 뻔했다.

저 안개를 쓰는 건 현 지익회장, ‘계’새끼였으니까.

“……이건 ‘밤정적의 안개’다!”

“아, 지익회장이잖아!”

“멀리 퍼져!”

계이담의 광림, 밤정적의 안개.

그 힘은 피아 구분하지 않고 안개에 닿은 이들의 이능파 운용을 방해한다.

성시완이 한발 물러나 있는 건 안개 범위 안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인 듯하다.

성시완이 계이담을 상대로 몇 번 대련에서 이겼던 걸 생각하면 저 안개에 닿아도 별문제 없을 것 같은데.

‘계이담 혼자서 3학년 0반을 제압하는 건 불가능해.’

3학년 0반은 오랜 단련으로 벌크업이 된 상태다.

이능파 운용을 저해해도 육체의 힘은 여전할 테니 그들의 공격을 저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안개 속에 있는 건 계이담 혼자인데, 저쪽은 반 전체가 몰려다니니 머릿수도 0반 선배놈들이 훨씬 많았다.

“지익회장을 노려! 이능을 못 쓰게 해! 돌겨어어억!”

안개 속에 발을 들인 우기환이 외치자 선배놈들이 계이담을 향해 돌진했다.

나는 속으로 3학년 0반이 계이담을 박살 내도록 응원했다.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그건 이루어지지 못했다.

파앙, 휙, 콰드득, 퍽!

안개 속에서 무언가를 막고 던지는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군가가 눈으로 보기 힘든 속도로 움직이며 계이담을 향해 쏟아지는 공격을 막고, 공격해 온 3학년 0반 선배놈들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있었다.

“이건…… 설마…… 커헉!”

“도망쳐, 기환…… 크윽…….”

“얘들아!”

힘이 다한 3학년 0반 선배놈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우기환 혼자 남았을 때, 안개 속의 고수가 계이담에게 말을 걸었다.

안개 속에서 이능파 운용도 안 하고 오로지 힘으로만 3학년 0반 선배놈을 제압했는데,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안개를 거둬도 돼. 아, 시간이 걸려? 그럼 내가 처리할게.”

쿠구구구구…….

처리한다는 말과 동시에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보였다.

소용돌이는 금방 용권이 되어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갔다.

“하아압!”

콰콰콰콰!

안개가 허공으로 완전히 흩어졌다.

계이담의 음침한 안개가 사라지자 시야가 훤해졌다.

용권의 여파로 요동치는 공기 속, 강한 담임 임연화가 주먹을 쥐고 서 있었다.

임연화는 오로지 주먹 하나로 3학년 0반을 제압하고 밤정적의 안개를 날려 버린 거다.

‘지명수가 3학년 0반 선배놈들의 전력을 깎아 두긴 했지만, 저 압도적인 힘 차이를 보면 지명수가 있든 없든 결과는 똑같았을 거야.’

임연화를 보고 안심한 표정을 지은 지명수도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계이담과 임연화가 자연스럽게 연계 플레이를 한 걸 보니, 지익회는 우기환 대책을 세우기 위해 임연화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던 모양이었다.

“와, 안개는 주먹으로 없앨 수 있는 거구나…….”

“……임연화 선생님이라서 쓸 수 있는 기술일 거야. 우리는 흉내 내지 말자.”

“네!”

김유리의 감탄에 성시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지나치게 강한 인류와 단체로 미친 놈들, 악플러 놈을 보다가 정상적인 대화를 들으니 힐링이 되는 것 같았다.

“기환아, 지익회장은 후밴데 폭력을 쓰려 들면 어떡하니.”

“크윽…….”

한편, 임연화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우기환을 보고 있었다.

우기환은 한껏 긴장한 얼굴로 임연화를 보고 있었다.

도망칠 틈을 찾고 있는 것 같았지만, 강한 담임이 빈틈을 보일 리가 없었다.

임연화는 의도한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퇴로가 막힌 우기환에게 팩트를 기반으로 한 정신 공격을 가했다.

“앞으로는 정정당당하게 1대1로 싸우렴. 아, 너희들은 선생님보다 훨씬 약하니까 앞으로도 나한테 도전할 때에는 비겁하고 구차하게 여럿이서 덤벼도 돼.”

“크아악!”

졸지에 비겁하고 구차한 일당의 우두머리가 된 우기환이 비통한 비명을 내질렀다.

임연화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구경꾼들이 몇몇 보였다.

“그런데 뭘 하려다가 이 꼴이 난 거니? 책들을 무단으로 배포하려다가 걸렸다고? 사전에 선생님하고 상의했으면 학교 측과 상의해서 정식으로 교문 앞에서 나눠 줄 수 있게 도왔을 텐데.”

황지호가 태만하게 굴고, 최편득이 버티던 최악의 때, 은광고가 막장으로 운영되던 시절에도 그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한국 최고 명문고에서 이런 정신 나간 서적을 정식으로 배포하다간 뉴스에 나올 거다.

우기환이 뭐라 답하기 전에 임연화가 땅에 떨어져 있던 책들을 들어 읽기 시작했다.

임연화가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는 몹시 빨랐다.

강한 담임이라는 이미지에 가려 있지만, 임연화도 엄연히 이능 연구 학문에서 학위가 있는 석학 중 하나였다.

한국 최고의 명문고에서 연구부장 자리까지 오른 건 그 강한 힘 때문만이 아니었다.

단숨에 완독한 임연화는 어딘가 그늘진 얼굴로 우기환을 바라봤다.

“얘들아…… 선생님은, 선생님은…….”

임연화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들렸다.

고생하면서 담임직을 맡아 아이들을 지도했는데, 졸업할 때까지 미쳐 있는 게 실망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우기환 일당들은 강한 담임 임연화를 이겨 보겠다고 그간의 대결 기록과 약점일지도 모르는 사항들, 분석과 전략을 나열해 두지 않았던가.

어떻게든 임연화를 이겨 먹겠다고 저 난리를 치고 시험 날에 책을 만들어 뿌린답시고 비겁하게 1대다수로 후배를 공격했으니 착잡한 심정이 들 수도 있겠다.

“임연화 선생님……?”

성시완도 같은 생각을 한 건지 걱정스럽게 임연화를 불렀다.

책을 쥐고 있는 임연화의 손에 힘이 들어간 건지, 작은 책이 임연화의 손에 잡힌 모양대로 우그러들었다.

그걸 본 김유리가 ‘와’ 하고 탄성을 토하는 게 들렸다.

그리고 그때, 임연화가 감격으로 가득 차 뿌듯해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정말, 엄청나게, 크게 감동했어! 너희의 담임 선생님은 감격했다, 얘들아!”

……감동했다고?

내가 뭘 잘못들은 게 아닌가?

임연화는 감격을 이기지 못한 듯 우기환의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갑작스럽게 기습당한 우기환은 손가락뼈가 전부 박살 난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탈출할 때를 엿보던 3학년 0반 전원이 차례로 임연화의 자애로운 악수를 받고 무너져 내렸다.

“선생님과의 추억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기록하고, 책을 만들어서 뿌리다니…… 어떡해, 제자가 이렇게까지 해 준 적은 처음이야!”

그야 이 정도로 미친 놈들은 처음일 거다.

임연화에게 타격을 주기는커녕 역효과만 났다는 사실에 3학년 0반은 절망했다.

“아, 그리고 121페이지에 적힌 2학년 시절 인간 윷놀이 대결할 때 말인데, 그때 선생님이 힘이 빠진 게 아니야. 전날에 축구를 하다가 실수로 선생님 정강이를 친 아이 발가락이 부러졌잖니. 미안한 마음에 자체 패널티를 주려고 안 쓰는 손으로만 윷을 던진 거야.”

“그, 그걸 안 쓰는 손으로만 던진 거라고!”

“응, 기환아. 선생님 지금 의욕이 넘치는데, 여기 있는 대결들을 하나씩 복기해 볼까? 빨리 가자!”

3학년 0반 선배놈들이 기겁해서 도망치려 했으나 임연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곧 그들은 한 명도 남김없이 붙잡혀 역대 임연화와의 대결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경험하게 되었다.

“잘됐다, 적혀 있는 대결 내용 보니까 다 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던데? 입학시험 기간 동안엔 조용하겠다.”

안도한 지명수의 발언으로 우기환의 난이 종료되었다.

바닥에 뿌려진 서적과 데이터 칩을 회수하는 사이에 2, 3학년들이 대화를 나누는 게 들렸다.

“우기환 선배님은 한 번도 1등 하지 못한 거예요?”

“응, 종합 1등도 못 하고 과목 1등도 못했어. 반 1등은 했겠지만.”

“과목 1등도요? 여태까지 다 도원우 선배랑 같은 과목을 들은 건가요?”

지명수의 대답에 다들 놀란 기색이었다.

은광고는 오전엔 공통 과목, 오후에는 선택 과목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그 선택 과목의 종류는 웬만한 대학의 강의 수보다 많다.

당장 나만 해도 오후 선택 과목 중 반 아이들과 겹치는 과목은 한이와 황지호와 같이 듣는 일반 에너미학 하나뿐이다.

그런데 굳이 우기환은 도원우와 같은 과목을 선택하고 진 거다.

“기환이가 잘하는 과목을 좀 섞거나 원우가 없는 과목을 들으면 좀 나았을 텐데. 치유 광림, 스킬 관련 과목은 상희를 이길 순 없겠지만.”

플레이어마다 잘하고 못하는 과목이 있다.

도원우는 올라운더에 만년 수석이지만, 우기환이 전략을 잘 짜서 과목을 선택했다면 한 번 정도는 1등을 했을지도 모른다.

“쟤도 요령이 없다니까. 미친 자의 사고 회로는 이해가 안 가.”

“하하, 기환이도 나름 열심히는 했어.”

“그건 그렇지.”

지명수와 성시완이 이야기를 하는 걸 들으니 우기환을 더 알 수 없게 된 기분이 들었다.

우주의 기운을 찾아다니는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나름의 철학을 갖고 1등 자리를 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시험이 끝난 시각, 나는 불길한 내용이 담긴 메시지를 받았다.

[은이호] 의신이 오빠, 오늘 은광고 선배님께 천익산 관광 가이드를 선물 받았어요. 시험 끝나고 같이 가면 안 돼요……?

[은서호] 다른 애들이 찾기 전에 저희가 우주의 기운을 찾을래요!

우기환의 광기가 은호의 후예들에게까지 미치고 말았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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