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시험의 결과 (6)
은광고 중앙 구역 학생회관.
회의실 곳곳에서 학생회 소속 학생들이 자습 중이었다.
시험 기간이 시작되어 부 활동은 중단된 상태지만, 자치 기구 학생들은 스터디 파티를 구성해 함께 공부할 겸 만일의 사태를 대비할 겸 부실에 모이곤 했다.
실기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이능을 사용하다가 실수로 기물을 파손하는 학생도 있고, 그냥 공부하기 싫은 마음에 사고를 치는 학생도 있어 자치 기구 소속원들은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현 학생회장인 염준열과 학생부회장 곽경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기환 선배님이 뿌린 책하고 데이터 칩 중에 80% 정도는 수거 완료했는데, 나머지는 아직이다.”
곽경구가 염준열의 책상 위에 책더미를 올려 뒀다.
우기환의 정신세계가 드러나는 괴상한 제목들의 책들이었다.
표지와 제목은 제각각이었으나 내용은 일치했다.
우주의 기운, 강한 담임과의 대결, 2등의 서러움 등 보는 것만으로도 아득해지는 텍스트들이었다.
곽경구의 보고를 듣던 염준열이 물었다.
“남은 20%는 회수 가능해?”
“아니, 나머지는 수험생들이 갖고 돌아간 것 같다.”
“그래…… 고생했어. 파기는 내가 할게.”
“됐다. 명수 형이 한다고 했어. 요새 할 게 없어서 심심하대.”
3학년은 현재 진로 문제로 정신없는 시기를 보내는 중이었으나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노는 이들도 몇 명 있었다.
그런 이들은 흔히 두 종류로 나뉘었다.
첫째, 대학에 진학하는 이들.
둘째, 프로 플레이어 팀에 입단하는 이들.
지명수는 이 중 후자에 해당되었다.
‘명수 형이 얼마 전에 면접을 통과했다고 했지.’
지명수는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대신 프로 플레이어 팀에 들어가기로 했다.
입단하고 싶은 팀을 몇 군데 꼽아 두었는데, 지명수는 처음 지원한 프로 플레이어 팀에 바로 합격하였다.
염준열은 지명수에게 줄 입단 축하 선물을 생각하며 물었다.
“수국향기에서 바로 소집이 걸릴 줄 알았는데, 안 바쁘시대?”
“어, 겨울방학 때부터 같이 이계 공략에 갈 예정이라고 들었다.”
지명수가 입단할 예정인 팀은 무려 세계 10대 플레이어 팀, 국내에선 한국 4대 플레이어 팀 중 하나로 꼽히는 수국향기였다.
실적을 내기 전까지는 견습이나 다름없는 몸이라고 하지만, 올해 수국향기의 공개 채용을 통과한 신입은 지명수뿐이었다.
팀 마스터 백화난만(百花爛漫)이 직접 면접에 참석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그녀의 눈에 든 건 지명수 하나였다고 한다.
지명수에게는 도원우기환처럼 수석, 차석을 다투는 압도적인 실력이 없고 유상희의 치유 이능처럼 희소한 이능도 없었다.
하지만 지명수는 임기응변에 능하고 재치가 넘쳤고 무엇보다 넉살이 좋아 사람과 잘 어울릴 줄 알았다.
‘아마 수국향기의 팀 마스터도 그런 점을 높이 산 걸 거야. 명수 형은 어디에 가도 주눅 들지 않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실 테니까.’
그 증거 중 하나는 지명수가 도원우의 절친이라는 점이었다.
도원우는 성장 배경과 타고난 비뚤어진 성격, 유상희를 향한 독점욕 등등으로 어린 시절부터 적을 늘리기 쉬웠는데, 지명수가 옆에 있던 덕에 주변과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지명수는 도원우가 재벌 자제라는 점과 그가 부리는 신경질에 그리 신경 쓰지 않고 친구로 지냈다.
모난 구석이 없고 싹싹한 성격의 지명수가 도원우와 잘 지내는 걸 보고 다가오는 이들이 많을 정도였다.
“원우 형이 서운해하시는 것 같던데. 당연히 같은 대학에 갈 거라고 생각하셨나 봐.”
“명수 형은 프로 플레이어 팀에 들어가고 싶어 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지명수의 진로 선택을 두고 도원우가 아쉬워했다.
도원우는 내심 그가 같은 대학에 진학하고 향후 TC에서 같이 일해 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도원우의 부모도 지명수를 신뢰하고 있으니 만약 TC에 들어가면 장래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지명수는 프로 플레이어의 길을 택했다.
지명수는 넌지시 대학 진학을 권유하는 도원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가 프로 플레이어 팀을 만들면 거기 들어갈게.
그 말을 들은 도원우는 지명수의 뜻이 확고함을 깨닫고 포기했다고 한다.
지명수는 대학에 갈 생각도, TC에 들어갈 생각도 없는 게 확실했다.
어쨌든, 몹시 배부른 소리지만 진로가 결정된 지명수는 심심했고, 그 결과 학생회 일을 자주 도왔다.
“그러면 우기환 선배님 건은 명수 형한테 맡기는 걸로 안다.”
“경구야, 고생 많았어.”
“고마우면 하굣길에 홍룡이나 꺼내 놔라. 날이 춥다.”
“하하하, 알았어.”
농담 같은 진담을 던진 곽경구가 자습하러 제자리로 가자 혼자 남은 염준열이 우기환 일당이 쓴 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제목은 ‘2등이 잘했다고 생각하냐?’였다.
책 제목에는 2등, 차석에 대한 우기환의 울분이 느껴졌다.
지금이 시험 기간이라서 그런 걸까, 염준열은 이 제목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만년 2등이라…….’
염준열은 2학년이 된 후, 천동하에게 밀려 내내 2등만 했고, 멋대로 자신을 라이벌이라고 부르는 마진승이 깐족거리는 걸 지켜봐야 했다.
스타 플레이어로서 하는 대외활동도 있고, 학생회장이 되어 학생회 일로 바빴기에 학업에 열중할 수 없긴 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그건 천동하도 마찬가지였다.
천동하는 TC 그룹 일로 늘 고민이 많았고, 황명 연구소의 객원 연구원으로 근무 중인 데다 선도부장직에 재임하고 있다.
그럼에도 늘 천동하는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1학년 때 딱 한 번 1등을 하긴 했지.’
염준열은 1학년 2학기 기말고사 때 한 번 1등을 차지했다.
염준열은 그저 처음으로 수석 한 걸 기뻐했는데, 알고 보니 그때 천동하의 컨디션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1등을 했다는 기쁨이 가시지 않아 염준열은 자신에게 크게 실망했다.
‘동하가 힘들어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기뻐했어.’
천동하를 친구로서 아끼는 데도 대항심을 누를 수 없었고, 비겁한 승리를 두고 좋아했다.
그때 천동하가 왜 그렇게 상태가 좋지 않았는지 알 순 없었지만, 지금은 짐작이 갔다.
그 원인은 천동하의 숨겨진 동생이 아니었을까?
올해 은광고 입학시험을 치렀다는 천은하는 감금 증후군에 걸려 있었고, 천동하가 그를 깨우는 데에 일조했다고 한다.
염준열은 알려진 정보와 천동하의 태도 등을 고려해 추측했다.
‘……혹시 동하는 그때 동생의 존재를 안 게 아닐까? 나는 그런 동하를 이긴 걸 기뻐한 걸까?’
염준열은 1학년을 마치고 유학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보다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그 당시 염준열은 1등을 했으나 자신에게 크게 실망하여 유학을 결심하였다.
가족들에게는 은광고에서 1등을 했으니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해 보고 싶다고 둘러댔지만, 실상은 달랐다.
어쩌면 그건 단순히 천동하로부터 도망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적벽괴도를 찾아 가르침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빨리 돌아오진 않았을 거다.
딩동.
그때, 염준열의 귓가에 디바이스 알람음이 들렸다.
확인해 보니 유학 중에 말을 튼 상대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기말고사 기간인 걸 알았는지 격려해 주는 내용이었다.
염준열은 기계적으로 답변하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아직 제건이 형한테서는 연락이 안 오네.’
용궁에서는 디바이스 통신이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면서도 벌써 소식이 궁금했다.
나중에 청룡에게 부탁해 수경(水鏡)으로 안부를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잡생각을 마치고 다시 공부를 하려 했지만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안 되겠다. 공부가 안 돼.’
염준열이 기분을 환기시킬 겸 학생회 소속 학생들의 간식이나 사 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바이스를 통해 현재 학생회관에 있는 인원수를 파악했을 때, 예상하지 못한 이름을 하나 발견했다.
바로 안다인이었다.
‘다인이가 있네. 오늘은 당번이 아닌데…… 평소에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지 않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안다인은 도서관에 가면 주수혁과 자주 마주치고 둘은 자연스레 함께 공부하곤 했다.
그런데 오늘 안다인은 학생회관에서 자습 중이었다.
안다인의 학생회관 출입 내역을 확인해 보니 최근 들어 계속 이곳에서 공부한 것 같았다.
염준열은 이를 조금 이상하게 여겼으나 모처럼 학생회관에서 자습하는 후배에게 맛있는 걸 사 줘야겠다고 다짐하곤 매점으로 향했다.
* * *
학생이 시험 기간에 바쁜 건 당연했지만, 축제와 크리스마스 준비를 겸하다 보니 지나치게 바빠졌다.
황지호가 가끔 방해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휴식을 취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준비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또, 준비 외에도 대처해야 할 일이 있었다.
[홍규빈] 의신아, 시험 준비는 잘 되고 있어? 너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홍규빈] TC 연구소의 자금책 추적 말인데, 성과가 있어서 연락했다.
홍규빈은 남궁 그룹 건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 여유가 생겼는데도 TC 연구소의 ‘상위 존재 인공 강림 프로젝트’의 배후를 추적하는 데에 애를 먹고 있었다.
무려 제천대성의 동생 무지기를 묶어 두고, 유상희를 이용해 신을 이 세계에 제 뜻대로 부르고자 하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규모가 크면 클수록 추적하기 쉬울 텐데 행방을 잡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도원우가 다소 자유롭게 움직이며 협회에 협력한 덕일까, 자금책 추적에 드디어 성공한 듯했다.
[홍규빈] 그들의 자금줄은 하나가 아니었어. 스폰서도 여럿이었고…….
[홍규빈] 그중 큼지막한 자금이 경매와 이어져 있더구나.
경매라는 단어에 떠오르는 게 몇 개 있었다.
이 세계에서 경매와 몇 번 엮인 적이 있었으니까.
첫 번째는 내가 직접 부순 환몽 경매.
두 번째는 해외 취재 간 신문부와 2학년 0반 일당, 괴도 네온이 엮인 영국의 비밀 경매.
세 번째는 ‘이무기의 귀천’을 탈환한 포모르 마족의 경매다.
[홍규빈] 자료를 보는 게 빠를 거다.
[홍규빈] (첨부 파일)
홍규빈이 보낸 자료는 자금의 흐름이 어지럽게 정리되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아득해지는 텍스트와 숫자의 나열들을 천천히 읽어 나가니 홍규빈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짐작이 갔다.
‘환몽 경매와도, 영국의 그 비밀 경매와도 이어져 있어. 흑막은 자금줄을 수백, 수천 개로 잘라서 모으고 나누고 뿌리고 있던 거야.’
이계 충돌 후에도 돈은 현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흑막은 그걸 잘 이해하고 있었고, 강력한 자금줄과 경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거다.
그 일부가 TC 연구소의 프로젝트에 이용된 듯했다.
‘이것만으로는 흑막의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어.’
그래도 꼬리와 실루엣이 보 인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까.
자료에 나온 이름들과 수치를 전부 외우고 있는 사이, 홍규빈은 자료에 관한 브리핑을 간략하게 마쳤다.
이쯤에서 슬슬 작별 인사를 할 줄 알았는데, 홍규빈은 다시 말을 꺼냈다.
아마 이쪽이 연락을 한 본래 목적인 듯했다.
[홍규빈] 그래서 말인데, 의신아. 부탁할 게 있다.
홍규빈의 부탁?
TC 연구소 건에 관한 거라면 나보다 도원우나 천동하에게 말하는 게 나을 텐데.
물론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부담을 덜어 줄 수 있다면 내가 직접 나서겠지만.
[홍규빈] 2학년 0반 아이들이 준비하고 있다는 제갈재걸 선생님 화보집에 대해 들었어.
[홍규빈] 초대권 좀 구해 줄 수 있을까?
구질구질한 제갈재걸 처돌이에게는 축제 입장이 더 중요한가 보다.
홍규빈의 메시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홍규빈] 소장용으로도 필요하니까 가능한 많이…….
홍규빈은 입장용 티켓도 수집할 모양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