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시험의 결과 (10)
“큰일 났어요, 효돈이가 울고 있어요!”
“이마나 뺨으로 우는 사람은 없어. 저건 땀이야.”
“날이 이렇게 추운데요?”
기말고사 마지막 날을 앞둔 심야, 지익회관 스터디 룸.
수학 시험을 앞두고 맹효돈은 궁지에 몰렸다.
난방은 약하게 가동되는 중이고 맹효돈의 이능파 흐름은 정상인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나름 원리를 생각해 봤다.
맹효돈의 돌머리가 과부하로 인해 달구어져서 열이 올라가 수증기가 맺힌 게 아닐까?
“열은 없는데.”
“……뭐냐, 부반장.”
혹시나 해서 디바이스를 이용해 체온을 확인해 봤지만, 열은 없었다.
체온과 이능파 상태가 정상인 걸 보니 몸에 문제가 없으나 맹효돈의 긴장 상태를 해결할 답이 없었다.
‘기본 원리는 다 이해했고, 암기도 끝났어. 응용하는 연습도 충분히 했고. 침착하게 풀면 낙제는 면할 텐데.’
맹효돈이 왜 이렇게 고전을 하고 있는가 그 원인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머리를 식혀 땀 흘리는 돌멩이에서 사람이 된 맹효돈이 물었다.
“넌 수학 선택 안 했는데 왜 잘하냐?”
수능을 준비하는 아이들은 수학을 택하지 않아도 개인적으로 공부한다.
하지만 난 대학 생각을 안 하고 있으니 수능을 핑계로 대면 나중에 모순이 생길 거다.
여기에선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옛날에 배웠어.”
“옛날? 한 30년은 산 것처럼 말하네.”
우리 반의 5천 살 넘게 먹은 신화계 호족을 생각하면 30도 젊은 나이라고 생각하는데.
노친네는 나를 대놓고 어린아이 취급 하지 않았던가.
의심을 받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른 아이들은 내 말을 듣고 선행학습을 했다고 생각한 듯했다.
맹효돈은 여전히 뭔가 마음에 걸려 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맹효돈이 지금은 수학에 집중해 줬으면 좋겠다.
‘집중…… 수학 공부 중에도 필살기 생각을 하고 있나.’
플마고 속 맹효돈이 파생 스킬을 습득한 건 고3 때였다.
당시 맹효돈은 파이트 클럽에서 목숨을 걸고 쌓은 경험치와 감이 있었으나 몸 상태가 엉망이라 파생 스킬을 습득하기 까다로웠다.
지금은 그 경험치가 없긴 하지만 몸 상태는 그때보다 나아졌고, 맨손 격투의 달인 탁거산 도인이 스승으로 맹효돈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실전 경험, 정확히는 승리의 경험이 부족하면 파생 스킬을 얻기 어려울 거다.
‘힌트를 줄까.’
맹효돈은 타고난 싸움꾼이었으나 아직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다.
플마고 속에서는 엉망이 된 제 몸을 믿지 못했고, 이 세계에서는 아직 자신의 배움과 경험이 부족하다 여기고 있을 거다.
방윤섭은 한참 전에 도망친, 혹독한 훈련을 이겨 내고 탁거산의 극찬을 받아도 말이다.
‘수학 문제도 마찬가지일 거야.’
비록 맹효돈이 돌머리이긴 하나 한 학기 동안 모든 수업을 성실하게 들었고 나에게 1대1 과외도 받았다.
그 덕에 문제를 보고 풀이법을 떠올리는 건 곧잘 하지만 일단 한 번은 의심한다.
정말 이 방법이 맞는 건지, 자신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개념을 올바르게 적용한 건지 확신하지 못한다.
돌머리로 살아온 세월이 길어서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거다.
그러다 보니 알고 있는 문제는 틀리고 헷갈리는 문제는 손도 못 대고 찍게 되어 점수가 나락으로 향한다.
나는 맹효돈의 성향을 파악해 조언했다.
“문제를 풀 때, 풀이법을 바로 떠올리고도 망설이지 않아?”
“……내가 틀렸을 수도 있잖아.”
“공부를 제대로 안 했으면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데, 넌 아니잖아. 실수는 검산 과정에서 바로잡으면 돼.”
플레이리스트 마지막 회를 찍던 날에 벌어진 방송국 사건 때, 맹효돈은 제갈재걸이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맹효돈은 바로 제갈재걸을 붙잡지 못했다.
불길하긴 해도 자신의 감이 맞는지 바로 믿지 못해 행동을 망설였다.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망설이던 맹효돈은 탁거산 도인이 해 준 ‘싸움터에서는 네 감을 믿고 행동해라!’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결과, 맹효돈은 광림 ‘싸움꾼의 인력(引力)’으로 제갈재걸의 발을 묶어 그를 구했다.
“일단 네 생각과 감을 믿고 움직여.”
“부반장…….”
맹효돈은 돌머리로 내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속뜻까지 전부 알아내진 못했다.
그래도 문제를 읽은 후의 펜을 움직이는 속도가 조금 빨라지긴 했다.
부디 시험을 마친 후에도 내가 여기서 한 말이나 탁거산이 했던 조언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편, 우리 반의 또 다른 낙제생 후보 권레나는 무사히 취약 과목 시험과 실기 시험을 마친 상태였다.
초반에 약한 과목들의 시험을 연달아 치는 바람에 매우 지쳐 보였으나 마음은 편해 보였다.
“위험한 과목은 다 넘어갔으니까 괜찮을 거야…….”
“레나, 응원하겠습니다.”
목우람의 몰골을 본 기숙사생들은 순간 말을 잊었다.
목우람의 푸석푸석해진 얼굴 위로 시커먼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머리는 좀 이상해도 성적과 이능은 훌륭한 놈이니 시험 때문에 저러는 건 아닐 거다.
“우람아, 잠은 자고 공부하는 거야?”
“3일 정도 못 잤지만, 괜찮습니다.”
“시험 기간이 시작되고 계속 안 주무신 것 같은데요.”
“3일 전에 쪽잠을 잤습니다.”
시험 기간이다 보니 다소 피곤해 보여도 그러려니 했는데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설마 그 정도로 안 자고 미련하게 무언가를 할 줄은 몰랐다.
목우람은 필기시험 스터디 시간을 제외하면 계속 공방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밤에도 그랬나 보다.
목우람의 상태를 관찰하던 한이가 말했다.
“유리가 말했던 거 해 보자.”
한이의 제안에 권레나가 ‘아!’ 하고 밝은 얼굴을 했다.
권레나가 이능 바이올린 카드를 꺼내 들었다.
김유리가 무슨 제안을 했는지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우리 반의 반장답게 아이들의 특성을 잘 파악한 훌륭한 제안이었다.
“우람아, 자장가 연주해 줄게. 자!”
“아, 안 됩니다. 저는 아직 그걸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잠들 수 없습니다.”
그것?
목우람은 공방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던 건가.
목우람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백금색의 바이올린이 권레나의 손에 쥐어진 상태였다.
권레나는 자신의 공부를 봐주느라 고생한 목우람을 위해 반드시 재울 생각인 듯했다.
“아…….”
권레나가 활을 움직이자 저번에 소리가 나지 않은 게 거짓말처럼 바이올린이 노래했다.
권레나가 택한 곡은 슈베르트의 Wiegenlied 2번 D.498 (Op.98), 목우람 단 한 명을 위해 연주하는 자장가였다.
권레나를 뮤즈라고 칭하는 목우람이 마치 그를 걱정하는 것 같은 다정한 선율에 저항하는 건 불가능했다.
목우람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이올린 연주에 귀를 기울이다가 몇 소절 지나기가 무섭게 스르륵 하고 쓰러졌다.
3인용 소파 위로 누운 목우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호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절한 건지, 자는 건지 모르겠는데…….”
“행복해 보이니까 내버려 두죠! 제가 나중에 시험 치기 전에 깨울게요.”
먼저 제안한 한이가 걱정했지만, 사월세음이 밝게 대답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깨워 준다고 하니 믿고 맡기기로 했다.
그사이 권레나는 잠든 목우람에게 담요를 덮어 줬다.
* * *
기말고사를 마친 후, 우리는 자유가 되었다.
가채점을 해 보니 등교 중인 우리 반 아이들은 전원 생존하였다.
맹효돈이 찍었다고 한 문제가 몇 개 있어서 불안했는데, 어느 정도 문제를 푼 후에 답이 될 수 없는 선택지를 배제하고 고른 덕에 찍은 게 거의 다 맞았다.
‘내년에 또 수학을 택하면 고생할 텐데 괜찮을까.’
맹효돈은 무사히 낙제를 면한 후,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이었던 수학 선생님께 신나게 연락했다.
그 모습을 보니 또 수학을 고를 것 같아 걱정되었다.
걱정되는 건 또 있었다.
‘등교하지 않은 다른 애들은 괜찮을까.’
관종 두 명과 어둠의 다크니스 검객, 기타 등교 거부자들이 치른 시험의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0반 중에 낙제생이 나왔다는 소문이나 조짐이 없는 걸 보니 괜찮을 것 같긴 하다.
“기말고사 종료 기념 뒤풀이를 하고 싶은데 곧 축제라서 못 하겠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축제 준비하면서 보자!”
시험 준비로 너덜너덜한 상태가 된 아이들이 김유리의 제안에 동의했다.
우리 반 축제 출품작은 거의 마무리된 상태였지만, 아직 손봐야 할 부분이 남아 있었다.
‘축제가 끝나면 기말고사 몫까지 성대한 뒤풀이를 치러야지.’
축제가 끝나면 크리스마스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적어도 그 전에 아이들이 한번 마음 놓고 쉴 시간을 주고 싶다.
연말이라 레스토랑 예약이 어려울 테니 미리 해 두는 게 좋지 않을까?
머릿속에서 리스트를 정리하며 기숙사로 향할 때, 황지호가 불러 세웠다.
“조의신, 시험 치르느라 고생 많았다. 오늘은 저택에서 머무는 게 어떻겠나.”
황지호의 제안을 곧바로 거절하려다가 말을 멈췄다.
어쩐지 오늘은 나 외에도 호랑이 저택을 방문한 손님이 있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한반도에 돌아온 이들도 있으니 같이 보면 좋을 것 같군.”
용제건과 적호가 돌아왔나 보다.
* * *
1, 2학년의 기말고사가 끝난 밤.
학생회관과 선도부회관 사이의 지하, 비밀 통로 저편.
구형 이계 시뮬레이터로 구현된 이계 속, 성시완이 겨눈 스틸레토의 날이 옛 한국 지부장의 목젖 앞에서 멈췄다.
[훌륭하다.]
그렇게 말하는 옛 한국 지부장은 성시완의 권법에 회전근개가 파열되고, 내상을 입어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성국언과 똑같은 얼굴로 부상을 입고 저리 웃으니 기시감이 느껴졌다.
성국언은 공약을 지키기 위해 늘 부상을 달고 살았는데, 심하게 다쳐도 카메라 앞에서 저렇게 웃곤 했다.
성시완은 여전히 스틸레토를 거두지 않은 상태로 말했다.
“할아버지가 봐주신 것 같은데요.”
[봐주지는 않았다. 네게 필요한 만한 수준으로 조절했을 뿐이지.]
성시완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나 그의 할아버지는 전력을 다하지 않고 봐준 게 분명했다.
분하지만 지금 성시완의 수준으로 그를 이기는 건 불가능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봐줄 수 없을 만큼 실력을 키울 수밖에 없나.’
시험의 결과, 성시완은 합격했으나 아직 포기하지는 않았다.
성시완은 기회를 봐서 다시 재도전할 것을 다짐했다.
그 속을 읽은 것처럼 성시완의 할아버지가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웃었다.
시뮬레이션 종료로 처리되어 옛 한국 지부장의 부상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약속대로 네가 이겼으니 데이터를 넘기겠다.]
“데이터는 이담이가 이긴 후에 받을게요.”
[밖에서 기다리는 후배 말인가?]
팟!
옛 한국 지부장이 손짓하자 굳게 닫혀 있던 보스 룸의 문이 움직였다.
문이 열리자 계이담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시완이 형,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이제 이담이 차례야.”
성시완이 괜찮다고 말했는데도 계이담은 그의 컨디션을 꼼꼼히 체크한 후에야 옛 한국 지부장을 돌아봤다.
계이담은 옛 한국 지부장의 능력에 관한 설명을 들었을 때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던 게 있었다.
시험 범위에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계이담은 홀로 정신 쪽을 공격하는 이능을 연구하며 고민을 거듭했다.
“당신에게는 대상의 과거와 기억을 읽고 환상을 보여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마 대상의 정신력에 따라 읽을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을 겁니다.”
[…….]
계이담이 세운 가설이 맞는 건지 옛 한국 지부장은 무언으로 그를 바라봤다.
계이담은 각오를 굳혔지만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추악하고, 한심하고, 역겹고, 후회스러운 흔적을 누군가에게 여과 없이 보여 준다는 건 섬뜩하고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거대한 악의가 은광고를 노리고 있고, 그 결과 계이담이 아끼는 누군가를 잃을지도 모른다.
그 상실의 공포가 폭로에 대한 두려움보다 훨씬 컸다.
계이담의 음성에 섞인 쇳소리가 평소보다 무겁게 울렸다.
“제 기억을 분석해 주십시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