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시험의 결과 (11)
황명호 대저택, 은호의 별채.
현관 앞에 들어서니 천은하의 모습을 한 은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기말고사 고생 많으셨어요.”
딱히 고생이라 할 것도 없는데.
나는 물론이고 옆에 있는 노친네도 그렇다.
황지호는 조금도 고생하지 않고 전과목 40점 사수에 성공했다.
‘기말고사가 아니라 다른 일로 고생하고 있긴 하지만.’
은호는 내 속을 읽은 것처럼 생긋 웃고는 말했다.
“의신이 형은 반 아이들을 도우셨잖아요. 거기에다가 축제 준비에 크리스마스 대비, 또 말없이 혼자 안배하는 것들도 있을 테니 고생하셨죠.”
왜 말없이 한 걸 호랑이 저택 별채에만 있던 은호가 알고 있는 걸까.
은호의 말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아직 석차는 발표되지 않았지만, 보나 마나 주수혁과 안다인 다음이겠죠? 의신이 형은 계속 1등을 못 하고 있으니까요.”
“석차 중간 집계를 보니 그렇더군. 문제 오류 확인, 이의 제기, 성적 정정 절차가 남아 있긴 하지만 최상위권 등수는 변하지 않을 거다.”
황지호가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저 노친네는 계속 40점을 고수할 만큼 성적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왜 남의 등수는 저리 잘 아는 건가.
“그렇군요. 이번에도 그 두 사람의 뒤라…… 수석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건가요?”
“공청훤 선생님의 일반 에너미학 시험 난이도가 높았어. 범위가 넓고 문제가 어려워서 100점 맞기 힘들어.”
나는 무난하게 사실을 기반으로 답했다.
공청훤의 에너미학 관련 과목은 광활한 시험 범위와 사악한 난이도를 자랑한다.
공청훤의 시험 범위는 배운 데에서 안 배운 곳까지, 즉, 수업과 과제 모든 순간이 범위에 들어간다.
기말고사 때에는 당연한 듯이 중간고사 때 배운 것, 심지어 수업 전 단계의 기초 과목까지 포함되니 난이도는 저세상 수준이었다.
선량한 공청훤의 겉모습에 낚여 수강 신청한 학생들이 차례로 탈주하여 남은 건 한이 같은 강자들뿐이었다.
‘그만큼 배워 갈 게 많지만, 점수를 얻기는 힘들지.’
보통 수업을 빠지면 진도만 확인해 혼자 책으로 공부하지만, 공청훤의 강의만큼은 특별히 녹화된 강의 영상을 본다.
가능하면 앞으로도 공청훤의 모든 수업을 듣고 싶을 정도다.
“조의신이 일반 에너미학에서 만점을 받으면 1학년에서 공동 수석이 세 명 나왔을 텐데, 아쉽게 됐군.”
“의신이 형은 조금도 아쉬워 보이지 않네요.”
은광고 1학년에는 불세출의 천재들, 주수혁과 안다인이 있는데 어떻게 내가 1등을 하겠는가.
자칫하다간 내가 공동 수석 자리까진 오를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1학년 수석 타이틀은 두 사람에게 잘 어울렸다.
“계속 저 자리에 만족할 모양이군.”
“지금 성적도 나쁘지 않지만, 예전에는 항상 수석만 하는 걸 봐서 어색하네요.”
“오, 그 세계에서는 조의신이 수석이었나?”
은호와 황지호가 쓸데없는 주제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내 성적이 아니라 시험 기간 내내 용궁에 있던 용제건, 적호와 이야기하러 온 게 아니었나?
두 호랑이가 이미 다 지난 과거를 갖고 뭐라 대화를 하긴 했으나 흘려들으며 응접실로 향했다.
‘용제건이 아직 안 왔나 보네.’
응접실에는 백호군과 적호가 있었다.
백호군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인사했다.
말 많은 두 호랑이를 보다가 과묵한 백호군을 보니 마음속에 평화가 돌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사히 귀환해서 다행이다.”
그렇게 많이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지만, 적호가 한반도를 장기간 떠난 적은 거의 없을 테니 오랜만이라고 느꼈나 보다.
황지호는 적호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김신록이 없어서 그런지 적호는 평소보다 무뚝뚝하게 반응했다.
“용제건은 아직 안 왔나? 청룡을 보러 간 건가.”
“오랜만에 한반도를 길게 비웠으니까요. 용족분들은 사이가 좋으니 청룡의 수경(水鏡)을 통해서 이야기한 것만으로는 부족하겠죠. 곧 오실 거예요.”
용제건은 붉은 사자 팀 빌딩에 들렀다가 오려나 보다.
염준열도 아침에 보내는 메시지로 용제건이 없어서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곤 했다.
‘용제건이 유희계 용이라 꺼림칙하게 여기긴 해도 다들 친하게 지내는구나.’
생각이 짧았다.
귀국 당일에 바로 보고하러 오라고 하지 말고 그냥 오랜만에 용족끼리 회포를 풀게 하루 여유를 둘걸.
후회하고 있을 때, 은호가 찻잔을 내밀며 말했다.
“의신이 형, 여의보주는 이 저택에 있는 이들도 보고 싶었을 테니 심려하지 마세요.”
과연 용제건이 호랑이들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나의 천사 올무나 김신록이라면 모를까.
올무는 안타깝게도 지금 은호의 후예들과 놀고 있고, 김신록은 기말고사 결과를 정리 중이라 바쁘다.
그런데 은호는 용제건을 여의보주라고 부르는 건가.
용제건이 제호에서 이름을 따온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그냥 입버릇이 굳어져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나 왔어.”
잠시 기다리니 용제건이 별채에 왔다.
용제건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빈손으로 오기 그래서 선물 가져 왔어. 여행 다녀온 기념품이야, 자.”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군.”
“이런 짓을 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야.”
황지호가 찝찝해하면서도 선물을 받아 들었다.
선물은 손바닥 위에 올라갈 만한 작은 상자였다.
잘 포장된 상자를 관찰하던 황지호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상당히 좋은 선물인가 보다.
용제건은 내 몫의 선물도 건넸다.
“자, 이건 의신이 선물. 지금 바로 여기에서 확인해도 돼.”
“감사합니다.”
“의신이는 예의가 발라서 선물을 줄 맛이 나네. 황호 씨나 은호 씨가 경계하는 것도 재밌고. 선물 자주 챙겨야겠다.”
“선물 줄 구실을 없애야겠군.”
용제건은 선물이 필요 없다고 돌려 말하는 황지호의 말을 듣고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황지호가 어떻게 구실을 없앨지 기대되나 보다.
‘용제건의 용궁 기념품이라…… 설마 비늘 같은 건 아니겠지.’
이미 나한테는 용왕신이 예전에 건넨 비늘이 있다.
용제건이 가지고 있는 ‘용왕신의 비늘’ 아이템과 달리 내 것은 구슬 안에 봉해진 상태라 그 힘을 자유자재로 쓸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게 신의 일부임에는 틀림없었고, 그 자체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상자 안을 자세히 살피니, 이능파가 옅게 감지되었다.
‘용제건의 이능파가 아닌 것 같은데…… 뭐지?’
용제건이 선물을 줄 때 바로 확인해 봐도 된다고 했으니, 안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스킬 ‘안광’이 발동했습니다.〉
이능파가 안구를 감싸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선명하게 변했다.
안광이 발동한 눈으로 상자를 응시하자 이능파의 형태가 똑똑히 보였다.
상자 안에는 황금빛의 작은 구체가 들어 있었다.
‘황금색이긴 하지만 황지호의 이능파와는 달라. 좀 더 모래빛에 가까운 느낌인데…….’
추리를 하는 사이, 용제건이 황지호와 벌이던 묘한 기 싸움을 마쳤다.
용제건은 내가 안광을 사용하는 것을 흥미진진하게 관찰하다가 선물에 관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황룡이 취미로 키우는 진주야. 선물 될 만한 걸 달라고 하니까 주더라.”
이 이능파의 정체는 황룡의 것이었나?
그런데 황룡이 직접 용궁에서 키운 진주라니!
시중에 이런 진주가 판매되는 걸 본 적이 없으니 이 진주는 아마 용족이나 용족과 가까운 이들에게만 주는 선물일 거다.
자세한 건 직접 아이템을 살펴봐야 알겠지만, 최소 SR+급 이상의 아이템으로 예상되었다.
황룡이 공을 들였다면 가뿐히 SSR급도 될 거다.
“용족의 은인에게 줄 선물이라고 하니까 황룡이 의신이 거는 특별히 흑진주로 챙겨 주더라.”
……흑진주라고?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지금 내 손에 있는 황룡의 흑진주는 SSR급 이상의 아이템이다.
갑자기 용제건이 이런 아이템을 안겨 주니 머리가 아파졌다.
지금이라도 거절해야 하나 싶었다.
“용족이 의신이 형에게 진 빚과 은혜는 보석 한 알에 비할 수 없죠. 그냥 이건 여행 선물이라고 생각할게요.”
내가 거절하기 전에 은호가 선수를 쳤다.
게다가 ‘고작 흑진주 하나로 은혜를 퉁치려 하지 마라.’라는 속뜻까지 담은 말을 했다.
마치 흑진주 말고도 더 뭔가를 줘야 한다는 말투였다.
“물론이야. 이건 여행 선물이라고 했잖아? 의신이가 원한다면 용궁의 기둥도 하나 뽑아 줄게. 기둥 하나 정도면 무너지기 전에 황룡이 어떻게 해 주겠지.”
용궁의 기둥 따위는 진심으로 필요 없었다.
당장 기둥을 뽑아 올 기세인 용제건을 저지했다.
“필요 없어요.”
“그래? 아쉽네. 그럼 용궁의 기둥 대신 흑진주는 받아 줘.”
정신 차리고 보니 황룡의 흑진주는 내 것이 되어 있었다.
수습을 하기 전에 황지호가 재빠르게 화제를 바꿔 버렸다.
“그럼 용궁에서 있었던 일을 듣지. 적호, 먼저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용궁에 있던 일에 관해서 보고가 시작되었다.
이제 와서 눈치 없게 적호의 말을 끊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적호와 용제건이 보고를 마칠 때까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차나 마셨다.
은호가 중간중간에 웃으면서 차를 내밀 때마다 호랑이들과 용한테 당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중요한 건 용궁에서 있던 일을 듣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야기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용궁에서 용제건과 적호를 맞이한 구성원, 깊은 곳에서 만날 수 없던 용왕신 등등 놓칠 수 없는 정보가 많았다.
둘이 하는 이야기에는 플마고나 설정집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요소들이 섞여 있었다.
“용궁의 구조를 기억하는 대로 지도로 그려 왔습니다.”
적호가 디바이스를 조작하자 용궁의 지도가 허공에 떠올랐다.
입체 미로를 보는 것 같은 복잡한 구조였다.
용궁의 규모에 감탄하고 있을 때, 용제건이 덧붙였다.
“황룡은 용궁의 구조를 조작할 수 있어. 구조가 바뀔 가능성이 있지. 외부자인 적호 씨가 방문했으니 반드시 재구성할 거야.”
“새로 방의 개수를 늘리거나 복도의 길이를 조작하는 것도 가능한가?”
“황룡의 힘만으로는 안 돼. 용궁의 구조가 아닌 규모를 바꾸려면 용왕신의 힘이 필요해.”
“그러면 이 지도는 일종의 퍼즐 조각이라고 생각해야겠군요.”
이 지도는 언제, 어디든 재조립될 수 있는 퍼즐 조각인 셈이다.
그래도 그 조각의 모양과 크기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머릿속에 구조를 넣고 있을 때, 적호가 말했다.
“용제건, 왜 그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까?”
“……어떤 이야기 말하는 거야?”
“황룡이 말했던 당신의 눈 말입니다.”
적호는 용궁에 다녀온 후부터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들을 오랫동안 못 봐서 그런가 싶었는데 지금 모습을 보니 용제건도 그 원인 중 하나였나 보다.
적호는 당장이라도 말할 기세였다.
그때, 용제건이 응접실 문밖을 보며 적호를 말리려 했다.
“잠깐, 적호 씨…….”
곧 나도 기척을 감지했다.
누군가가 응접실 안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적호는 용제건의 만류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황룡은 용제건이 여의보주로서 기적을 몇 번 더 발휘하면 신격을 감추지 못할 거라 했습니다. 곧 용제건은 상위 존재가 될지도 모릅니다.”
스르륵.
적호가 말을 하는 사이에 자동문이 열렸다.
그러나 문이 완전히 열린 후에도 김신록은 한참 멈춰 서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