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양자택일 (5)
학교 축제는 학생들이 그간 얻은 성과를 발표하고, 함께 즐기는 행사다.
함근형 선생님의 말에 의해 1학년 0반의 축제 기획물은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
올해 우리 반 아이들이 겪은 사건 중, 가장 많은 인원이 참가하여 즐기고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사건은 독고미로의 플레이리스트 데스 매치였다.
유명 스트리머 플레이어를 상대로 영상 조회수 대결을 펼쳐야 했던 독고미로는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반 아이들이 준비한 무대 위에서 본실력을 발휘한 결과, 데스매치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살아남았다.
당시 출석 중이던 열한 명이 힘을 모은 성과였다.
우리 반은 그 무대를 이번 축제에 재현하기로 했다.
당시 반주를 맡은 건 바이올린을 연주한 권레나, 피아노를 친 목우람 두 사람이었으나 축제용으로 편곡한 커버 버전에는 반 아이들의 연주가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캐스터네츠랑 트라이앵글 중에 고르라니…….’
나는 음악 수업 시간에 배운 악기들을 다룰 수 있다.
내가 다룰 수 있는 악기 종류를 말하니 목우람이 리코더를 맡아 달라고 했으나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내가 리코더를 불 때마다 황지호가 처웃으면서 과외를 시켜 주겠다는 둥 헛소리를 해서 기를 쓰고 연습해 그럭저럭 들어 줄 만한 수준이 되긴 했다.
그러나 악보대로 불어도 어째 반 아이들이 하는 연주와 잘 섞이지 않았다.
‘그래도 녹음이 무사히 마무리되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축제에서 배포할 음원과 영상 제작을 위해 반 아이들은 담당한 파트별로 녹음을 진행했다.
김유리가 리코더가 아닌 다른 악기 이름을 대는 걸 보니 녹음한 결과물이 좋지 않았나 보다.
편곡 건을 두고 가장 고생한 목우람이 말을 이었다.
“영상 제작용으로 녹음한 파일을 들었습니다. 리코더는 무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부반장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이라도 후보로 꼽았던 다른 악기로 바꾸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목우람이 편곡을 마친 후, 작곡 프로그램으로 연주한 곡은 괜찮았는데.
목우람이 좋게 돌려서 말하긴 했으나 리코더가 아니라 내 연주가 문제인 듯했다.
믹싱 과정에서 소리 보정을 하면 들을 만해질지도 모르지만, 라이브는 불가능할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었다.
가뜩이나 온갖 개성적인 악기들을 모아 편곡하느라 고생한 목우람을 더 고생시키는 게 미안했다.
‘리코더를 불 때 호흡 조절이 어려웠지. 타악기면 좀 수월할 거야.’
다행히 후보로 제시된 두 개 다 타악기였다.
합주에 어울리는 캐스터네츠는 패들 캐스터네츠, 머신 캐스터네츠인데 이걸 다루는 법을 익히려면 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까?
고민 끝에 결정했다.
“그럼 트라이앵글로 할게.”
“부반장, 악보를 새로 드리겠습니다. 한이와 맞춰 보시겠습니까?”
목우람이 긴장이 풀린 얼굴로 악보를 내밀었다.
트라이앵글은 한이가 담당한 베이스 드럼과 파트가 겹치나 보다.
한이는 수능 응원장에서 사관학교 애들이 다루던 게 인상 깊었는지, 베이스 드럼을 택했다.
―사관학교 아이들이 베이스 드럼을 칠 때마다 진동이 잘 느껴졌어. 그래서 어쩌면 나도 다룰 수 있을 것 같았어.
한이는 비록 들을 수는 없지만, 진동을 통해 소리를 감지하고 함께 합주했다.
그래미 상을 두 번 수상한 청각 장애인 퍼커셔니스트는 맨발로 무대에 서서 몸으로 소리를 느끼며 연주한다고 한다.
한이도 귀가 아닌 몸으로 소리를 듣기 위해 피부로 느껴지는 진동에 정신을 집중해 연주에 임했다.
한이는 내 트라이앵글 연주에도 금방 맞춰 줄 정도로 연주 실력이 뛰어났다.
“내 친우는 옛날부터 박자 감각이 탁월했지.”
내가 트라이앵글을 두드릴 때마다 처웃는 걸 참느라 큭큭거리던 노친네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듣는 것을 좋아했다던 청호는 연주도 곧잘 했나 보다.
황지호가 기묘한 소리를 했으나 노친네가 한이를 두고 죽마고우니 뭐니 하며 어그로를 끄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므로 아무도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연주가 안 되면 같이 코러스 해도 괜찮을 텐데.”
“부반장은 독고미로랑 목소리 합이 안 좋다. 안 돼.”
코러스를 맡은 민그린이 제안했으나 송대석이 즉각 막았다.
두 사람은 이번에 함께 코러스를 담당했는데, 둘 호흡이 척척 맞아 누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저는 의신이의 리코더 연주가 좋아요! 가끔 리코더의 음색이 예측하지 못하게 바뀌는 것도 신기하잖아요.”
“확인 사살 하는 거냐?”
줄 뭉치를 감고 풀며 명주실의 장력을 조절하고 돌괘를 돌리며 가야금을 조율하느라 바빴던 사월세음이 말했다.
사월세음은 순수한 마음으로 칭찬한 거지만, 맹효돈의 말대로 확인 사살 한 꼴이 되었다.
맹효돈은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없다 해서 청소년 수련회에서 한 번 쳐 본 사물북을 잡았다.
맹효돈은 악보를 이해한 다음에 연주를 따라가는 걸 포기하고 장구를 연주하는 김유리의 손 움직임만을 보고 거기에 맞춰서 북채를 휘둘렀는데, 결과물이 상당히 괜찮았다.
“의신이가 저번에 부쇠하지 않았어? 지호랑 같이 꽹과리 치는 건 어때?”
“하하하! 내가 제안해 봤는데 조의신이 거절하더군.”
반별 체험 활동을 할 때 상쇠 황지호에게 맞추느라 개고생을 한 게 떠올랐다.
게다가 반별 체험 활동에서 꽹과리로 연주한 곡은 음악 수행평가 때 다룬 경험이 있어 그럭저럭 연주한 거다.
목우람이 편곡한 버전에서 황지호 수준으로 연주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럼 한번 맞춰 보자!”
마이크를 쥔 독고미로의 밝은 목소리에 연습이 시작되었다.
* * *
축제 대비 연습을 마치고 쉬는 시간.
디바이스 메시지를 확인하던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안다인이 시험 기간 내내 도서관에 가지 않아 주수혁과 마주치지 않았다고 한다.
[문새론] 0반 부반장님, 이런 사태를 내버려 둘 거임? 아니지?
[문새론] 수상한 대책 마련이 시급함요.
타이틀 히어로와 히로인을 위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한 부탁이니 당연히 들어줘야 했다.
문새론이 말하는 수상한 대책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책이 필요한 건 분명했다.
계획을 세우고 다음 메시지를 읽었다.
염준열이 오늘의 날씨 소식, 안부 인사에 덧붙여 용건을 전했다.
[염준열] 의신아, 축제 때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을까?
염준열은 제자로서도 메시지를 따로 보냈다.
[염준열] 스승님, 축제 때 소개해 드리고 싶은 분이 있어요.
저번에 소개 못 한 방랑벽이 있는 용 말하는 건가?
방랑벽이 있으니 이미 한반도를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머물고 있었나 보다.
‘이번 축제 때 만나야 할 이들이 많네.’
디바이스에 저장된 축제 일정표가 메모로 가득했다.
일정이 꼬이면 약속을 몇 개 놓칠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일단 가겠다고 답하자 염준열이 크게 기뻐했다.
[염준열] 그럼 초대장이랑 우대권 보낼게. 우리 반으로 놀러 와.
염준열은 축제 때 뭘 준비했을까 기대하면서 메시지 창을 닫았다.
그때,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교실 밖 복도에 사람이 몰리고 있었다.
“1학년 1반이 드디어 움직인다!”
“용쌤도 도망갈 생각이 없나 봐.”
1학년 1반과 용제건.
그들이 김신록 선생님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는 건 은광고 사람들이 다 알았다.
말이 신경전이지 사실상 용제건이 아이들을 가지고 놀았으므로 은광고인들은 그저 그의 유희거리가 늘어난 것 정도로 취급했다.
그러나 1학년 1반에는 신탄의 사수 안다인이 있었으니 이대로 무너질 리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용제건 선생님.”
“안녕, 다인아.”
1학년 1반 아이들 앞에 안다인이 서 있었다.
1반 아이들의 눈은 마치 불꽃을 머금은 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속에 섞여 양념 떡갈비 핫바를 먹고 있는 유상훈 혼자 평화로웠다.
정중하게 인사한 안다인이 입을 열었다.
“축제 때 저희 반은 이벤트를 진행할 예정이에요. 부디 용제건 선생님이 참가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셨으면 해요.”
안다인은 뭐 하나 흠잡을 것 없는 태도로 말했다.
용제건은 가늘게 뜬 실눈 사이로 안다인을 응시했다.
저 광경을 보니 용제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왕이면 정체를 밝히고 제자들하고 잘 지냈으면 좋겠어. 그중에서는 성국언처럼 진족과 겨룰 만큼 강한 인간도 있으니 만약의 일이 생기면 든든한 방패가 되어 주겠지.
용제건이 말한 김신록의 제자 중 진족과 겨룰 만큼 강한 인간에는 분명 안다인도 포함되어 있을 거다.
강하고 총명하고 재능이 넘치는 데다 용제건에게 대항할 정도로 김신록을 따르는 제자.
안다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용제건은 저 태도가 아주 기꺼울 거다.
용제건은 기쁨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김신록 선생님네 반 아이들이 준비한 이벤트인데, 꼭 참가할게.”
“감사합니다.”
안다인의 싸늘했던 얼굴에 한순간 봄바람이 부는 것 같은 미소가 스쳤다.
보는 사람들이 녹아 버릴 것 같은 따스한 미소였으나 눈에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머물러 있었다.
마치 표적 너머를 볼 때 하는 눈이었다.
“…….”
한편, 주수혁이 뒤늦게 등장해 이 장면을 목격했다.
주수혁은 앞뒤 상황은 잘 모르는 듯하나 마지막에 안다인이 지은 미소가 잊히지 않는 듯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러고 있을 시간에 안다인한테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면 좋을 텐데.
이번 시험 때 안다인과 한 번도 같이 공부하지 못하고, 요새 나누는 대화도 없다 보니 말을 걸 타이밍을 못 잡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단순히 생각하면 지금 안다인은 1학년 1반 아이들과 작전 회의를 하기 바쁘니 배려해 준 것일 가능성도 있다.
나는 최대한 좋게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다인이가 진짜 마음을 굳게 먹은 것 같아.”
이 상황을 구경하던 김유리가 감탄했다.
김유리는 오랜 친구 안다인의 각오를 절절히 느낀 모양이다.
“그래도 용쌤은 우리 반 부담임 선생님인데…… 도와야 할까?”
“용제건 선생님은 저 이벤트를 홀로 즐기고 싶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 그건 그렇지. 용쌤을 방해할 뻔했네.”
권레나가 용제건을 걱정했으나 이어진 목우람의 말에 바로 동의했다.
“시간 맞으면 구경하러 갈까요? 축제 때 맛있는 거 많이 판다니까 간식 먹으면서 다 같이 관전하고 싶네요.”
“2반 애들이 파는 빵 사 가자.”
“음료 파는 곳 리스트를 뽑아 왔는데…… 달달한 음료 위주지만.”
어느 사이엔가 우리 반 아이들의 단체 관전이 결정되었다.
용제건을 걱정하던 순간이 짧게나마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축제 일정표에 나온 배치도를 보면서 먹거리를 고르기 바빴다.
하긴 상위 존재에 가까운 용제건의 안전을 걱정하는 것보다 성장기 청소년의 간식을 고르는 게 더 건설적이긴 하다.
나도 아이들 사이에 섞여 함께 맛집을 고르는 데에 동참했다.
‘그런데 용제건은 어떤 이벤트인지 듣지도 않고 수락했네.’
모르는 쪽이 재밌다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이벤트의 내용에 관해 이미 다 알고 있어서 저러는 걸까.
어느 쪽이든 용제건이 1학년 1반의 도발에 응해 축제 때 결전을 치르리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은광고 축제가 시작되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