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은광고 축제 (1)
플마고 속 은광고 축제 날은 맑아도 을씨년스러웠는데, 지금은 그저 화창하다.
날씨와 날짜는 플마고와 다를 바가 없는데 그동안 일어난 사건들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인원수가 달라서 그런 걸까.
거주 구역을 나설 때부터 들뜬 분위기가 느껴졌다.
‘우리 반에서 만든 영상이다.’
서둘러 교실로 향하고 있을 때,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이 홀로그램으로 우리 반 아이들이 만든 영상을 보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얼마 전 공개된 1학년 0반 라이브 예고 영상으로, 동영상 공유 웹사이트에 업로드한 후 학교 홈페이지에도 홍보한 상태였다.
올린 직후에는 그리 조회수가 오르지 않았는데, 입소문을 탄 건지 새로 고침 할 때마다 조회수 앞자리가 달라졌다.
‘……영상 일부가 수정된 것 같은데.’
1학년 0반 라이브 예고 영상 30초 버전.
영상의 시작은 독고미로가 데스 매치를 앞두고 은광고 정문 앞에서 버스킹하던 모습으로 시작된다.
버스킹 영상이 짧게 흐르다 페이드아웃된 후, 독고미로 혼자 무대에 서 있는 모습으로 전환된다.
그 후, 카메라가 무대 옆을 비추고 조명이 환해지며 반 아이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바이올린을 든 권레나, 피아노 앞에 앉은 목우람, 둘을 시작으로 각자 담당한 악기를 든 아이들이 비추어졌다.
‘아이들의 이능파 색깔에 맞춰서 특수 효과를 입혔네…… 어?’
영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현재 등교 중이고 축제 연습에 참가한 11명만이 아니었다.
영상 끝부분에는 작게 합성해서 들어간 구슬비와 옹길동도 있었다.
구슬비는 조금 어설픈 자세로 콘트라베이스를 들고 있었고, 옹길동은 능숙하게 비올라를 들고 있었다.
‘옹길동은 비올라를 연주할 수 있나? 자세를 보니까 속성으로 익힌 건 아닌데…… 구슬비는 막 배운 것 같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관종이 악기 하나 정도 다룰 수 있어도 이상하지 않긴 했다.
교실로 가니 일찍 도착한 김유리가 영상에 관해 설명했다.
“얘들아! 오늘 업로드된 영상 봤어? 미리 말해 주고 싶었는데 루이스랑 슬비가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다고 비밀로 해 달라 해서.”
관종들의 계책이었구나.
우리를 놀라게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축제를 나름의 방식으로 즐겨 주는 건 기쁜 일이다.
“걔들도 오늘 라이브에 와?”
“아니, 못 오는 대신 홀로그램 영상을 보냈어. 합성해서 써 달래.”
그래도 못 오는구나.
아직 어둠의 다크니스 검객과의 삼세판 승부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시험공부도 시켜 주는 믿음직한 무림인들이 곁에 있는 것 같으니 걱정은 안 하기로 했다.
“사실 나 말고도 편곡을 담당한 우람이랑 영상 작업한 대석이는 사전에 알았지만…….”
우리 반 음악 감독은 목우람이지만, 영상 편집은 송대석이 맡았다.
송대석이 편집한 영상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자막이나 특수효과는 협회 공익 광고 느낌이 났다.
그나마 영상미가 느껴지는 건 중간에 민그린이 조언해 줘서 그런 걸 거다.
민그린은 한국화, 동양화로 유명하지만 사실 유화 솜씨도 뛰어난 데다가 그래픽 디자인 프로그램도 다룰 줄 안다.
민그린의 한국화가 널리 인정받는 건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며 얻은 영감과 통찰력 덕일지도 모르겠다.
“영상 편집 도왔으니까 라이브 할 때 말고는 자리 비운다.”
“저도 공방에서 할 일이 있어서…….”
“응! 고생 많았어, 대석아, 우람아.”
송대석은 플레이어 협회 쪽 일 때문이겠지만 목우람은 공방에 틀어박힐 예정인 듯했다.
이 좋은 축제 날까지 일하는 둘을 보니 착잡했다.
“의신아, 두 분 걱정은 안 해도 돼요. 대석이는 그린이 작품이 나오는 합동전에 갈 거고, 우람이가 현악부 발표회를 놓칠 리가 없으니까요!”
“그건 당연한 거고.”
“맞습니다.”
사월세음의 말대로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다.
저 두 놈은 나름의 방식으로 축제를 즐길 예정인가 보다.
동아리, 외부 활동으로 바쁜 아이들을 제외하고 축제 준비를 진행했다.
준비라고 해 봐야 사전 촬영을 마친 우리 반은 교실 정비, 동선을 고려한 홀로그램 재생기 설치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우리 반의 축제 기획품은 크게 두 개.
하나는 동아리, 학급 발표회에 맞춘 라이브 공연과 다른 하나는 교실에 설치한 홀로그램 재생기를 통한 녹화 공연 상영회였다.
‘처음 나온 의견은 재즈 카페나 라이브 카페였는데…… 다들 바빠서 어쩔 수 없지.’
아이들의 일정상 계속 공연을 하고, 카페를 운영하는 건 어렵다.
그래서 영화 상영처럼 시간을 정해 녹화 공연을 틀어 주는 방식으로 상영회를 운영하기로 했다.
상영회는 필요한 인원수가 줄어드니 관리가 수월했다.
그때, 교가가 울려 퍼졌다.
올해 권제인의 명예 교사 부임으로 수업종 음원 인기가 폭발하여 재생횟수 상위권을 차지한 현악부가 연주하는 교가였다.
“곧 시작하나 봐!”
“이제 초대객들이 입장할 거야……!”
은광고의 축제 개회식은 간단하게 진행된다.
폐회식에 힘을 주는 만큼 개회는 학생들이 연주하는 교가 그리고 이사장의 개회 선언이 끝이다.
교가가 끝나자 황명호의 목소리가 은광고 전체에 울려 퍼졌다.
[지금부터 은광고 축제를 시작합니다.]
퍼퍼펑!
황명호의 짧은 축제 개회 선언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은광고 전역에 폭죽이 터졌다.
날이 워낙 화창해 불꽃이 눈에 잘 띄지 않을 법도 한데, 돈을 아끼지 않은 덕에 파란 하늘을 수놓는 빛들이 아주 눈에 잘 들어왔다.
와아아아!
불꽃이 터지자 은광고 교내 전체에서, 문 앞에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던 초대객들의 환성이 울려 퍼졌다.
안전의 문제로 은광고의 축제는 상당히 폐쇄적으로 진행되지만, 학교 규모와 인지도로 인해 관람객 수가 결코 적지는 않다.
은광고의 학생 수는 약 1500명, 교사진은 약 500명으로 도합 2천에 가까운 은광인이 있다.
그 2천 명의 은광인들이 다섯 명만 초대해도 만 명이다.
학교나 자치 기구에서 초대하는 단체 초대객이 있는 걸 고려하면 숫자는 더 커진다.
그 덕에 안전 관리에 애를 먹는 것 같지만, 그 점은 사전에 초대객들을 조사한 호족이 알아서 했을 거라 믿는다.
“긴장되네요. 많이 보러 오면 좋겠어요!”
1차 상영 때 교실을 지키기로 한 건 다섯 명이었다.
나, 황지호, 사월세음, 김유리 그리고 독고미로.
이 중 가장 긴장한 건 독고미로였다.
“…….”
“미로야, 아침 먹고 왔어? 아까 지호가 가져온 간식 안 먹던 거 같은데.”
“……응? 아, 괜찮아.”
보아하니 독고미로는 오늘 아무것도 먹지 못할 정도로 불안한 듯했다.
독고미로는 축제 때 처음으로 축제 기획물로 상영회를 열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가장 망설였다.
사람이 모이는 게 보장된 발표회에서의 라이브 공연이면 모를까, 자진해서 보러 와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 상영회는 자신이 없었나 보다.
‘반 아이들이 다 함께 만든 무대지만, 무대의 중심에 서는 건 결국 노래를 부르는 독고미로니까 부담감을 느끼겠지.’
입장하는 시간을 고려해 우리 반의 상영회 시작 시각은 축제 개회 30분 후.
독고미로는 김유리의 말에 제대로 답변을 못 하면서 집중하지 못했다.
입장이 어느 정도 진행되자 1학년 건물에도 초대객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1학년 0반을 흘끗 보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2반으로 향했다.
베이커리 카페에서 나는 향긋한 빵 냄새와 1학년 2반의 간판 주수혁에게 이끌린 듯했다.
그때, 드디어 첫 관객들이 입장했다.
첫 관객들의 얼굴을 본 일반 초대객들의 경악한 목소리가 들렸다.
“푸른 바이올리니스트 권제인이다!”
“옆에 있는 금발 외국인은…… 영원의 호수 팀 서브 마스터 재러드 리잖아.”
“뒤에 있는 할아버지들은 누구지……?”
“홍경복 화백 아닌가? 탁거산 달인도 있어!”
첫 관객은 제자들의 공연을 보러 온 명예 교사들이었다.
담당하는 동아리가 있는 이들도 있어서 이른 공연을 보러 온 듯했다.
하필 제자들이 부재중인 탓인지, 명예 교사들이 다 내 쪽으로 왔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내 쪽으로 몰렸다.
“못 본 사이에 키가 더 큰 것 같구만.”
“여기 부반장은 여전히 예의가 바르네. 쯔쯧, 못난 빵셔틀도 좀 배워야 할 텐데!”
홍경복과 탁거산은 허허 웃으며 덕담 비슷한 말을 건넸다.
두 사람은 덕담에 이어서 뭐 좀 먹고 하라고 건강 음료 세트를 아이들 수만큼 건넸다.
“레나를 놀래켜 주려고 왔는데, 시간이 안 맞았네…… 다음에 또 와야겠어.”
“한 시간 덜 자면 스케줄 조정이 가능해. 어제 못 잤지만, 레나 양의 공연을 보기 위해선 못 할 게 없지. 좋은 자리로 안내해 줘, 의신 군.”
영원의 호수는 한창 바쁠 때인데 공연은 전부 볼 거 같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하곤 영원의 호수 전속 팀 셰프가 만들었다는 블루베리 파운드 케이크를 몇 상자를 선물로 줬다.
유명한 플레이어들에게서 선물을 받아 들 때마다 주위의 시선이 따가워진 기분이 들었다.
‘설마 다들 올 때마다 선물을 건넬 생각인 건 아니겠지?’
유명 인사들의 방문으로 초대객들이 1학년 0반을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거물이 또 등장했다.
거물의 등장으로 먼저 도착해 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이 일제히 기립했다.
“무쇠팔 송만석 선배님을 뵙습니다.”
“만석이 자네 왔구먼.”
“만석이 형님, 어서 오십시오.”
송대석의 할아버지, 송만석.
일반인들 사이에선 옛사람, 잊힌 존재였지만 플레이어계에서는 살아 있는 전설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전설이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걸 본 주위의 경악은 더 깊어졌다.
‘마치 산이 움직이는 것 같다.’
송만석은 힘이 옛날 같지 않다고 해서 은퇴했다고 하는데, 느껴지는 기백이 보통이 아니었다.
혼자 전설을 쓰던 젊은 시절에 비해 떨어지지만, 현대의 어지간한 최상위 플레이어보다 송만석이 낫지 않을까?
송만석은 인사를 마친 후, 우리 반 아이들 쪽에 왔다.
“대석이 친구들이구나. 대석이가 못난 구석이 많아서 어울리기 힘들 텐데, 늘 고맙고 미안하구나.”
송만석은 송대석의 추한 구석을 잘 아는 모양이다.
송대석은 여전히 민그린과 위성 외에는 관심이 없지만, 우리 반은 예외였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반 행사에 참가하고, 여차하면 안면을 트지도 않은 반 아이들을 위해 몸을 던지는 송대석을 떠올리며 말했다.
“늘 송대석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번에 송대석이 홍보 영상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송만석이 내 쪽을 봤다.
이 세계에 오자마자 환몽 경매를 부수기 위해 대영웅 무쇠팔의 힘을 빌리긴 했으나, 이렇게 대면하고 이야기할 기회는 그리 없어 여전히 송만석은 낯선 상대였다.
송만석은 나를 보자 빙긋 웃었다.
“네가 그 부반장이구나. 네 덕분에 대석이가 협회 연구원이 되었다고 들었다.”
부반장인 건 맞는데, 뒤에 이어진 말은 전혀 아니었다.
송대석이 중간에 말을 이상하게 한 걸까?
송대석이 협회에 들어간 건 그의 능력이 인정받아서였지, 내 덕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 때문에 인턴 면접에 가지 못할 뻔하지 않았나.
열심히 부정했지만, 송만석의 웃음만 깊어질 뿐이었다.
“겸손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송만석은 격려하듯 내 어깨를 툭툭 쳐 줬다.
송만석은 아몬드 전병 세트를 선물로 남기고는 자리를 잡아 앉았다.
“그러고 보니 대석이랑 송만석 할아버지랑 같은 돌림자를 쓰네. 항렬이 차이가 나는데…….”
“아, 그건 아마 저희 집과 같은 이유일 거예요! 삼촌하고 저도 같은 돌림자 ‘세’를 쓰거든요.”
김유리의 물음에 사월세음이 답했다.
“집안에 강한 플레이어나 강력한 상위 존재에게 비호를 받는 플레이어가 나오면, 플레이어가 될 가능성이 보이는 후손에게 그 플레이어의 돌림자를 붙이기도 해요.”
“아,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 것 같아! 상위 존재나 진족이랑 관련 있는 거지?”
“네, 돌림자를 통해 상위 존재나 진족이 후손을 알아보고 가호를 주거나 도움을 준다는 말이 있어서요.”
그 말을 듣자 문득 성시완과 성국언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같은 항렬이고, 아주 우수한 플레이어의 후손이었으나 다른 돌림자를 사용했다.
‘성시완과 성국언이 옛 한국 지부장의 이름을 이어받지 않은 이유는 그가 단명했던 탓일까.’
옛 한국 지부장은 어둠의 시대를 끝낸 숨겨진 주역이지만, 손주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아무리 강한 플레이어라 해도 단명한 자의 이름을 받지는 않았을 거다.
씁쓸해할 틈도 없이 초대객들이 계속 밀려들었다.
“우리가 왔다, 후배들아!”
“마지막까지 치열했지.”
그다음에 온 건 2학년 0반 일당들이었다.
2학년 0반 선배놈들은 독고미로 상영회를 봐야겠다며 초대권, 우대권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쳤다.
그냥 와도 자리가 있으면 볼 수 있는 상영회였지만, 하도 집요하게 굴길래 결국 인원 제한 등의 조건을 달아서 초대권을 줬다.
또 배틀 로열이라도 벌인 건지, 선배놈들은 이능파가 흐트러진 상태였다.
그때, 교실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연예인이라도 온 건가 싶었는데, 진짜로 연예인이 등장했다.
“미로야, 초대해 줘서 고마워.”
“라이브도 보러 갈게.”
플레이리스트 우승자, 내장산의 성자 여래훈과 독고미로와 데스 매치를 했던 BJ국내산콩이 인사를 건넸다.
그 외에도 플레이리스트에 출연한 이들 몇 명이 보였다.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독고미로가 감격한 얼굴로 인사를 나눴다.
가혹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함께 헤쳐 나간 동료의 얼굴을 봐서 그런지, 독고미로는 눈에 띄게 긴장이 풀렸다.
그 뒤로도 사람들이 계속 밀려들었다.
원래 상영회를 보러 올 예정인 사람들에 이어 유명 인사들의 방문에 호기심을 가진 이들까지 잔뜩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은광고의 교실은 일반 고등학교의 교실보다 몇 배 넓지만, 이래서야 감당이 안 될지도 모른다.
“이대로 가면 객석이 모자라!”
“교실에 못 들어온 분이 예약을 하고 갔는데, 받아야 하나?”
“초대권, 우대권 전용 자리가 다 찼어요!”
1학년 0반 복도 앞에서 늘어선 줄은 건물 밖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통행에 방해가 되어 다른 반에도 지장을 줄지도 모른다.
나는 황지호에게 말을 걸었다.
“야.”
“알았다, 조의신.”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뭘 알았다는 거지?
황지호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말을 척척 했다.
“중앙 구역의 호연관 콘서트홀을 내어 주마. 세팅은 마쳤고, 이동용 에어셔틀을 대기시켜 놨다. 그곳에서 상영회를 속행한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