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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74화 (570/925)

79. 은광고 축제 (8)

상세한 내용을 들은 후, 나는 반드시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다짐했다.

그 부탁을 들어주면 황명호 대저택에 있는 호랑이들이 싫어할 거 같지만, 그래도 할 생각이다.

좀 위험하긴 해도 결과적으로는 황지호의 안전과도 연결되니 다들 기뻐할 것이다.

“할게요.”

“조금은 고민할 줄 알았는데, 황호 님이 고생하실 법하구나.”

“저를 믿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게 ‘무명의 운명’을 맡기신 거고요.”

내 대답에 은빛 그림자는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본래 ‘무명의 운명’을 다른 분께 맡기려 했다. 하지만 네가 여기에 왔지.”

무명의 운명은 운명력을 지닌 자만이 사용할 수 있지 않나?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무명의 운명 카드를 확인했다.

[아이템명] 무명의 운명

[형식] 무기

[희귀도] N~EX

[숙련도] 0%

[효과] 미정

[설명]

사용자의 경험, 기대, 사상, 목표, 신념 등에 근거하여 이름도 희귀도도 효과도 변하는 무기.

운명력을 지닌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

설명에는 기억대로 ‘운명력을 지닌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라고 쓰여 있었다.

운명력을 지니고 있는 자가 이 세계에 더 있는 건지, 다른 세계에서 운명력을 지닌 자를 부르려고 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다른 분에 관해서 질문해도 될까요?”

“대답해 주기 어렵다. 나에 관한 질문이 아니면 말하기 곤란하다.”

은빛 그림자가 말할 수 있는 범위는 한계가 있는 듯했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나 부탁에 관한 것 외에는 묻기 힘들 것 같다.

“그분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 고민거리를 하나 덜어 주었으니 넘어가 다오.”

“제 고민거리요?”

“두 주인공들의 사이가 서먹해진 것 말이다.”

사이가 서먹해진 주인공들이라면…… 주수혁과 안다인 말하는 것인가!

그야 타이틀 히어로와 히로인 사이가 어긋나는 건 중대한 고민거리이긴 하다.

뭘 어떻게 둘 사이를 도와준 건지 모르겠지만 세계를 구한 영웅이 해결해 줬으리라 믿는다.

“네 나름의 수를 생각한 것 같지만, 축제를 둘이서 즐기려면 좀 더 서두르는 게 좋겠지.”

“주수혁과 안다인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

확인차 물으니 그녀가 긍정했다.

갑자기 공감대가 샘솟기 시작했다.

나와 그녀는 운명력을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었으나 솔직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주수혁과 안다인 이야기가 나오니 새삼 그녀도 세상을 구하려 한다는 게 느껴졌다.

“그 두 사람이 좋나?”

“네.”

망설임 없이 답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 그 두 사람이 주인공으로서 얼마나 완벽하고 멋진가에 관해 논할 수 있다.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으니 둘을 잘 도와다오.”

“네, 맡겨 주세요.”

그녀는 혹시 두 사람과 연이 있는 게 아닐까?

더 물어보려 했을 때, 전류가 흐른 것처럼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손등을 보니 피부가 은빛으로 물들다가 다시 본래의 색으로 돌아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이능파 밀도가 지나치게 높아 침식이 진행되는 것 같았다.

그녀도 내 상태를 눈치챘다.

“이만 작별 인사를 해야겠군. 마지막으로 아주 개인적인 부탁을 하마.”

“말씀하세요.”

“토연 언니가 은호 님을 몹시 그리워하신다. 만일 황호 님과 은호 님이 허락하면 자리를 주선해 다오.”

삼 남매들이 옥토연을 언니, 누나라고 부르는데, 그녀도 언니라고 부르는구나.

은호도 나를 형이라고 하고, 그 손주들도 나를 형, 오빠라 칭하는 상황이니 뭔가 비슷했다.

‘옥토연은 호족에게 은호의 후예에 관한 것을 몇천 년간 숨겼어. 허술해 보여도 정말 중요한 비밀은 잘 지켜 주겠지.’

옥토연은 입이 가볍고 게으르지만 은호에 관한 비밀은 철저하게 지켰다.

오히려 빈틈이 지나치게 많아 보여서 의심을 덜 살지도 모른다.

호랑이들의 허락이 필요하겠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도 좋을 것 같다.

“물어볼게요.”

“고맙다.”

퇴거가 시작된 건지 공간이 점점 허물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장시간 운명력에 의해 발동된 이공간에 있었던 적이 없어서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그녀와 작별하기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당신은 어떤가요?”

“…….”

그녀는 내가 무엇을 물어본 건지 되묻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입에 담지 않았지만 내 뜻은 전해진 것 같았다.

옥토연은 은호를 그리워하는데, 그녀는 은호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내가 은호 님 입장이었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은호의 선택은 그녀가 숨을 거둘 때까지 호족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것.

이름도 받지 못한 채로 평생 그런 처지에 놓였다면 원망할 법도 한데, 은호에 관해 말할 때 그녀는 조금도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저 쓸쓸해 보였다.

“하지만 죽기 전에 한 번은 뵙고 싶었다.”

“그러면……!”

파아아!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 전에 공간이 허물어지고,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일부러 내가 말할 타이밍을 뺏은 후에 나를 내보낸 것 같았다.

그때, 내 등장에 놀란 누군가가 목소리를 냈다.

“앗, 저…….”

내게 말을 건 인물은 주수리였다.

주수리는 안락의자에 파묻히듯 앉아 책을 읽다가 내 기척을 느끼고 독서를 중단한 듯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까 수색한 곳과 다른 서가였다.

여기는 황지호와 둘러보던 구역이 아니었다.

“그…… 눈을 가린 분은 어디 가셨어요?”

방금 전까지 주수리는 토트와 함께 있었나 보다.

그러면 주수리에게 책을 골라 준 건 토트인 걸까?

지식과 과학, 언어, 도서관의 수호신이 직접 주수리를 위해 골라 준 책이니 넋을 잃고 볼 만큼 재미있었을 거다.

주수리는 주변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새파란 얼굴을 했지만, 그 와중에도 읽던 책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

“아마 본래 있던 곳으로 가셨을 거야. 주수혁을 부를게.”

“수혁 오빠요? 혹시 오빠 친구인 무명의 초신성이에요? 아……!”

내가 디바이스 메시지를 작성했을 때, 주수리의 디바이스가 정신 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운명력의 발동과 토트의 간섭, 도서관 내 고서가 품은 이능파 등등으로 인해 폐쇄되어 있던 공간이 열린 탓에 통신이 재개되었을 거다.

“조의신, 무사한가!”

메시지를 막 보냈을 때 황지호가 도착했다.

맹수처럼 변한 눈에 황금빛 이능파가 감도는 게 신역의 수호자로서의 권능을 사용했나 보다.

내가 사라진 후에 신역 전체를 계속 주시하다가 이리로 온 모양이다.

“어떻게 여기로 온 거지? ‘그 힘’ 때문인가.”

황지호는 운명력이 발동할 때 옆에 있었으니 그 힘을 느꼈을 거다.

황지호는 여전히 이능파를 거두지 않은 채로 나를 살피다 말했다.

“다친 곳은 없군. 주수리도 찾았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상위 존재가 책을 추천해 줘서 읽고 있었나 봐.”

“……그 상위 존재는 여기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호족의 신역이긴 해도 이름 없는 영웅이 직접 나섰으니 가능했던 게 아닐까?

그걸 알 리가 없는 황지호가 아주 불쾌해했다.

순간 주수리가 겁에 질렸을 정도다.

주수리는 황지호가 황명 그룹 소속인 걸 알아본 모양인데, 학생 흉내를 할 거면 좀 인간처럼 가장했으면 좋겠다.

타타탓!

지하 서고의 좌표를 전한 덕에 이쪽으로 여러 명이 달려오고 있었다.

가장 근처에 있었던 모양인 주수혁과 안다인이 제일 먼저 도착했다.

“수리야! 괜찮아?”

“난 괜찮아. 미안해……. 그, 좀 신경 쓰이는 책이 보이길래 잠깐만 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책 추천을 여러 개 받아서…….”

단체 행동 중에, 그것도 경호를 받는 몸이면서 저리 움직인 건 지탄받아야 할 일이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단순히 딴 짓을 한 거라면 이렇게 문제가 될 리가 없다.

이번 수색에 참여한 플레이어들은 주수리의 실종에 보통 인간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존재가 개입했다는 걸 눈치챘을 거다.

주수혁은 놀란 주수리를 다정하게 달래면서 경위를 물었다.

주수리는 그사이 안다인 옆에 붙어 있었는데, 주수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안다인이 손을 내주자 냉큼 그 손을 잡은 상태로 주수혁과 이야기를 나눴다.

가끔 안다인도 질문을 던져 좀 더 정확한 정보를 듣곤 했다.

‘은빛의 영웅이 정말 둘 사이를 도와줬구나!’

주수혁과 안다인 사이에서 서먹함이 많이 사라져 있어서 참 보기 좋았다.

“……눈을 가린 분이 책을 추천해 줬다고?”

“토트겠지. 그자가 가장 아끼는 이가 이 학교의 교사이니 가끔 출몰하기도 한다.”

“제갈재걸 선생님에게 가호를 내린 상위 존재 말이구나. 수리한테 책 추천을 해 주려고 불러낸 걸까?”

주수혁은 입에 담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여긴 듯했다.

책 추천을 할 거라면 그냥 조용히 책만 골라 주면 될 것을, 굳이 찾기 힘든 곳에 불러내어 주수리를 숨기다니.

이상하게 여기는 게 당연할 거다.

내가 주수혁에게 변명하기 전에 황지호가 덧붙였다.

“상위 존재의 뜻은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 그렇지…….”

상위 존재는 본래 인간의 상식에서 벗어난 일을 많이 벌인다.

신화 시절에도 그랬고, 이계 충돌이 벌어진 세계에서도 그랬다.

주수혁은 황지호의 말을 듣고 납득했다.

“의신아, 고마워! 의신이가 찾아 줄 것 같았어.”

“아니야. 찾아서 다행이다.”

이번에는 진짜로 한 일이 없는데.

나를 유인하기 위해 주수리가 실종된 셈이니 내가 사과를 해야 할 상황인데, 감사 인사를 듣고 있었다.

그래도 사정을 설명할 수도 없는 꼴이니 그냥 인사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

“신세를 졌다.”

“의신아, 진짜 고마워. 지하 서고는 공기도 안 좋은데 빨리 찾아서 다행이야.”

1층에서 합류한 주수겸, 오혜지가 인사했다.

어느 사이엔가 주수리를 찾아낸 건 전부 내 공이 되어 그 외에도 수색에 참여한 이들로부터 인사를 한마디씩 들었다.

내가 받아야 할 인사가 아니라 듣기 괴로웠다.

황지호는 대충 상황을 짐작했을 테니 내 처지를 알고 있을 텐데, 노친네는 내가 인사받는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노친네는 합류했을 때 보인 노기를 가라앉힌 것처럼 보였다.

“저……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신이 오빠가 안 왔으면 정신 못 차리고 계속 책을 읽고 있었을 거예요.”

계속 안다인의 손을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주수리가 인사했다.

주수리는 나중에 사례를 하고 싶다면서 디바이스 코드를 줬는데, 이러다가 주오 그룹의 로열패밀리들의 코드를 전부 수집하는 게 아닌가 싶다.

도서관의 수호신, 상위 존재 토트가 재능 있는 플레이어를 불러내 책 추천을 해 줬다는 미담과 함께 실종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황지호는 그렇게 끝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수색조가 해산한 후, 황지호가 말했다.

“조의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지.”

……노친네에게 어디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지?

말을 해야겠지만, 아직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시간을 끌기로 했다.

“축제나 돌자.”

“조의신…….”

황지호는 억지로 끌고 가 이야기를 들을 생각은 없는지 툴툴거리면서도 따라왔다.

3학년 구역을 가기 위해 지름길로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으슥한 곳에서 수상한 이들과 마주쳤다.

“크윽! 이런 곳에도 사람이 있다니!”

“그래도 귀신보다는 사람이 낫잖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포기하지 마. 아직 구교사에 귀신이 남아 있는 한, 우리의 제령은 끝나지 않아!”

처음 보는 이들이었지만 누군지 알아봤다.

졸업한 0반 선배놈들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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