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75화 (571/925)

79. 은광고 축제 (9)

소년 만화의 클라이맥스에 나올 것 같은 대사를 뱉으며 선배놈들이 서로를 독려했다.

그 모습을 본 황지호가 미간을 좁혔다.

“졸업한 0반은 다 잡혔다고 들었는데 왜 여기에…….”

“잡힌 건 우리의 잔상입니다만.”

잔상 좋아한다.

딱 작년에 졸업한 0반 학생 수만큼 미친 자를 잡았다고 했는데, 더 있었나 보다.

‘설마 작년에 졸업한 선배놈들만 온 게 아니라 그 위의 놈들도 온 건가?’

1학년 학생들도 저놈들을 잡으러 다녔으니 얼굴을 몰라 작년에 졸업한 선배놈인지, 재작년에 졸업한 선배놈인지 구분을 못 할 수도 있다.

성인이 되고 한참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광기라니, 경탄할 노릇이다.

1학년 0반 소속 노친네가 운영하는 학교 출신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너희들, 잘 보니까 우리 후배잖아.”

“미로 공연할 때 뒤에서 꽹과리랑 트라이앵글 치던 애들이네.”

“라이브 공연 한다면서 트라이앵글 연습은 했니?”

선배놈들이 우리 반 상영회를 보고 온 건지 나와 황지호를 알아봤다.

그놈의 구교사 제령에 매달리느라 바쁠 줄 알았더니 나름 축제를 즐기고 있었구나.

선배놈들은 일방적인 내적 친밀감을 느낀 건지 급격히 친한 척 굴었다.

축제에서 산 간식거리를 떠넘겼는데 황지호보다 나한테 주는 양이 많았다.

선배놈들은 간식을 줄 때마다 트라이앵글 연주에 관해 언급해 대며 걱정 비슷한 말을 했다.

……연주 중에 실수는 안 했는데, 저렇게 걱정할 정도인가?

“너희도 구교사를 조심해!”

“0반 후배 중에 이렇게 예의 바른 애가 있다니…….”

“우리가 직접 제령 스킬을 전수해 주마. 연락해라.”

“후배들이여, 잘 있어라!”

반강제로 디바이스 코드를 교환한 후, 선배놈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당장이라도 선배놈들을 잡아서 교사진에게 던져 줄 것 같다던 황지호가 덧붙였다.

“저놈들이 사라진 위치로 수색 지시를 내렸다. 계속 축제 구경이나 하지.”

“직접 잡으러 갈 줄 알았는데.”

“이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상대를 안 해 준 건 축제 구경을 위해서인가 보다.

3학년 구역을 돌면 발표회 시각이 되니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지름길을 통과한 직후, 함성 소리가 들렸다.

와아아아아!

“완승이다아앗!”

관객들의 환호를 받으며 임연화가 주먹을 불끈 쥐고 운동장을 달리며 세리머니를 하고 있었다.

운동장에 드러누워 있는 우기환 일당을 보니 평소 하던 짓을 축제에서도 한 듯했다.

관객들 손에는 책자가 하나씩 있었는데, 대충 보니 우기환이 예전에 뿌렸던 정신 나간 내용의 책이었다.

“방금 한 게 무슨 대결이었지?”

“씨름 대결 재현이래.”

“……씨름은 1대2로도 할 수 있는 거였구나.”

그때 감동한 임연화의 주도로 책에 나온 추억의 승부들을 복기하기로 했는데, 이게 결국 축제 기획물로 이어졌나 보다.

이 기획물을 하는 동안에는 3학년 0반 선배놈들이 허튼짓을 못 할 테니 괜찮을 것 같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우기환 일당의 사진을 찍고 지나치려 할 때였다.

“이번 대결도 임연화 선생님의 승리!”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목소리가 들려 연단 쪽을 보니 제갈재걸이 있었다.

버건디색 수트를 입은 제갈재걸이 임연화의 승리를 선언한 후, 다음 대결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갈재걸이 어디에 갔나 했더니 여기에서 사회를 보고 있었나! 2학년 0반 선배놈들도 강한 담임은 어찌하지 못하는구나…….’

임연화와 3학년 0반이 버티고 있는 이곳이라면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깽판을 치진 못할 거다.

제갈재걸 입장에선 저 화려한 수트를 입고 사회를 보는 게 그 어마어마한 제갈재걸 3D 화보집을 보는 것보단 낫나 보다.

나는 제갈재걸의 사진도 여러 장 찍고 다음 기획물을 구경하러 갔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3학년의 성적 우수자를 모은 3학년 1반이었다.

“의신이랑 지호 왔구나, 어서 와.”

한복 차림의 유상희가 나를 반겨 줬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뭔들 안 어울리겠냐마는, 유상희가 긴 머리를 곱게 따 댕기를 묶고 웃으니 하늘의 달을 보는 기분이었다.

유상희는 이능으로 만든 창호지 창문 앞에 놓인 다탁(茶卓)으로 안내했다.

창문을 열자 비바람과 함께 벼락이 내리치는 게 보였다.

이능파의 기운으로 미루어 보아 도원우가 전기술로 만든 풍경인 것 같다.

시간마다 풍경이 바뀐다고 하는데, 여름의 폭풍이 비친 시간에 왔나 보다.

“두 사람 몫은 내가 살게. 먹고 싶은 거 골라.”

유상희가 한지로 된 메뉴판을 건넸다.

한지에는 먹과 붓으로 직접 글을 쓴 메뉴 소개가 적혀 있었다.

한방 전통 찻집을 운영한다고 했는데, 소품 하나하나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았다.

‘도원우랑 오혜지, 성시완, 지명수가 안 보이네.’

오혜지는 주수리 건 때문에 주오 그룹 측과 이야기하느라 바쁜가 보다.

남은 셋은 졸업한 0반 선배놈들을 처리하는 중인 걸까?

그때, 한방차 사이에 꽃 향기가 섞였다.

“수국향기의 팀 마스터다……!”

“백화난만(百花爛漫)은 우리 학교 출신이 아닌데 웬일로 온 거지?”

“명수가 수국향기에 입단하잖아. 그래서 온 듯.”

“옆에 지명수 있네.”

교실 문이 열리자 지명수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권제인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꽃을 피워 내는 이능을 가지고 있다는데, 과연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꽃이 피는 것처럼 좋은 향이 퍼졌다.

‘저 사람이 수국향기의 팀 마스터, 백화난만이구나.’

한국의 4대 플레이어 팀의 마스터를 옆에 두고도 지명수는 넉살 좋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백화난만도 그때마다 웃으며 응수했다.

지명수가 유명한 플레이어 팀에 들어가 잘 적응하고 있는 중이라는 게 느껴져 보기 좋았다.

‘플마고 속 지명수는 수국향기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 때 사망한 탓도 있지만, 지명수는 아예 수국향기의 면접을 통과하지 못했다.

나름 중견 플레이어 팀에 들어가긴 했지만, 수국향기 정도 되는 실적을 가진 곳은 아니었다.

그때의 지명수는 수많은 사건에 시달려 피폐해지고 지쳐 여유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산전수전을 겪은 고참 플레이어들 눈에는 그게 전부 보였을 거다.

그 탓에 플마고의 지명수가 수국향기 면접에서 고배를 마셨을지도 모르겠다.

“상훈이가 방금 왔다 갔어.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유상희가 꿀을 탄 맥문동차를 내밀었다.

메뉴 고르기가 쉽지 않아 유상희에게 추천해 달라고 부탁하자 골라 준 차였다.

기관지에 좋다는 차답게 한 입 마시니 목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3학년의 기획물을 둘러봤다.

신문부 부장의 반도 들르고 나니 어느덧 라이브 시간이 가까워졌다.

*    *    *

황호의 신고를 받고 졸업한 0반 잔당을 붙잡기 위해 투입된 건 지익회였다.

이들은 천익산으로 도망쳤으나 지익회는 우기환 덕에 천익산 수색에는 이골이 나 금방 위치를 파악했다.

“크윽, 분하다! 이번에야말로 그 귀신들을 하늘로 보낼 수 있었는데!”

“하하하, 선배님들은 졸업한 후에도 변함이 없으시네요. 그 귀신이라는 건 후배들한테 맡기시고 그냥 졸업하세요.”

“못 믿어! 지금은 구교사에 못 박혀 있는 귀신들이 언제 풀려나서 우릴 노릴지도 몰라!”

졸업생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으나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사람 좋게 웃는 성시완의 손에 마지막 졸업생이 끌려간 후에야 지익회 소속 1학년 박승현은 겨우 한시름 놓았다.

‘어떻게 될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지익회가 위치 파악은 빠르게 했으나 프로 플레이어로 활약하는 졸업생들의 이능 위력에 밀려 놓칠 뻔했다.

이때, 박승현은 자신의 광림 ‘군사가 지휘하는 진군가(進軍歌)’를 발동시켜 한순간 지익회 사람들의 이능을 강화시켜 위기를 극복했다.

오랜만에 써서 그런 걸까, 아니면 스포츠 교류전 개막식 때 들었던 그 굉장한 휘파람 소리를 흉내 낸 덕일까.

박승현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들었던 휘파람 소리는 좀 더 가볍고, 넓게 퍼졌던 것 같은데…….’

그때 들렸던 휘파람 소리가 품은 힘은 자신의 광림과 지나치게 유사했다.

그쪽이 더 강력한 덕에 같은 광림이라고 생각하긴 힘들었지만.

‘그걸 흉내 내니까 출력이 훨씬 올랐어. 완벽하게 그 소리를 재현할 수 있다면…….’

박승현은 백호가 추던 검무에 섞였던 그 소리를 생각하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홀로 그 곡을 불며 하산하고 있던 중에 저도 모르게 이능파가 실리고, 광림이 발동한 순간이었다.

덥썩.

무언가가 무서운 속도로 나타나 박승현의 팔을 움켜쥐었다.

정장 차림을 한 김철이었다.

주수리의 수색을 위해 천익산 쪽을 살펴보다가 복귀하던 중이었던 김철은 우연히 휘파람 소리를 듣고 지체 없이 전속력으로 이쪽으로 왔다.

“학생, 그 휘파람……!”

하지만 김철이 말을 잇다 말고 고개를 휙 돌려 팔을 들어 올렸다.

파앙!

고개를 돌린 김철의 손에는 이능파가 어린 축구 공이 잡혀 있었다.

누군가가 축구 공에 이능파를 실어 슛을 날렸고, 김철이 순식간에 반응해 이를 잡아 낸 거다.

박승현은 모든 게 너무 빨리 지나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승현아! 괜찮아? 0반 졸업생이 또 있었…… 어? 철이 형?”

다짜고짜 슛을 날린 김현구가 사촌 형인 김철을 알아보고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누가 박승현에게 달려드는 걸 보고 0반 선배겠거니 하고 공격했는데 사촌 형이 있어서 당혹스러웠다.

김현구가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철이 형, 학교 축제 날에 일한다면서 여긴 어떻게 왔어?”

“일 때문에 온 거야. 그런데…….”

김철은 여전히 한 손에 박승현의 팔을 잡고 있었다.

“현구 친구였구나.”

김철은 드디어 키모폴레이아를 구한 진짜 영웅의 실마리를 잡았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다.”

*    *    *

중앙 구역 상인관.

입학식과 졸업식을 치르는 은광고 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중앙대강당.

이곳에서는 오늘 동아리와 학급에서 준비한 공연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미 발표회는 시작된 상태였지만, 우리 반 라이브까지는 여유가 있어 고지된 시각에는 맞춰서 왔다.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국악부 연주 굉장했어요…….”

“국악부는 아직 공연 중 아닌가?”

“국악부에서 연주할 곡은 총 네 곡이야. 그런데 첫 곡에서 엄청난 연주를 한 분이 나와서…….”

우리 학교 국악부는 지상파를 통해 방송되는 국악 연주회에도 초청될 만큼 유명하다.

발표회 순서는 제비뽑기로 결정됐는데 하필 우리 반은 국악부 다음으로 발표하게 되었다.

“첫 곡 연주가 끝나고, 다음 연주를 위해 준비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목우람은 그때 있던 일을 설명했다.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자신이 진족의 수장임을 밝힌 누군가가 해금 연주자에게 이능 악기를 선물했다고 한다.

자신의 영역에서 부디 연주해 주길 바란다는 청과 함께.

황지호가 진족의 수장이란 말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대체 어느 놈이…… 짐작 가는 놈이 너무 많군.”

12지 진족만 해도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수장이 많긴 했다.

‘플마고의 동아리 발표회에서 진족이 이능 악기를 선물하는 장면이 있었지.’

그런데 그게 진족의 수장과 해금 연주자 이야기였구나.

디테일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지만 흐름은 비슷한 것 같다.

플마고와 지금 상황을 비교하며 생각하고 있는 사이, 황지호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그 해금 연주자는 진족의 영역에 가기로 했나?”

“담임 선생님과의 승부를 해야 해서 바쁘대.”

그 해금 연주자는 3학년 0반 부반장이었나!

우기환 일당 중에 부반장은 안 보였는데 국악부 일로 바빴나 보다.

“그 진족의 수장은 아직 상인관에 있나?”

“음…… 아니, 여기에 오래 있기 싫다고 해금 연주가 끝나고 갔어.”

“…….”

황지호가 순간 할 말을 잃은 얼굴을 했다.

대체 뭐 하는 진족의 수장인가!

누군지 몰라도 처음부터 해금 연주를 노리고 온 듯했다.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인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

“괜찮아, 내가 열심히 분위기 띄울게!”

독고미로가 가장 떨릴 텐데 아이들을 달랬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우리 반 아이들이 조금씩 웃음기를 되찾긴 했으나 여전히 걱정되는 것 같았다.

트라이앵글 연주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적어 한탄스러웠다.

‘적어도 실수는 하지 말자.’

국악부 부장이 ‘풍악을 울려라!’라는 호령과 함께 국악부 전원이 연주하는 경쾌하고도 웅장한 천년만세(千年萬世)를 끝으로 분위기는 최고조에 다다랐다.

감탄할 만한 무대였지만, 바로 뒤에 공연해야 하는 입장에선 마음이 무거웠다.

[무대에 오를 다음 학급은 1학년 0반입니다.]

무대가 세팅되는 사이, 사회자들이 우리 반을 소개하였다.

소개가 지나치게 짧게 느껴졌다.

심호흡을 하며 무대에 올라갔을 때였다.

짝짝짝!

와아아아아아!

우리 반이 오르자마자 한켠에서 거대한 박수 소리와 함성이 들렸다.

긴장을 녹일 만할 정도로 엄청난 소리였다.

다른 관객들도 한순간 그쪽을 볼 정도였다.

압도적인 소리가 들린 쪽을 보니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장남욱을 필두로 한 빡빡이들, 사관학교 생도들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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