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행운아 (3)
캄캄한 밤, 천익산에 위치한 솜뭉치의 무덤 앞.
안다인이 꽃다발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는데, 꽃은 안다인이 잃은 이들의 숫자만큼 있었다.
솜뭉치, 제갈재걸, 김유리, 적호 그 이외에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에서 눈을 감은 이들까지.
그 수가 너무 많아 크리스마스가 지난 이후부터 안다인은 안개꽃을 들고 왔다.
호족 부부는 어둠 속에서 안다인의 모습을 지켜봤다.
‘천익산의 초목들이 죽은 정도, 날씨와 옷차림, 꽃 송이 수를 세 보니 2학년 2학기 후반 같네. 이때 호족 부부가 안다인과 접촉한 건가.’
안다인은 솜뭉치에게 하늘에서 만난 이들이 있다면 안부를 전해 달라며 인사하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이 시점의 안다인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존재가 거의 없었다.
안다인의 가족도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 집안에서 태어난 초인 안다인은 붕 뜬 존재였다.
지나치게 아름답고 뛰어난 안다인을 두고 그녀의 부모가 병원에서 아이가 바뀐 건 아닌가 의심해서 친자 확인까지 했을 정도였다.
가족 사이에서 안다인은 딸이라기보다는 경외의 대상으로 여겨졌기에 그녀가 의지하거나 속마음을 이야기하기 어려웠다.
‘김유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계속 그랬지.’
안다인을 경외나 숭배, 질투의 대상이 아닌 친구로 여긴 존재는 김유리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김유리는 퍼스트 크리스마스를 계기로 안다인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안다인은 그 이후엔 오랫동안 마음을 닫고 지냈기에 표면적인 교우 관계를 유지해도 속내는 절대 터놓지 않았다.
그런 안다인이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솜뭉치의 무덤 앞이 유일했다.
―오늘은 수혁이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지 단독 1등을 했어. 수혁이가 걱정 돼. 그런데 말을 걸지 못했어…….
안다인이 이 시기에 단독 1등을 했었나?
등수가 게임 중에 공개되지 않을 때도 있었기에 확신할 수 없었다.
혹시 안다인이 특정 시기에 능력치가 은광고 동급생 중 가장 높아야 한다는 게 이 히든 퀘스트 오픈 조건인가.
한편, 가면을 쓴 호족 부부가 클로즈업 됐을 땐 액정을 부서져라 연타하며 1초라도 빨리 화면을 넘기려 했던 계이담이 집중해서 텍스트를 읽고 있었다.
그 덕에 화면의 미세한 변화가 잘 보였다.
―……눈이다.
쓸데없이 연출에 공을 들인 플마고답게 한밤중에 천익산에 눈이 내리는 광경은 환상적이었다.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눈송이를 올려다보는 안다인도 그 광경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오랫동안 눈을 올려다보던 안다인이 중얼거렸다.
음성 지원이 안 되는 망겜인 탓에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텍스트뿐이었지만, 어쩐지 귓가에 안다인의 음성이 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적호 씨와 같이 싸웠다면, 지금 이 자리에 계실까.
안다인은 적호의 시신을 제일 먼저 발견했다.
가장 가까운 정문을 살핀 후, 적호가 걱정되어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적호는 완전히 숨을 거둔 상태였다.
적호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기습을 당해 쓰러진 건지, 주변에 이능파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이상한 점이 있다면 누군가가 적호의 시체를 눈에 맞지 않도록 붉은 천으로 덮어 주고 갔다는 점이었다.
안다인이 적호를 떠올리고 있을 때, 누군가가 힘 없이 흐느적거리며 다가왔다.
기척을 느낀 안다인이 휙 그쪽을 봤다.
―……안녕?
가면을 쓴 호족 부부가 안다인에게 말을 걸었다.
눈과 입 부분만 뚫린 밋밋한 가면을 쓴 이들은 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더 오싹해 보였다.
호족 부부는 죽림에서 봤을 때보다 가늘고, 힘이 없었다.
‘신수의 무덤 주변에 있는 것에 더해 적호 얘기까지 하는 걸 들어서 접근한 건가?’
아직 호족 부부의 의도를 읽을 수 없었다.
안다인은 상대가 비록 기묘하지만 자신을 해할 의사가 없다는 걸 판단하고 경계 태세를 풀었다.
―안녕하세요.
―여기에서 뭐 하니?
―예전에 잠시 돌보던 아이를 보러 왔어요.
―그 아이가 여기에 있니?
―……네.
호족 부부가 고개를 크게 기울이며 솜뭉치가 잠들어 있는 묘를 바라봤다.
―여기에 꽃을 올리던 게 너였구나.
―혹시 솜뭉치를 아세요?
―솜뭉치?
―하얀 강아지예요. 크기는 이만하고, 다리를 절고…….
―아아, 그렇구나. 알고말고. 우리는 오래 살았으니까.
눈이 내리는 밤, 산에서 비틀거리며 무덤을 살펴보는 호족 부부는 섬뜩한 인상을 줬다.
말하는 것도 어딘가 이상한 게 사정을 모르면 겁에 질릴 법했다.
지금 계이담처럼 말이다.
“아니, 이 귀신 같은 것들은 뭐라는 거야! 안다인한테 씌이는 건 아니겠지?”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있던 계이담은 한기를 느꼈는지 이불을 덮고 다시 게임을 재개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 떠는 모습을 보던 성시완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이담이는 괴담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아닐 거다.]
머릿속을 들여다본 옛 한국 지부장이 단언했다.
[하지만 저자가 이 흉한 모습을 보여 주면서까지 찾으려던 정보는 이게 맞는 것 같군. 조의신이 모르되, 자신은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 이걸 찾고자 했다.]
옛 한국 지부장은 성시완과 나를 보며 말했다.
[가장 아끼는 자와 가장 두려워하는 자에게 이 꼴이 전부 폭로되는 걸 각오하고 말이지.]
그 아끼는 자는 나일리가 없으니 성시완을 칭하는 걸 거다.
하긴, 저번에 대련으로 밟아 놨을 때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하는 동안 성시완 이름이 몇 번이나 나왔는지 모른다.
‘성시완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야 ‘계’새끼가 얼마나 쓰레기인지 알고 있었기에 별 감흥이 없었다.
같은 제조사의 차량 탓에 가족을 잃었던 것, 천성헌과 최 병장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 ‘계’새끼가 예상보다 더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다는 걸 새로 알게 되긴 했지만.
그러나 성시완은 다르다.
성시완이 얼마나 바르고 올곧은 인물인지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잘 알았다.
성국언 같은 훌륭한 가족, 은광고에 있는 멋지고 우수한 친구들, 선후배들과 교류를 나누며 그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키워 왔을 거다.
‘최편득 같은 노골적인 악인은 봤겠지만, 저 ‘계’새끼 같은 타입은 처음 봤겠지.’
다음 지익회장을 맡길 만큼 믿었던 후배가 최악의 인간이었다는 건 상상도 못 했을 거다.
처음 겪어 보는 상상을 초월한 쓰레기 앞에 다정한 성시완이 얼마나 괴로워할지 짐작도 안 갔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숨겨진 악의가 많아.’
그리고 옛 한국 지부장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거대한 악의와 맞서 싸운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올곧고 어린 손주 성시완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수차례의 대련을 거치며 성시완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옛 한국 지부장은 잘 알고 있을 거다.
성시완이 무엇을 모르고, 무엇이 부족한지를.
“저는…….”
성시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직 그저 혼란스러운가 보다.
그사이, 계이담이 조작하고 있는 화면이 전환되었다.
화면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정색할 뻔했다.
―다인아, 어제 천익산에 갔어?
화면에 등장한 건 고등학생인 척하는 노친네였다!
곱상한 눈을 하고, 교복을 입은 채로 저런 말투를 쓰니 그냥 붙임성 있는 동급생으로 보였지만, 실상을 알고 있으니 좀 그랬다.
플마고 속 황지호는 안다인과 호족 부부가 접촉한 걸 알고 있나 보다.
황지호는 안다인으로부터 호족 부부와 만났다는 말을 유도해 낸 후 물었다.
―그들이 이상한 부탁을 하지 않았어?
―부탁을 하긴 했는데,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았어.
안다인이 그렇게 말했으나 호족 부부에게 받은 부탁은 충분히 이상했다.
호족 부부는 자신들이 자식을 잃었다고 밝혀 안다인으로부터 공감을 이끌어 냈다.
잃은 자식에 관해 이야기하던 호족 부부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아이를 위해 참배해 주지 않겠니?
―시간을 내서 우리와 함께 가 줬으면 좋겠구나.
호족 부부는 그렇게 말하며 가면 뒤로 눈을 부릅 뜨고 있었다.
어지간한 이들은 아마 그 눈을 본 순간 뒤도 안 돌아보고 천익산을 하산했을 거다.
하지만 안다인은 그들의 눈이 그저 슬퍼 보였는지 덩달아 같이 애수에 잠긴 얼굴로 되물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학기 중에는 학생회 일이 있어서 학교 멀리 가기 어려워요.
―멀리 가지 않아도 괜찮단다. 천익산에 있으니까.
―묘가 천익산에 있나요?
―후후후, 천익산에서 추모를 하면 된단다.
텍스트 너머로 어쩐지 호족 부부가 우는 것처럼 웃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함께 참배하러 가기로 했다는 말에 황지호가 한순간 무표정을 지었다.
안다인은 잠시 기억을 되짚느라 그 얼굴을 보지 못했다.
―지호야, 혹시 두 분을 알고 있어?
―응.
―천익산에 계신 분이니까 학교 관계자인가 보구나.
황지호의 대사는 아주 빠르게 넘어갔다.
계이담이 황지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대사를 연타해 넘겼기 때문이다.
그냥 연타한 것뿐만 아니라 황지호가 대사를 뱉을 때마다 딴청을 부린 탓에 화면이 흐려지곤 했다.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 황지호가 대사를 뱉었다.
―그들은 자식을 마음에 묻었다고 했다.
안다인이 자리를 비운 뒤, 황지호가 혼잣말을 했다.
계이담이 안다인 히든 퀘스트 공략이 업데이트되지 않았는지 웹 브라우저를 열어 검색하며 대충 화면을 넘기는 바람에 대사 일부가 흐리게 보였다.
잘 보이지 않는 대사를 어렵게 해석했다.
―그 아이는 제대로 된 육신을 갖추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에 시신도 없다. 그런데 천익산에서 참배라고?
황지호의 혼잣말은 안다인에게 닿지 않았다.
안다인은 호족 부부와 약속한 시각에 천익산에 올랐다.
그러나 안다인이 한참을 기다려도 호족 부부는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전투가 시작되었다.
적의 이름, 능력치는 표시되지 않았으나 안다인이 살기를 느끼고 공격을 한 번 피한 이후로 게임 화면이 스토리 모드에서 전투 모드로 전환되었다.
“아! 공략도 없는데!”
계이담이 허둥지둥 화면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전투 시작 알림과 동시에 화면 속 안다인이 주변을 경계하는 게 보였다.
안다인의 능력치는 상당히 높았으나 그녀를 조작하는 계이담이 겜알못이었기 때문에 몇 번이나 다칠 뻔했다.
‘당장 아이템 카드를 실체화해서 총을 소환하거나, 전신총화 스킬로 시야가 닿지 않는 곳과 기척을 느낀 곳을 향해 위협 사격을 해야지. 뭐 하는 거냐!’
계이담은 짧은 시간 동안 안다인을 세 번이나 죽일 뻔했다.
전투 자체는 그리 어렵지도 않았는데 저놈은 총을 쏠 때 조준점을 어떻게 잡고, 연사를 언제 해야 하는지 감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안다인을 저 레벨까지 키웠는데도 게임을 저렇게 못할 수도 있는 건가?’
계이담은 실제 사격도 못하고, 사격 게임도 못했다.
플마고가 어려운 편이긴 하지만 저건 그냥 저놈이 더럽게 못하는 거다.
저 쓰레기가 나하고 키배를 그렇게 떴으면서 내가 쓴 공략을 죽어라 찾아다니는 이유가 저거였나 보다.
“개망겜! 무슨 게임을 이렇게 만들어! 오토 모드 내놔!”
쾅!
계이담이 큰 소리를 내자 옆집에서 벽을 쳤다.
계이담은 게임을 잠시 중단하고 고무망치를 휘두르며 보복에 나섰다.
고무망치를 연속으로 풀스윙하는 군더더기 없는 폼이 에임을 못 잡아 쩔쩔매던 모습과 비교되었다.
[저자는 죽기 싫으면 빠른 시일 내로 이능 총을 포기하는 게 좋겠군.]
옛 한국 지부장이 한심해하며 말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