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행운아 (4)
계이담은 한심한 플레이 끝에 전투를 마쳤다.
물론 공략법을 찾은 게 아니라 안다인의 높은 능력치, 스킬 레벨을 통한 딜로 찍어 누르기 전법으로 억지로 이겼다.
“드디어 깼다! 깨고 나니 별거 아니네!”
별게 아닌 건 ‘계’새끼의 인성과 게임 실력인데.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안다인이 ‘계’새끼 버전으로 이 퀘스트를 리플레이하면 절망할 거다.
자신의 판단 능력과 전투 센스가 갑자기 바닥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권속들만으로는 너를 어찌할 수 없구나.
그때, 화면 속 안다인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계이담이 또 전투가 시작되는 게 아니냐며 펄쩍 뛰었다.
겜알못의 우려와 달리 가면을 쓴 부부는 공격 의사가 없는 듯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저를 해하려 하셨나요?
―그래.
―아이를 위해 참배해 달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나요?
―거짓은 아니다. 권속을 부려 네 목숨을 앗아가 아이를 추모하려 했으니까.
화면이 잠시 쓰러진 권속들을 비추었다.
안다인을 공격한 정체불명의 무언가는 전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권속이라 칭한 걸 보니 백호군이 다루는 영호(影虎), 황지호의 저택에 있던 그림 속의 호랑이 같은 존재인 것 같았다.
‘호족 부부는 신화 시절부터 지금까지 존재했으니 상당한 실력자라고 추측하긴 했어. 그런데 여러 권속을 동시에 다룰 정도였구나.’
화면 속의 호족 부부는 죽림에서 봤을 때보다 더 마르고 기운이 없어 보였는데, 권속을 부리고 있었다.
비록 안다인에게 지긴 했지만.
저 가면을 쓴 부부가 직접 참전해 협공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의문이 생겼다.
‘왜 직접 싸우지 않은 거지?’
권속들이 쓰러지는 사이에 기습을 하면 일이 더 수월해졌을 텐데.
모든 권속들이 쓰러지고 난 후에야 나타나서 자신들이 벌인 짓을 다 설명해 주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호족 부부를 잘 살펴보니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
호족 부부는 보통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말을 거는데, 아까부터 한 명만 말하고 있다.
실루엣으로 추정해 보았을 때, 아내 쪽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가면 뒤로 안다인을 뚫어지게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안다인을 두고 둘의 의견이 갈린 걸까?
―당신이 나서지 않으면 나 혼자라도……!
그때, 남편 쪽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엄중하게 봉인된 상자였는데, 안다인이 심상치 않은 힘을 느낀 듯 뒤로 크게 물러났다.
남편 쪽이 상자의 봉인을 풀려던 순간.
―거기까지 해라!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가면을 쓴 호족 부부가 움직임을 멈췄다.
화면에 등장한 건 은광고의 이사장, 황명호였다.
―황명호 이사장님?
―늦어져서 미안하구나.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황명호는 안다인이 공격받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나 보다.
그 대사를 본 계이담이 어처구니없어했다.
“미친! 같이 안 싸우고 뭐 했냐고!”
같이 안 싸운 건 계이담도 마찬가지 아닌가?
방금 계이담이 한 조작은 싸운 게 아니라 안다인을 방해한 거나 다름없는데.
―네 손에 들린 게 무엇인 줄 알고 있는 거냐.
―화, 황호 님…….
―2천 년 동안 신보(神寶)가 나타나지 않는다 했더니, 이런 곳에 있었군.
‘신보라고? 설마 호족의 신보를 가리키는 건가!’
호족의 신역 어딘가에는 천 년에 한 번씩 신보(神寶)를 낳는 샘이 존재한다.
플마고의 설정집에서 언급된 이 아이템은 설정상으로만 존재했지, 게임에서 직접 등장한 적은 없다.
신보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이 세계에 와서 알게 되었다.
예전에 백호군과 김신록이 친 사고에 관해 대화하던 중이었다.
―김신록은 호족의 신보(神寶)를 적호에게 사용했다.
―그거 신역에서 천 년에 한 번 정도 만들어진다는 UR급 이상의 아이템 아니야?
―그래. 최근 2천 년 동안은 나오지 않고 있다.
김신록이 한 번 손을 댄 이후 소식이 없던 신보는 호족 부부의 손에 들어간 듯했다.
직접 그들이 훔친 건지, 누군가를 경유해서 그들의 손에 들어간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신역에서 아이를 해하기 위해 우리의 보물을 사용할 생각이었나?
신보의 존재를 확인한 황명호의 눈에서 황금빛이 이글거렸다.
지금 저 황명호를 말릴 호족이 없었다.
백호군은 은광구 안에 있으나 좀처럼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적호와 김신록 그리고 신수는 죽었다.
청호와 신인은 행방을 알 수 없다.
은호는 깊이 잠들어 있으며 그 후예는 존재조차 모른다.
그런 상태에서 동족의 배신을 목도했으니 눈이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쿠구구구…….
황명호가 뿜는 분노와 살기가 이능파로 변하여 천익산을 뒤덮을 기세로 치솟았다.
호족 부부가 주춤거리며 물러났지만, 황명호로부터 도망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이사장님, 두 분의 이야기를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때, 안다인이 황명호 앞에 섰다.
안다인이 천재라고는 하지만 수천 년을 산 호족의 수장을 홀로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역량 차를 알고도 안다인은 황명호를 말리고자 했다.
―두 분이 처음부터 저를 진심으로 죽이려고 한 것 같지 않아요. 사정을 들은 후에 처우를 결정하셔도 늦지 않을 거예요.
황명호가 뿜는 이능파를 정면으로 받고도 안다인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황금빛 이능파 입자에 섞여 안다인의 긴 머리카락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그녀가 이능파의 영향권 밖에 있다고 착각할 정도다.
안다인을 응시하던 황명호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인 학생의 자비에 감사하는 게 좋겠구나.
황명호가 이능파를 거두고 평소의 이사장 흉내를 하기 시작했다.
안다인은 뒷수습을 황명호에게 맡기고 먼저 하산하기로 했다.
안다인이 호족 부부를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제 목숨을 드릴 수는 없지만, 그 아이를 위해 추모할게요. 조금이라도 두 분의 슬픔이 가라앉았으면 좋겠어요.
안다인은 다음 날 밝을 때에 다시 천익산에 올랐다.
전투를 벌였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안다인은 가면을 쓴 호족 부부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장소를 둘러보다가 솜뭉치의 무덤으로 향했다.
안다인의 손에 들린 꽃다발에는 저번에 왔을 때보다 꽃 한 송이가 더 추가되어 있었다.
[히든 퀘스트 클리어!]
히든 퀘스트는 여기까지였다.
“이게 뭐야, 보상이 뭐 이래! 꽃 하나하고 경험치 조금…… 저것들 이사장 부하인 거 같은데, 뭐 내놔라!”
계이담이 보상이 구리다며 씩씩거리곤 바로 캐릭터를 조작해 은휘관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황명호는 부재중이었다.
“0반 그놈도 이사장이었지!”
이번에는 2학년 0반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황지호도 없었다.
“템 내놓기 싫어서 도망갔냐? 아님 퀘스트에서 뭘 더 해야 하나?”
그러나 전투를 다시 하기는 싫은 건지 계이담은 히든 퀘스트에 다시 도전하지 않았다.
계이담이 맵을 돌아다니면서 이사장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인내심 없는 ‘계’새끼는 빠르게 포기했다.
그 포기를 마지막으로 공간이 일그러지다 못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군.]
옛 한국 지부장의 말에 공간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배경으로 보이던 것들이 산산이 흩어졌을 때, 이계 시뮬레이터의 보스 룸에 돌아와 있었다.
얼굴이 변하기 전, 고등학생의 모습인 계이담은 여전히 옛 한국 지부장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으…….”
계이담이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반사적으로 달려가려던 성시완이 순간 멈칫했다.
털썩.
그사이 계이담이 바닥에 쓰러졌다.
성시완의 신체 능력을 고려하면 주저하지 않았다면 쓰러지기 전에 받아 들 수 있었을 텐데, 저도 모르게 발이 멈췄나 보다.
“…….”
하지만 내용물이 어떻건 일단 후배가 쓰러진 걸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성시완이 뒤늦게 계이담을 향해 달려가 부축했다.
[저자의 기억에 의하면 게임 속에 ‘황호’가 등장한 건 방금 본 장면이 마지막이다.]
황지호가 등장한 마지막 사건인가.
저 사건을 계기로 황지호가 움직이고, 이내 사라진 건가 보다.
계이담의 기억을 통해 확인한 히든 퀘스트.
은빛 영웅이 나에게 부탁한 일.
이 둘을 토대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더 분명해졌다.
‘은빛 영웅이 내게 그런 부탁을 한 것도 저 신보 때문이었구나.’
은빛 영웅은 크리스마스에 천익산에서 움직일 것을 부탁했다.
아직 추측에 불과하지만, 정말 위험한 일이 될 것 같다.
하지만 황지호를 위해서 그리고 가면을 쓴 호족 부부를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한다.
‘호족들에게 알리기 더 힘들어질 것 같은데.’
할 일과 위험이 늘어서 호족 측에게 말하기 더 어려워졌다.
계획을 더 잘 세워서 리스크를 줄여야겠다.
[그 얼굴을 보니 저자의 기억이 도움이 된 것 같군.]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성시완과 달리 옛 한국 지부장은 침착해 보였다.
처음부터 ‘이능이 없는 세계’에 관해 빠르게 받아들인 것도 그렇고, 뭔가 이상하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죠? 그 기억을 읽었으면 물어볼 게 많을 것 같은데요.”
[너는 이능이 없는 다른 세계에서 왔다. 여기에 오는 조건은 이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 그 게임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궁금하군. 상당한 능력의 예언가겠지?]
옛 한국 지부장은 거의 완벽하게 플마고와 내 세계에 관해 이해했다.
초상우주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 같지만, 생전에 무슨 정보를 쥐었기에 저걸 바로 이해하는 걸까.
[어둠의 시대에 나는 이 땅에서 이계와 에너미를 몰아내기 위해 모든 가능성을 검토했다. 그 가능성에는 ‘다른 곳에 버리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지.]
대영웅 무쇠팔의 등장 이전에는 플레이어의 능력만으로 이계와 에너미를 관리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니 옛 한국 지부장은 싸우는 것 외의 다른 가능성을 모색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다른 곳이 한반도 밖 외국을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았다.
폐기가 곤란한 쓰레기를 지구 밖에 버리려 했던 논의가 있었던 것처럼, 옛 한국 지부장도 비슷한 시도를 한 게 아닐까?
[이능파를 이용해 생명체가 없거나 수명이 다한 세계에 저것들을 전이시키려 해 봤지. 에너지 효율이 나빠 실패했지만 말이다.]
어둠의 시대 플레이어들은 대체 어떤 싸움을 했던 걸까.
옛 한국 지부장은 다른 세계의 존재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던 모양이다.
[네 기억에서 읽을 수 없던 부분은 이 세계에 오기 전의 일들이겠지. 언젠가는 그 세계에 관해 더 자세히 알려 다오.]
옛 한국 지부장의 인사를 끝으로 지상으로 돌아갔다.
그사이에 계이담은 정신을 잃은 건지 성시완에게 업혀 있었다.
“의신아, 오늘 고생 많았어. 내가 양호실로 데려갈게.”
“도와드릴까요?”
“아니야, 먼저 들어가.”
성시완은 다소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쓰레기를 떠넘기는 기분이 들어서 미안했지만, 안 그래도 힘들 성시완을 더 곤란하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 혼자 기숙사로 돌아가기로 했다.
밤이 깊어서 그런지 선도부회관에 막 도착했을 바람이 더 차게 느껴졌다.
* * *
계이담 스스로가 기억하는 것보다 추악하고, 한심하고, 역겹고, 후회스러운 흔적이었다.
어쩌면 자책하는 마음 탓에 기억이 나쁜 방향으로 왜곡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전 세계의 모습은 계이담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흉했다.
옛 한국 지부장은 계이담의 흔적을 숨김없이 성시완과 조의신에게 공개했다.
손주에게 계이담 같은 인간이 붙어 있으면 AI라도 걱정이 되나 보다.
‘……이제 예전처럼 지내지 못하겠지.’
쓰러지는 자신을 부축하는 걸 망설이던 성시완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번에 조의신과 대련하고 양호실에 실려 왔을 때, 성시완은 계이담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떨지 모르겠다.
쓰러진 하급생을 양호실까지 데려다주긴 해도 그 이후의 일은 장담할 수 없었다.
계이담은 정신을 차리고도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이담아, 일어났어?”
“……!”
성시완의 목소리에 계이담이 눈을 번쩍 떴다.
늦은 시각이라 조명이 꺼져 있어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중앙 구역 제1양호실에 있다는 것과 성시완이 눈앞에 있다는 것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아니, 상중이 형이라고 해야 하나요?”
계이담의 옛 이름을 부르는 성시완의 목소리가 서먹하게 들렸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