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행운아 (5)
계상중.
옛날 계이담은 자신의 이름을 좋아했다.
이름으로 사용한 ‘상(桑)’이라는 한자에 행운을 상징하는 숫자 7이 세 개나 들어간 것처럼 보였으니까.
나름 애착을 품었던 이름이었는데, 지금은 그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옛 한국 지부장이 계이담의 기억을 보여 줬으니 성시완이 그 이름을 알고 입에 담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성시완이 ‘상중이 형’이라고 부르는 걸 들으니 당장 말리고 싶어졌다.
“그러지 마십시오. 말을 높이실 필요 없습니다.”
계이담이 쥐어짜듯 말했으나 성시완이 딱 잘라 답했다.
“군 복무 중, 의신이한테 연공 서열에 관해 말씀하신 걸 들었어요. 예의를 지킬 것을 요구하셨죠.”
성시완은 정중히 사실만을 말했을 뿐인데 바닥에 내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계이담의 속에서 변명의 말과 자기 연민이 무럭무럭 솟았다.
하지만 그 말을 입에 담는 게 얼마나 염치 없는 짓인지 잘 알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계이담은 성시완의 시간을 아껴 주기로 마음 먹었다.
“그걸 다 봤으면서 왜 여기에 계십니까? 저는 당신이 알던 것과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맞아요. 상중이 형은 이담이랑 많이 달라요. 이담이가 둘이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면 그 말을 믿고 싶을 정도로요.”
질려서 돌아가게 하려고 한 소리인데, 성시완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고 침대 옆 의자에 걸터 앉았다.
‘……둘이 다른 사람이라고 하면 믿고 싶다고?’
차라리 미친 척하고 지금 와서 부정해 볼까?
계이담은 곧 그 생각을 접었다.
계이담과 계상중은 동일 인물이다.
이 세계에 온 직후 기억을 잃은 적이 있다고 하나 그뿐이다.
“저는 아마 평생 상중이 형이 한 짓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상중이 형이 힘든 일을 겪은 걸 봤지만, 그래도 형 때문에 아파했던 다른 분들이 더 걱정돼요.”
성시완이 한 말은 지당했다.
계이담은 계상중이었던 시절과 달리 그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옛 한국 지부장 앞에 서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각오했던 것들을 속으로 되뇌었다.
‘지익회를 나가라고 하면 준비했던 인수인계 자료를 넘기자. 은광고를 그만두라고 하면 자퇴 수속을 밟고 검정고시를 치자. 이대로 연을 끊자고 해도 받아들이자…….’
계이담은 성시완이 무슨 말을 해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성시완이 고뇌에 빠진 계이담을 지켜보다 말했다.
“다인이가 2학년이 됐을 때, 지익회가 없었어요. 대신 지익회를 위한 추모비가 있었죠. 저는 게임에 등장하지 않은 채로 죽었나 봐요.”
옛 한국 지부장은 계이담의 과거사와 조의신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정보를 중점적으로 보여 줬다.
어차피 플마고 정보는 조의신이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으니, 조의신이 몰랐을 부분을 골라 기억을 재현한 듯했다.
정보가 적었는데 성시완은 자신이 게임 속에서 죽었다는 것을 추측해 내고, 또 담담하게 그걸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에는 그리 놀란 기색이 없었다.
플레이어답게 계속 죽음의 가능성을 생각했던 걸까?
‘내가 이런 인간이라는 걸 알았을 때에는 놀란 주제에……!’
성시완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계이담을 계속 관찰하다가 물었다.
“어차피 다 죽을 거니까, 그래서 처음에 사람과 엮이는 걸 거부한 건가요?”
“아닙니다!”
계이담이 쇳소리 섞인 음성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성시완을 비롯한 이들이 죽는다는 걸 알았다면 계이담은 주변과 엮이기를 거부하고 도망갔을 거다.
계이담은 부정하긴 했지만, 그뒤에 변명이 될 법한 말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다시 입을 다물었다.
“……상중이 형과 이담이는 정말 다른 사람 같네요.”
계이담의 반응을 하나하나 살피던 성시완이 말했다.
“나는 앞으로도 이담이를 귀찮게 하면서, 이담이가 상중이 형처럼 되지 않게 막을 거야.”
계이담은 귀를 의심했다.
성시완이 갑자기 말을 놓았다.
마치 계이담을 대할 때와 같은 말투로 말했다.
그것도 계상중 시절의 역겨운 모습을 보고도 계이담을 옆에 두겠다는 내용을 입에 담았다.
“의신이의 친한 동생이 혼쭐을 냈는데도 상중이 형은 변하지 않았잖아. 그냥 벌을 받는 것만으로는 안 될 거야. 지켜보지 않으면 언제 이담이가 상중이 형처럼 변할지 모르니까 걱정 돼.”
계이담은 말문이 막힌 채로 성시완을 바라봤다.
“누구나 숨기고 싶고,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흉한 부분이 있어. 그런데 그걸 다 보여 줬잖아. 이담이는 하더라도, 상중이 형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야. 난 계속 네가 이담이인 채로 있었으면 해.”
계이담의 눈에서 툭, 툭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우는 소리를 참기 위해 끅끅 하고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성시완은 평소답지 않게 계속 엄격한 말투로 말하고, 우는 계이담을 조금도 달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모든 말이 다정하게 들려서 계이담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의신이한테는 진심으로 미안해했으면 좋겠어. 이미 늦은 데다 의신이는 사과를 받을 마음이 없어 보이니 용서를 구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네…….”
“크리스마스에 큰일이 일어나는 거지? 난 도망 안 갈 거야. 너도 싸워.”
“네…….”
“그런데 군대에 있을 때나 플마고 게임 할 때 사격을 그렇게 못했으면서, 왜 무기로 총을 골랐어? 다인이가 정말 좋았나 봐. 앞으로 위험한 일이 많이 생길 테니 무기 바꿔.”
“네, 네…….”
“이담아, 해머 계열 무기는 어때? 망치 잘 휘두르니까 그걸로 하자.”
성시완은 후배더러 사용하는 무기를 바꾸라고 강요하는 선배가 아니었는데, 저렇게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계이담은 성시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하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눈물이 멎었을 땐 어느새 날이 밝아 있었다.
성시완은 여전히 앞에 있었다.
그 광경을 보니 옛날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지만,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저는 행운아네요.”
성시완이 예전보다 엄격해지고, 그에게 경계심을 품고, 계상중 시절의 자신을 경멸하더라도.
성시완이 이렇게 곁에 남은 것만으로도 과분한 행운이었다.
* * *
축제 이틀째.
아침에는 다소 나른했는데 축제 분위기에 섞여 걷다 보니 컨디션이 회복되었다.
‘그래도 몇 시간은 자서 그런가.’
어제 은빛 영웅에게 부탁을 받았다.
거기에 이어 밤에는 계이담의 기억 재현이라는 불쾌한 경험을 하는 대가로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둘을 엮어 계획을 이것저것 수정하고 나니 수면 시간이 줄었다.
잠을 별로 못 잔 건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의신아, 좋은 아침이다. 어제 야근을 해서 그런지 해를 보니 눈이 아프구나.”
중앙 구역의 협회 부스 앞.
먼지 하나 붙어 있지 않은 코트를 차려 입었지만, 눈에 핏발이 서서 퀭한 인상을 주는 홍규빈이 나를 맞이했다.
어제와 달리 협회 부스에 사람이 이렇게 몰린 건 홍규빈의 덕이 큰 것 같다.
협회 부스는 방문객으로 북적거리고 송대석은 신이 나서 열심히 유인물과 데이터 칩을 배포하며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유인물을 보니 플레이어 포인트(Player Point)의 약자, ‘PP’가 작게 쓰여 있는 게 보였다.
‘부스 행사 참가에 플레이어 포인트를 걸었구나. 하루만에 결재를 받다니, 홍규빈이 일을 잘하네.’
플레이어 포인트는 플레이어의 토벌 실적 등을 토대로 협회가 부여하는 포인트로 협회 제휴 상점이나 협회에서 진행하는 경매 등에서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협회의 부스에서는 위성 앱 다운로드, 설명회 참가, 송대석이 작성한 퀴즈풀이 같은 미션을 수행하면 소량의 PP를 지급하는 이벤트를 하는 중이다.
축제를 즐길 겸 플레이어 포인트를 얻을 겸 가벼운 마음으로 부스에 온 이들이 많았다.
“하하하하! 오늘은 협회 부스에 사람이 많군.”
“사진 다시 찍자.”
“그게 좋을 거다. 어제 찍은 사진은 방문객이 한 명도 찍혀 있지 않았으니까.”
기사에 쓸 사진을 새로 찍는 사이, 상영회 당번이 막 끝난 김유리와 권레나가 협회 부스에 놀러왔다.
“우와, 줄 엄청 길다.”
“우리 때문에 괜히 더 붐비는 거 아니야?”
두 사람은 민그린의 부탁을 받고 여기에 온 것 같았다.
어제 처참한 협회 부스의 상황과 송대석의 기죽은 모습을 본 민그린이 협회 부스에 들러 달라고 했는데, 나한테만 그 이야기를 한 게 아닌 모양이다.
‘민그린 쪽은 대성황이었으니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더 들었겠지.’
협회 부스에 들르기에 앞서서 민그린의 합동전을 보고 왔는데, 이른 시각부터 사람이 많았다.
이번 합동전에서 발표한 작품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비록 작품 수는 적어도 민그린의 천재성을 느끼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붓이 종이 위에 남긴 흔적으로 한 사람이 보고 경험한 세계를 공유할 수 있다니,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홍규빈이 플레이어 포인트를 미끼로 걸고, 홍보 자료를 세련되게 다듬어도 방문객수로 민그린 쪽을 이기기는 어려울 거다.
“그때 방송국에 온 이레나의 언니를 기억하니?”
홍규빈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홍규빈의 시선 끝에 송대석과 이야기를 나누는 김유리와 권레나가 있었다.
‘이여름을 말하는 건가?’
그야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권레나와 호적상 자매 관계인 이여름.
그녀는 남궁물산 이계 산업 1사업부 소속으로, 방송국 사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홍규빈은 1사업부를 대상으로 압수 수색을 진행한 바 있다.
“네.”
“그래, 의신이는 기억력이 좋구나.”
홍규빈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말을 아꼈다.
홍규빈은 출신 탓에 남궁 그룹 조사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중간에 조사를 중단해서 진위를 알 수 없지만, 뭔가 걸리는 게 있나 보다.
‘무슨 일이 생기지 않나 지켜보라는 거겠지.’
플마고 속 권레나는 2학년이 된 시점에 악역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호적상 언니인 이여름은 홍규빈이 주시하는 인물 중 하나다.
이 둘 사이에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닐까?
가설을 세우는 사이, 홍규빈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열심히 일했으니 이제 제갈재걸 선생님을 뵈면서 쉬어야지!”
실물을 보러 가는 걸까, 전시회 쪽의 가짜를 보러 가는 걸까?
어느 쪽이든 나와 상관 없는 일이니 홍규빈에게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제갈재걸 선생님?”
홍규빈이 피곤한 김에 헛것을 보고 저러는가 싶었는데, 진짜로 제갈재걸이 와 있었다.
홍규빈은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냉큼 제갈재걸을 향해 뛰듯이 향했다.
“제갈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 언론 홍보실 언론 1팀 팀장 홍규빈입니다.”
“압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홍규빈은 꿋꿋하게 자기 소개를 하고 제갈재걸에게 열심히 말을 걸었다.
제갈재걸이 플레이어 포인트를 모으자고 온 건 아닐 텐데, 왜 여기에 온 걸까.
혹시 협회 부스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뒤늦게 나와 같은 의문이 솟은 건지 홍규빈이 뒤늦게 걱정스럽게 물었다.
“협회 부스에는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추가 이벤트 계획은 자치 기구에 전달했습니다만…….”
홍규빈이 말꼬리를 흐리자 제갈재걸이 대답을 머뭇거렸다.
토트의 가호를 받은 제갈재걸은 진실만을 말할 수 있다.
진실을 입에 담지 않으려면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는 의문문으로 질문을 던지거나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다.
제갈재걸은 침묵을 지키려 했지만, 퀭해 보이는 얼굴로 걱정스럽게 묻는 홍규빈을 내버려 두지 못했다.
“……그냥 제자가 준비한 곳은 다 돌아보고 있습니다.”
제갈재걸이 방문한 걸 보고 이쪽으로 온 송눈새가 눈치 없는 소리를 했다.
“나는 저 선생님 수업 안 듣는데?”
“아, 대석아! 앱 설정 부분에서 헷갈리는 게 있어!”
눈치 빠른 김유리가 이 자리에서 빠져야겠다고 느꼈는지 송대석에게 말을 걸렸다.
협회 부스에서 일하는 은광고 학생은 송대석 하나, 나머지는 전원 협회 소속 연구원 플레이어다.
협회 부스를 준비한 이들 중 제갈재걸의 제자는 홍규빈 하나인 건지, 혼자 야근의 피로가 완전히 날아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역시 제갈재걸은 좋은 선생님이구나.’
흐뭇해진 마음으로 어제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1학년 구역으로 향했다.
1학년 구역은 전쟁을 앞둔 분위기였다.
“용제건 선생님, 이벤트에 참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
안다인의 말에 용제건은 실눈을 휘며 웃었다.
안다인 뒤에 서 있는 1학년 1반 아이들은 전부 손에 무기 타입으로 추정되는 아이템 카드를 들고 있었다.
학교 축제 이벤트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잠시 후, 1학년 1반과 용제건 선생님의 대결이 진행됩니다. 대결 도전자를 제외한 분들은 안전을 위해 바리케이드 밖으로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
안내 방송에서는 대놓고 대결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