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행운아 (6)
김신록은 축제 기간 내내 바빴다.
지익회 업무가 밀린 것도 아니고, 1학년 1반과 축제를 같이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축제를 즐기는 것도 아니었지만 좀처럼 쉬지 못했다.
팔락, 팔락.
김신록은 낡은 일기장의 페이지를 신중하게 넘기며 내용을 살폈다.
‘용’이라는 단어가 보일 때마다 집중해서 일기장을 읽었다.
지금 김신록이 읽고 있는 건 용제건이 산행 중에 딴짓을 했던 날의 이야기였다.
비행술 없이 산을 타서 누가 먼저 정상에 오르는지 내기를 했던 날인데, 김신록이 먼저 도착해 한참을 기다려도 용제건이 오지 않았다.
처음엔 이겼다는 사실에 기뻐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용제건이 오지 않아 걱정하게 되었다.
찾으러 가려 할 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용이 여의보주로 기적을 일으켜 마른 산천에 비를 내린 거였지. 그 덕에 산 아래 마을이 흉작을 면했고.’
김신록이 용제건을 찾기 위해 비 오는 산을 헤매는 사이, 용제건이 냉큼 정상에 오르는 바람에 내기가 엉망진창이 되었다.
정상에 오른 용제건은 비를 멈추고 ‘정상에서 먼저 기다리는 게 승자라고 했잖아.’라며 김신록을 약올렸다.
김신록은 옛일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다가 연필을 쥐고 원고지에 그날 있던 일에 관해 써 내렸다.
‘이 글을 모아 축제 중에 출력해서 배포하면 그 용의 인지도가 상승할 거야. 그럼 신격이 더 오를 거고, 더 빨리 상위 존재가 되겠지.’
용제건의 소원을 알게 된 이후, 김신록은 여의보주가 한반도에서 일으킨 기적들을 문서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일기장의 내용 대부분이 용제건의 장난질에 관한 것들이었지만, 드물게 여의보주다운 행보가 남아 있었다.
가끔 용제건이 남긴 어처구니 없는 행적에 헛웃음이 나왔으나 웃음은 금방 말랐다.
‘대체 언제부터 신격을 쌓아 온 걸까.’
사방신 중 하나로 여겨지는 호족 최고의 무재 백호.
한반도에서 5천 년가량 호족의 수장으로 지낸 황호.
신화시대부터 이름을 남긴 두 호족은 마음만 먹으면 상위 존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신성을 부정하고 호족으로 남는 것을 선택했다.
그 둘이 신성을 부정했으니 김신록은 용제건도 제 신성을 부정했을 거라고 단정 지었다.
김신록의 눈에는 용제건이 백호와 황호보다 현세에서의 삶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당연히 신이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게 착각이었다는 생각에 김신록은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김신록은 늦게나마 친우가 소원을 이루도록 돕기 위해 서적화 작업을 서둘렀다.
다음 페이지는 용제건이 ‘악몽의 티끌’을 구해 온 날의 일이었다.
‘양족의 영역에서 인섬니움이 남긴 악몽의 티끌이 발견되었다고 했어.’
양족의 수장은 꿈을 통해 다른 세계로 건너가 악몽의 티끌을 묻으려 했다.
그러나 양족의 수장이 티끌을 품고 잠에 든 순간, 무서운 속도로 정신이 침식되는 바람에 바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꿈에 티끌을 가져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골머리를 썩던 중에 용제건이 나타났다.
용제건은 양족에게서 소원을 접수해 여의보주의 권능으로 악몽의 티끌을 이 세계에서 지웠다.
하지만 티끌 전부를 지운 건 아니었다.
‘그 용이 고문에 도움이 될 거라고 선물해 줬지.’
용제건은 ‘티끌을 처리해 주겠다는 소원은 들어줬어.’라며 악몽의 티끌을 조금 남겨 김신록에게 건넸다.
양족에게 빚을 만들고 김신록에게 유용한 선물을 넘겨 생색낼 수 있다며 용제건이 매우 들떠 있었다.
악몽의 티끌은 웅족의 고문에 아주 잘 써먹었지만, 하는 꼴이 상당히 얄미웠다.
‘……전부 다 읽었다.’
어느새 일기를 다 읽었다.
김신록의 앞에는 글씨가 빼곡하게 들어찬 원고지 더미가 놓여 있었다.
디바이스로 원고지를 스캔하자 연결한 인쇄 기기에서 사전에 입력한 양식으로 책을 찍어 내기 시작했다.
곧 A6판, 문고 크기의 책이 완성되었다.
시안색 표지 위에는 딱딱한 글꼴로 ‘여의보주의 기적’이라고 쓰여 있었다.
‘표지에 좀 더 신경 쓸걸. 축제 후에 배포하는 버전은 디자인을 바꿀까?’
용제건이 승천하기 전에 그 밉상인 얼굴을 표지에 박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김신록은 제일 먼저 인쇄된 ‘여의보주의 기적’을 자신의 서랍에 보관한 후, 몇십 권을 챙겨 1학년 건물 쪽으로 향했다.
‘축제 첫째 날은 놓쳤지만, 둘째 날에는 배포할 수 있겠다. 반 아이들이 1학년 구역 운동장에서 이벤트를 진행한다고 했으니 보러 갈 겸, 책을 나눠 줄 겸…….’
그때, 갑자기 들린 안내 방송으로 인해 김신록의 사고가 중단되었다.
―잠시 후, 1학년 1반과 용제건 선생님의 대결이 진행됩니다. 대결 도전자를 제외한 분들은 안전을 위해 바리케이드 밖으로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
누구와 누가 대결한다고?
김신록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느라 복도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 * *
1학년 1반의 이벤트 개시 시각이 가까워지자 우리 반 아이들이 모였다.
맹효돈과 한이가 좋은 자리를 맡고 있던 덕에 운동장 전체가 잘 보였다.
“하하하! 제법 전망이 좋군. 고생 많았다. 선물이다.”
“오, 이거 맛있다. 무슨 빵이냐?”
“사과 잼을 곁들인 퀸 아망이군요. 2반이 운영하는 베이커리 카페에서 파는 걸 봤습니다.”
“음…… 용제건 선생님이 우리 반 부담임이니까 응원해야겠지? 그런데 다인이 응원도 하고 싶어.”
“그럼 양쪽 다 응원하죠!”
“그러자! 아, 대석이도 왔다. 부스에 사람 많던데 괜찮아?”
“팀장님이 맡아 준대.”
반 아이들이 다 모였을 때, 종이 가방을 양손에 든 김신록이 1학년 1반 쪽으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종이 가방 안에는 손바닥만 한 시안색 책자가 가득 차 있었다.
한이가 골라 온 토피넛 플랫화이트를 신나게 마시던 황지호가 그걸 보고 갑자기 인상을 썼다.
“……결국 그걸 완성했나 보군.”
“그거?”
“용제건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이후, 저 용이 이루어준 소원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 김신록은 그가 이룬 기적을 널리 알려 여의보주의 인지도를 상승시킬 생각이다.”
용제건의 숨은 비화에 관한 책인가!
김신록이 용제건에게 상위 존재가 되도록 돕겠다고 말한 건 진심인 듯했다.
김신록의 성격을 고려하면 용제건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기적에 관해서도 자세히 기록했을 게 분명하다.
서적을 나눠 줄 생각인 것 같으니 반드시 챙겨야겠다.
그런데 챙기긴 하겠다만, 저 서적이 만들어진 목적을 생각하면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다.
“김신록의 시간을 낭비시킨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몸은 1학년 1반을 응원하겠다.”
“너 1반 담임 선생님 팬이었어?”
“하하하하!”
한이가 나눠 주는 음료를 받으러 가까이 왔다가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입수하게 된 독고미로가 미묘한 얼굴을 했다.
황지호가 처웃자 독고미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한편, 김신록의 서글서글한 얼굴에 수심이 엿보였다.
“방송 들었다. 대결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니?”
“선생님, 어서 오세요. 용제건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이벤트 시연을 할 예정이에요.”
안다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김신록을 맞이했다.
안다인의 완벽하고 따뜻한 인사에 김신록은 자신이 방금 방송을 잘못 들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상훈이가 제일 좋은 자리로 안내해 드릴 거예요.”
김신록은 결국 대결을 말리는 데에 실패하고 유상훈과 함께 우리 쪽으로 왔다.
역시 우리 반이 앉은 곳이 제일 좋은 자리였나 보다.
“야, 빵 남은 거 있냐?”
유상훈이 여전히 어딘가 얼이 빠진 김신록과 함께 우리 반 쪽에 눌러 앉았다.
유상훈은 김신록의 감시, 아니, 안내역을 맡느라 저 대결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는 듯했다.
찰깨빵을 먹으며 구경하는 모습이 느긋해 보였다.
그와 대조적으로 운동장 쪽 분위기는 매우 날이 서 있었다.
“이벤트를 시작하기 전에 용제건 선생님께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요.”
“안내 방송에서는 대결이라고 한 것 같은데.”
안다인과 용제건은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지만 둘에게서 느껴지는 패기에 관객들이 숨을 죽였다.
“용제건 선생님은 1학년 1반의 학급 행사에 관심이 많으셨죠.”
“응, 재미있는 기획이 많던데.”
1학년 1반은 남다른 결속력을 자랑해 자체적으로 기획한 학급 행사가 많았다.
내년 봄방학 여행 계획까지 잡혀 있는 상태라고 들었다.
어찌나 빈틈없이 계획을 짠 건지, 담임 교사의 인솔이 필요하다는 점을 학교 측에 강력하게 어필하여 김신록의 동행 약속을 받아 낸 상태라고 한다.
아무래도 반장 안다인의 통솔력과 카리스마의 힘이 큰 것 같다.
유상훈처럼 그다지 의욕이 없는 인간이 부반장으로 있는데도 저렇게 단합이 잘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만일 용제건 선생님이 경쟁 이벤트에서 저희 반을 이기시면, 언제든 원하는 행사에 참가하셔도 좋아요.”
“그거 괜찮네. 그럼 지면 어떻게 되는데?”
용제건의 행적을 미루어 보면 ‘앞으로 김신록을 귀찮게 하지 마라’, ‘김신록에게 장난치지 마라’ 이런 내용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안다인의 제안은 상당히 온건했다.
“저희 반 아이들과 김신록 선생님이 대화 중일 때,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고작 그런 걸 부탁하려고 이런 이벤트를 개최했나?
유상훈이 했던 말에 의하면 1반 내 여론은 상당히 험악했다.
용제건이 시비를 걸어 김신록이 힘들어하니 공격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관찰한 결과, 둘이 진짜 친우 사이라고 판단해서 교우 관계에 개입하지 않기로 한 걸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벤트를 기획한 걸 보면 용제건을 향한 공격 의지는 꺾이지 않은 듯 하지만.
‘적어도 1반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김신록이 용제건한테 시비가 걸리지 않게 막아 주려는 걸까.’
용제건은 안다인이 저런 말을 할 줄 예상치 못한 듯했으나 몹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방해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거야?”
“우연을 가장해서 갑자기 등장해 놀래키거나, 어딘가에서 보고 계시다가 디바이스로 연락을 넣는 등 담임 선생님의 집중력을 흐트리는 행위를 일체 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구체적인 사례를 드는 걸 보니 용제건이 무슨 짓을 하며 김신록과 1반 아이들에게 장난질을 쳤는지 짐작이 갔다.
용제건은 안다인이 제시한 조건을 듣고 난 후 의욕이 더 솟은 건지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좋아. 그러면 룰에 관해 설명해 줄래?”
“1학년 1반이 준비한 이벤트는 ‘보물 사냥’이에요. 보물찾기를 좋아하신다는 용제건 선생님께 맞춰서 준비했어요.”
언뜻 듣기엔 보물찾기를 개최한다고 하지만, 보통 보물찾기에 ‘사냥’이라는 말은 안 붙이지 않나?
안다인은 조용히 룰을 설명했다.
룰은 간단했다.
맵에 랜덤하게 출현하는 에너미를 토벌하며 보물을 획득하고, 상대를 사냥할 것.
“전부 살상력이 없는 무기로 준비했어요. 직격당하면 조금 아프겠지만요. 하지만 대련 중에 어느 정도 데미지를 입는 건 흔한 일이죠.”
안다인이 예시로 제시한 무기를 보니 직격당하면 조금이 아니라 많이 아플 것 같은데.
실탄이 아닌 BB탄도 경우에 따라서는 살을 찢지 않는가.
‘안다인이 용제건에게 쌓인 게 많나 보네. 그래도 이렇게 건전하고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해소하는 게 역시 타이틀 히로인답다.’
보물 사냥 룰 설명이 계속되었다.
승패의 결정은 획득한 점수에 따라 갈린다.
제한 시간 동안 쓰러뜨린 에너미의 수.
획득한 보물의 수.
그리고 상대에게 입힌 데미지를 점수로 환산한다고 한다.
‘1반 아이들은 일종의 경쟁형 이계 공략 시뮬레이션을 제작한 거구나.’
이 이벤트를 준비한 동기는 김신록과 용제건 때문이겠지만, 결과물이 지나치게 훌륭했다.
보물 사냥은 이계 공략 시뮬레이션을 대전 게임 형식으로 재해석한 거다.
좀 더 다듬으면 전투 훈련에 도입할 수 있을 것 같다.
“근사한 걸 만들었군.”
황지호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언젠가 은광고의 커리큘럼에 보물 사냥을 통한 전투 연습이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이벤트 맵과 보물이 숨겨진 장소는 협회에서 제공하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통해 랜덤하게 결정될 거예요. 용제건 선생님이 원하시면 지정하는 프로그램을 사용하겠습니다.”
“공정성을 의심할 리가 없지. 다인이는 김신록 선생님의 제자잖아.”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동장에 설치된 이계 시뮬레이터에서 입자를 분사하며 프로그램 가동을 준비했다.
야외에서 이계 시뮬레이터를 전개하면 체육관 전체를 사용할 때에 비해 텍스처 품질 등이 떨어지지만, 내부 상황을 관전하기가 편해진다.
1학년 1반은 대중 앞에서 용제건과 당당하게 승부하는 길을 택한 거다.
그때, 성국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옛날 생각이 나네. 0반 동창들의 장래희망은 대부분 드래곤 슬레이어였다.”
용제건 토벌은 김신록의 제자들의 공통된 목표였나!
설마 성국언도 드래곤 슬레이어가 장래희망이었을까?
궁금해서 나도 모르게 물었다.
“의원님은 어땠나요?”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다면 아마…….”
성국언은 농담을 하는 것처럼 웃었지만, 어쩐지 진담처럼 들렸다.
그런데 성국언이 이틀 연속 은광고 축제에 오다니 예상 외였다.
전무영은 김신록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는데, 좀 피곤해 보였다.
혹시 무리하게 일정을 조정한 게 아닐까?
‘체스 대국 중에 용제건에게 무슨 말을 들었기에…….’
그때, 심판 역을 맡은 학생회 고문, 0반 판독기로 유명한 교사가 화면을 조작했다.
그러자 카운트다운을 알리는 숫자가 표시된 홀로그램이 운동장 곳곳에 떠올랐다.
“곧 시작할 것 같아요!”
“다인아, 파이팅!”
“하하하하! 1학년 1반, 승리를 쟁취하도록!”
“아무나 이겨라.”
숫자가 0으로 바뀐 순간, 바리케이드 너머의 공간이 흔들리다 거대한 성채를 비추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