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축제의 끝 (2)
플마고를 하며 궁금했던 게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의문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게임은 끝났다.
그리고 이 세계로 와서 황지호와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적당히 납득하고 넘겼던 어느 의문이 더 깊어졌다.
‘황지호는 왜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에 등장하지 않은 걸까?’
처음에 나는 황지호가 태만했던 탓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플마고 속 행적만 따져 본 건 아니다.
이 세계에 와서 만난 황지호는 의욕이 없어 보였고, 학교가 어찌 돌아가든 무관심한 듯했다.
황지호의 태만을 이유로 들면 앞뒤가 전부 맞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매일같이 처웃는 노친네를 보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정말로 황지호가 태만했던 걸까?’
황지호가 나태했던 건 사실이지만, 변할 계기가 있었다.
은광고에 웅족이 침입하여 조카나 다름없는 후예가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
작년 은광고 입학 실기 시험이 치러진 날 이후로 황지호는 변했을 것이다.
후예를 아끼고, 웅족을 증오하고, 신역의 위엄을 중요하게 여기는 황지호가 계속 태만하게 구는 건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순이 발생한다.
왜 내가 처음 황지호를 찾아갔을 때, 황지호는 바로 협력하지 않은 걸까?
노친네가 0반 생활을 하면서 내 덕분에 변했다는 둥 헛소리를 했지만, 본성은 원래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그렇다면 황지호가 처음에 내게 그런 태도를 보인 이유는 하나일 거다.
‘처음에는 나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나 같아도 바로 믿지 않았을 거야.’
황지호는 웅족의 배신을 겪었다.
김신록을 구하긴 했지만, 처음 보는 인간을 쉽게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쩌면 웅족과 결탁해 촌극을 준비하고, 호족의 은인을 차지하려는 술책을 꾸민 게 아닌가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황지호는 김신록과 무슨 관계인지 밝히지 않고 떠보는 소리를 하며 쉽게 손을 빌려주지 않았던 게 아닐까?
‘황지호가 그 사건을 조사하고, 배후를 캐던 중이었다 해도 내 앞에서는 절대 티를 내지 않았겠지.’
최편득을 박살 내고 은호의 후예들을 구한 사건을 계기로 믿음을 준 것 같긴 하지만.
그 이후에는 태도가 크게 바뀌어 툭하면 은인 소리를 하는 바람에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내 추리가 전부 사실이라고 하면 더 어려워지는 문제가 있다.
‘흑막은 대체 어떻게 황지호를 퇴장시킨 거지?’
황지호의 태만은 김신록을 습격한 시점에서 끝났다.
플마고 속 황지호는 방심은커녕 경계심이 최고조로 올라간 상태였을 거다.
나는 계속 황지호를 죽이는 방법을 생각해 봤다.
어지간한 진족의 힘으로도 황지호를 잡는 건 힘들 거다.
12지 동맹 회담 당시 제멋대로 굴던 다른 수장들조차 황지호의 힘에 경의를 표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어떻게든 황지호를 잡아야겠다면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들일 거야.’
체스보드에서 킹을 붙잡기 위해 수많은 수를 쌓아 올리는 것처럼.
황지호는 풀스메이트나 스콜라메이트같이 적은 수로 붙잡을 만한 상대가 아니다.
과연 이게 킹을 노리기 위해 두는 수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신중하게 수를 거듭해 체크메이트를 외쳤을 거다.
처음에는 김신록을 죽이고, 그 뒤에는 은광고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은광고를 고립시키고…….
그 수많은 수 중 하나가 퍼스트 크리스마스였을 거다.
‘퍼스트 크리스마스를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황지호가 사건에 개입하지 못하게 막아야겠지.’
적호가 개입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고 하나, 신역이 흑막의 손에 놀아나고 친우의 목숨이 달려 있으니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거다.
적을 속이기 위해 태만한 척 굴었다고 해도 위장을 풀고 적호를 구하고 은광고 학생들을 지키는 게 황지호다웠다.
황지호가 한반도에 있었다면 분신을 움직여 은광고에 도달하고, 언제든 분신과 본신을 교체할 수 있는 권능을 활용해 본신으로 등장했으리라.
그럼에도 황지호는 나타나지 않았다.
‘황지호는 그때 흑막이 둔 수로 인해 한반도 밖에 있던 게 아닐까?’
황지호는 해외 취재 여행을 조기에 마치고 돌아올 때, 자신의 권능에 관해 말했다.
황지호의 분신은 한반도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본신이 한반도 밖에 있다면 분신과 본신의 교체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거기에 덧붙여 이런 발언을 했다.
―체스보드와 떨어진 상태에서는 킹으로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하고, 분신에도 제약이 생겨. 한반도 밖에서 분신을 움직이는 건 꽤 까다로워. 비유하자면…… 이능파로 뇌와 손 모양을 구현하여 체스를 두는 감각이야.
―사고 능력도, 스킬의 정밀성도, 집중력도 크게 떨어지지. 그래서 중요한 일은 전부 처리하고 이번 해외여행에 나선 거다.
한반도 밖으로 본신이 나가면 분신의 능력은 크게 떨어진다.
그걸 생각하면 이런 결론이 나왔다.
황지호는 크리스마스 당시 한반도 밖에 있던 게 아닐까?
이 결론대로라면 황지호가 은광고의 상황을 인지했는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분신을 동원해 적호와 학생들을 돕는 건 불가능했다.
백호군이 백아를 휘둘러도 결계를 부수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성능이 저하된 황지호의 분신이 결계를 뚫는 건 어려울 테니까.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를 대비해 황지호를 한반도 밖으로 유인했구나.’
흑막은 원하는 시기에 황지호가 신역을 비우게 하기 위해서 비장의 수를 준비했을 거다.
그 수가 바로 청호와 신인의 흔적인 듯하다.
내 생일을 축하한답시고 전용기를 타고 영국으로 날아오는 놈인데, 소식이 끊긴 옛 친우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면 가만히 있을까?
플마고의 황지호는 그 흔적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움직였을 것이다.
‘흑막은 청호와 신인의 행방에 관해 알고 있었어. 그 단서는 아마 진짜였겠지.’
청소년 수련회 때 흑막의 사주를 받아 움직이던 웅족 수장의 오른팔, ‘흉내꾼’은 청호와 신인이 인간이 된 걸 알고 있었다.
흉내꾼이 알고 있는 걸 흑막이 모를 리가 없었다.
흑막은 철저하게 숨기고 아끼던 수를 적절한 때에 터뜨려 황지호를 움직인 거다.
“각오는 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대비하기 위해 모였던 날, 네가 말하지 않았더냐. 상대는 내 움직임을 봉인할 수를 둘 거라고.”
퍼스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호랑이 저택에서 회의를 할 때.
적호와 용제건의 리플레이, 나와 은호가 기억하는 플마고 속에서 황지호가 크리스마스에 등장하지 않은 걸 다들 의문으로 여겼다.
줄곧 흑막이 어떻게 황지호를 퇴장시켰는지, 어떻게 하면 황지호를 죽일 수 있는지 생각해 온 덕에 가설이 쉽게 나왔다.
“하지만 그 교활한 자가 이 몸과 정면 대결을 했을 리가 없고, 한반도 안에서 내 분신과 본신을 전부 봉인할 수단 또한 없을 거라고 했지. 너는 그자가 한반도 밖으로 이 몸을 유인할 계책을 세웠을 가능성이 크다 예상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그러했다.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점에서 흑막이 황지호의 숨통을 끊을 방법은 없다.
황지호의 권능은 강력하고, 흑막은 아직 은광고를 장악하지 못했으며 죽여야 할 상대를 다 죽이지 못했다.
적어도 황지호는 2학년 말까지는 무사할 것이다.
흑막이 황지호를 완전히 퇴장시키기 위해선 은빛 영웅이 우려한 일이 벌어지고, 그 후로도 수를 더 둬야 할 거다.
“이 몸은 청호와 신인의 행방과 단서를 잡기 위해 진족들도 탐할 만한 현상금과 보물을 걸었다. 제보는 가끔 들어왔지만, 직접 보고를 받을 만한 수준의 것은 단 하나도 없었지. 오늘까지는.”
청호와 신인이 자취를 감춘 건 대단한 비밀도 아니니 진족 사이에서 현상금과 보물을 걸어 찾고자 한 건가.
황지호가 대체 무엇을 걸고 어떤 과정을 거쳐 보고받을 만한 제보를 선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설마 황지호가 그 단서를 잡겠다고 해외로 향하는 건 아니겠지?
황지호가 한반도 밖으로 가겠다고 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 단서를 잡기 위해 움직였겠지.”
황지호의 곱상한 눈에 결연한 빛이 어려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동요와 분노를 가라앉힌 황지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 몸은 가지 않는다. 청호와 신인은 나의 은인이 찾아 준 지 오래다.”
황지호가 그 말을 마친 후에는 여유를 완전히 되찾았다.
내 품에서 벗어난 게 쓸쓸한 듯 뚱한 얼굴을 한 올무의 리드를 고쳐 잡고는 말을 이었다.
“그자가 둔 수를 알았으니 역으로 이용할 수 있겠군. 분신으로 은호와 상담하고 있겠다. 곧 은광고의 차기 홍보 대사 발표가 있으니 서두르도록.”
차기 홍보 대사…… 그 말을 들으니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꼭 그 말을 했어야 했나?
염준열과 다른 차기 홍보 대사들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발을 움직였다.
이동한 곳은 학생회관 내부에 마련된 스튜디오였다.
“다음 해 은광고를 대표할 차기 홍보 대사를 소개합니다.”
“화면 너머로 보고 있는 분들께서도 부디 박수로 맞이해 주시길 바랍니다.”
차기 홍보 대사 소개는 스튜디오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다.
방송은 교내 각지에 설치된 홀로그램과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스트리밍된다고 한다.
사회를 맡은 건 올해 홍보 대사를 한 염준열과 연가람이었다.
두 사람의 물 흐르는 듯한 진행 속에 떠밀려 카메라 앞에 서게 되었다.
‘내가 여기에 있을 필요가 있나?’
나를 제외한 차기 홍보 대사는 주수혁, 안다인, 독고미로.
이 셋의 화제성과 인기를 고려하면 내가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는데.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생각을 고쳐 잡았다.
‘저 세 명을 돕는다고 생각하자.’
또, 도와야 하는 대상은 저 셋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내년 홍보 대사는 한 명 더 있었으니까.
“다음 해부터는 특별히 선생님도 홍보 대사를 맡게 되었습니다. 교사 중에서 처음으로 은광고 홍보 대사를 맡으실 분은 바로…….”
염준열이 운을 떼자 카메라 프레임 영역 밖에 서 있던 이가 걷기 시작했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등장한 이는 바로, 제갈재걸이었다.
‘교사진 중에 후보가 더 있었다고 들었는데, 결국 제갈재걸이 됐구나.’
연가람이 뿌듯해하는 목소리로 제갈재걸을 소개했다.
“진실만을 고하는 시인, 말씀 한마디가 남옥처럼 빛이 나는 플레이어, 남옥시인(藍玉詩人) 제갈재걸 선생님입니다!”
지금쯤 2학년 0반 선배놈들과 협회 부스에 있을 홍규빈이 비명에 가까운 환성을 지르지 않았을까.
제갈재걸은 느루에서 새로 맞춘 듯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남청색의 재킷에는 제갈재걸의 이명에 포함된 남옥, 아콰마린이 장식되어 있어 매우 화려했다.
도저히 평소에 입을 만한 디자인이 아니었으나 제갈재걸은 과감한 착장을 무난히 소화해 냈다.
‘느루의 디자인은 정말 괜찮은데…….’
느루의 수석 디자이너 서돌은 별로 괜찮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물론 옷과 모델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므로 홍보 대사를 소개하는 생방송을 마친 뒤, 잊지 않고 제갈재걸과 사진을 찍어 뒀다.
차기 홍보 대사들과 함께 학생회관을 나서려 할 때였다.
“의신아, 잠깐만.”
염준열이 나를 불러 세웠다.
용족 매니저가 촬영을 대비해 철저히 준비한 건지, 염준열은 메이크업과 헤어 세팅을 받은 상태였다.
멀리 사회자 석에 있는 걸 볼 때에도 감탄이 나왔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내 제자가 얼마나 잘났는지 실감이 났다.
“마침 그분이 오셨어. 이야기하고 가지 않을래?”
염준열은 축제 때 소개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서 시간을 내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 대상은 염준열의 스승 중 하나, 방랑벽으로 유명한 용.
염준열은 지금 그 용을 소개시켜 줄 생각인가 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