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88화 (584/925)

81. 축제의 끝 (3)

황명호 대저택의 현대식 별채.

별채에서 가장 조도가 낮은 객실 안.

이계 금속, 직물, 종이 더미 사이에 있던 은호가 피곤한 듯 눈을 깜빡이다 손을 멈췄다.

은호가 카드화를 시도하자 이능파에 반응해 작업물이 형태를 바꾸었다.

파앗!

카드화한 아이템의 희귀도는 SR급이었다.

금전적으로 따지면 제법 가치가 있는 수준의 희귀도였으나 은호의 성에 차지 않았다.

신화 시절부터 손재주로 이름난 존재였던 은호가, 황호가 제공한 최고급 소재를 활용해 만든 아이템치고는 급이 낮았다.

희귀도를 확인한 은호가 곧바로 카드를 파기했다.

‘객관적인 척도로 결과물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는 건 편하군.’

이계 충돌 이후, 일정 수준의 이능을 품은 아이템은 카드화가 가능해졌다.

희귀도가 아이템의 존재 가치를 판가름하는 건 아니지만, 긴 잠에서 깨어난 은호가 제 상태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기에는 딱 좋았다.

‘힘을 다루는 게 옛날 같지 않아. 크리스마스이브까지 최소 SSR-급의 아이템을 만드는 걸 목표로 하자. 그런데 지금 몇 시지?’

시간을 확인한 은호가 서둘러 작업장에서 벗어났다.

은호는 차를 한 잔 준비하며 디바이스를 가동했다.

그러자 은광고 홈페이지에서 스트리밍 중인 차기 홍보 대사 발표 생방송 화면이 홀로그램에 비추어졌다.

[안녕하세요, 1학년 0반 조의신입니다.]

화면 속 조의신을 본 은호가 너그럽게 웃었다.

조의신은 카메라 앞에서 담담하게 소감과 포부를 밝혔는데, 준비한 멘트나 몸가짐이 무대에 선 이들 중 가장 자연스러웠다.

과연 조의신은 은광고를 대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언젠가 의신이 형이 내가 이을 회사의 얼굴이 되어 주었으면 했는데.’

은호는 천성헌 시절에 품었던 바람을 떠올렸다.

강제로 꿈을 빼앗긴 은호가 바라는 건 얼마 없었다.

그저 언젠가 조의신이 다시 체스를 시작하고, 이를 자신이 후원했으면 했다.

이는 현재 천성헌 시절에는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달성되었다.

조의신은 체스를 다시 시작했고 은호의 이름을 딴 학교의 홍보 대사가 되었다.

그 과정에 은호의 노력이나 힘이 포함되지 않았지만, 결과를 보면 꿈을 이룬 기분이 들었다.

홍보 대사에 관한 설명을 듣던 은호가 계속 생각에 잠겼다.

‘플마고 속에서는 동하 형이 홍보 대사였었지. 나는 멋진 형들을 뒀구나.’

천동하는 축제 구경을 할 수 없는 은호를 위해 직접 자료와 영상을 모아서 보내 줬다.

그중에는 학교 홈페이지로 확인이 어려운 정보도 있었다.

천동하는 한창 바쁠 때에도 동생을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하지만 천동하가 들려준 이야기에는 다소 거슬리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하 형이 크리스마스에 지방 출장을 가게 되는 게 우연은 아니겠지.’

천동하는 황명 연구소의 객원 연구원으로서 지방에 파견되는 게 아니었다.

천씨 일가의 요청이 있었다.

천동하는 크리스마스에 큰일이 벌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바로 사양하려 했지만, 내용을 들으니 거부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윗대에서 벌인 짓을 자식이 수습해야 한다니.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천동하의 부친은 사망하기 전, 여기저기에 씨를 뿌렸다.

호족의 조사에 따르면 천은하 외의 사생아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유전자 검사의 신빙성을 두고 의혹을 제기한 이가 있었다.

중간에 천씨 일가가 검사 결과를 조작할 수 있으니, 직접 상피세포 등의 검체를 채취하고 검사를 주도하겠다 나섰다.

그쪽에서는 피검자로 천동하를 지목했다.

두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형제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하겠다는 명목이었다.

천동하는 집안 사정에 마음이 복잡할 텐데도 은호를 신경 썼다.

은호가 복잡한 마음으로 차를 한 잔 더 내리고 있을 때였다.

휙.

은호의 맞은 편에 누군가가 불쑥 앉았다.

백호였다.

백호는 은호가 작업장에 틀어박힌 이후에는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자리를 비웠는데, 이렇게 차를 마시며 쉴 때마다 나타났다.

혼자 별채에 있는 동생이 쓸쓸해할까 봐 자주 찾아오는 것 같았다.

“백호 형님 몫도 준비했어요. 어서 드세요.”

“고맙다.”

인사를 하며 찻잔을 받는 백호를 보며 은호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미소를 지었다.

‘나같이 비정한 자에게는 과분한 형들이구나.’

은호는 여전히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자신의 후예들을 떠올렸다.

시험이 끝나면 생각해 보겠다는 말은 했지만, 아직 그들을 만날 생각은 없었다.

은광고 입학시험이 끝난 뒤에, 크리스마스를 넘긴 후에, 해가 바뀐 후에, 입학식을 마친 후에…….

은호는 가능하면 계속 뒤로 미룰 생각이었다.

신학기가 시작되면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겠지만, 은호는 진족으로서의 기척을 숨길 자신이 있었다.

용제건도 꿰뚫어 보지 못한 걸 후예들이 알아볼 것 같진 않았다.

‘문제는 적호 님인데, 지금 내게 신경 쓸 정신이 없겠지.’

적호가 손주의 얼굴을 보라며 난리를 친 적도 있지만, 지금 그는 아들 걱정에 혼이 쑥 빠져나간 상태였다.

김신록은 용제건의 승천 예고를 듣고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이 불안하기도 하고, 아들이 저렇게 괴로워하니 적호가 은호에게 마음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적호는 어제 이렇게 말하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어제 학교를 돌다가 제 아들과 용제건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적호가 우연히 김신록과 용제건의 대화를 듣게된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 아들을 걱정해서 쫓아갔다가 들었을 거다.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나요?

―학교 홍보 대사로 제갈재걸이 선정된 것에 관해 이야기하더군요. 용제건이 그걸 두고 ‘신록이가 모델 하는 거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라고 말했습니다.

어째 그 말을 하면서 아쉬워하는 건 용제건이 아니라 적호 같았다.

안 그래도 잘나고 귀한 아들이 은광고를 대표하는 얼굴이 되면 얼마나 자랑스러워할지 눈에 선했다.

적호는 리플레이를 경험한 후부터 용제건을 굉장히 유하게 대했는데, 저 말에는 화가 난 듯했다.

―아쉬운 놈이 승천을 생각합니까? 내년과 내후년, 아니면 100년 후에 제 아들이 모델을 할 수도 있는 건데 아쉬우면 이 땅에 남아서 보든가요.

그렇게 말하며 적호가 씩씩거렸다.

용제건은 김신록에게 용의 힘을 주겠다며 상위 존재가 되겠다고 하고 있으니, 승천 자체를 두고 욕을 할 수는 없지만 이 상황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냥 계속 은광고에 눌러앉아 직접 홍보 대사를 하든가요. 용족이 호족의 신역을 홍보하는 건 좀 그렇습니다만, 용제건이라면 그래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여의보주가 교사로 있는 학교라는 점을 어필할 수 있으니 용제건이 은광고의 홍보 대사가 되는 게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은호는 내심 적호의 말이 구구절절 다 맞다고 생각했다.

은호가 부드러운 어조로 맞장구를 쳐 주니 적호는 실컷 용제건의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하다가 아들 걱정을 쏟아 냈다.

속내를 감추고 웃고 있었으나 은호는 적호가 내심 부러웠다.

은호는 적호처럼 자신의 후예 걱정을 대놓고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똑똑.

그때,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황유호의 모습을 한 황호가 온 듯했다.

“은호, 이야기할 게 있다. 마침 백호도 있군.”

어린 황호의 얼굴에 수심이 어려 있었다.

은호는 황호가 황유호의 모습으로 올 것을 대비해 준비했던 롤쿠키를 꺼내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다.

“한반도 밖에서 청호와 신인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 말에 호족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친우의 흔적이 그들의 우애를 이용한 악랄한 함정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의신이 형이 예측한 대로 황호 님을 해외로 불러내기 위한 수가 나왔군요.”

“그래, 한이와 공청훤의 존재를 몰랐다면 지금쯤 해외로 나설 준비를 했을 거다. 분신을 정돈하고, 내 일을 맡길 이를 선발했겠지.”

“그랬다면 크리스마스이브 전에는 출국할 수 있겠네요.”

그 말은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크리스마스에는 입국하기 어렵다는 뜻도 되었다.

그때,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 둔 백호가 물었다.

“황호, 그들의 어떤 흔적이 발견되었나?”

응당 나올 법한 질문이었으나 은호는 백호가 입을 연 게 의외라고 여겼다.

그냥 묵묵히 듣다가 황호를 위로할 것 같았는데, 질문을 던지는 게 묘했다.

하지만 그리 가까웠던 친우의 흔적에 관련된 일이니 궁금해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황호 님을 해외로 움직일 만한 단서니까 백호 형님이 저렇게 물어도 이상하지 않아.’

마침 은호도 질문하고자 하는 내용이었으니 이를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이 몸이 선물한 도복 띠였다. 둘이 사라졌을 때 함께 사라진 물건이었지. 아직 내 힘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더군.”

*    *    *

세간에 알려진 염준열의 스승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그의 아버지, 홍염의 제왕 염방열.

다른 한 명은 방랑벽이 있는 것으로 유명한 촉룡(燭龍)이었다.

촉룡은 영산인 종화산(鐘火山)의 정상에서 움직이지 않고 세상을 관조하는 붉은 용으로 알려져 있었다.

정상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단순히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촉룡은 아무 움직임 없이 오로지 바라보는 것만을 하고 있었다.

먹거나 마시거나 잠드는 등의 행위는 물론 숨조차 쉬지 않고 세상을 바라만 봤다고 한다.

촉룡은 용이라기 보다는 계절의 흐름, 낮과 밤의 변화를 관조하는 신에 가까웠다.

그러던 촉룡은 이계 충돌 이후, 방랑벽이 있는 용으로서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안녕, 네가 용족의 은인이구나.”

염준열이 소개를 마치자 낡은 여행복 차림의 여성이 내게 먼저 인사했다.

바람이 불면 그 방향대로 훌쩍 떠나 버릴 것 같은 인상이었다.

촉룡과 방랑용이라는 말을 동시에 쓰는 게 어색했는데, 일단 눈앞에 있는 여성에게는 방랑이라는 말이 잘 어울렸다.

“정말 예의가 바르구나! 이런 아이라면 우리 준열이도 본받을 구석이 많겠어.”

인사를 마치자 촉룡이 다정다감하게 말을 걸었다.

염준열의 붙임성 있는 성격은 촉룡과 좀 닮은 것 같다.

‘촉룡은 말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이미지였는데, 실제로는 많이 다르구나.’

이계 충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모르겠지만, 촉룡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촉룡은 용신으로도 취급받고 있었기에 바로 상위 존재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저리 친근한 눈으로 염준열을 보는 걸 보니 진작에 신성을 부정한 듯했다.

진족으로 남는다는 선택을 한 건 그녀의 방랑벽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염준열을 위해서 최전방에 섰었지.’

염준열이 사망한 후, 협상이 결렬되어 붉은 사자와 용족의 연합이 국회의사당을 쳤을 때, 가장 앞에 선 게 청룡과 촉룡이다.

촉룡은 개전과 동시에 카드모스의 용아에 목이 꿰뚫려 사망하고 말았다.

“촉룡 스승님이 의신이를 좋게 봐 주셔서 기뻐요.”

“……준열아.”

염준열의 말에 촉룡이 몹시 슬퍼하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한 말에 뭐가 잘못된 점이 있었나?

고민은 길게 가지 않았다.

“사석에서는 외할머니라고 부르라 했잖아.”

“죄송해요, 외할머니. 의신이를 처음 소개하는 자리라서 긴장했나 봐요.”

뜻밖의 가족 관계를 알게 되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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