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축제의 끝 (4)
촉룡은 염준열의 사과에 바로 마음을 풀었다.
대화하는 내내 외할머니라고 꼬박꼬박 불러 줘서 그런지 촉룡의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촉룡이 생글생글 웃자 이때를 노린 것처럼 염준열이 말했다.
“어머니가 쓸쓸해하세요. 자주 와 주세요, 외할머니.”
“그럴 리가! 그 아이는 염방열과 너만 있어도 만족할 거야. 도통 방 밖으로 나오질 않으니 한반도에 있어도 얼굴을 보기도 힘들고. 여행 가자고 해도 가겠다고 말하지도 않고…….”
촉룡이 대놓고 서운해하는 티를 내며 말했다.
그런데 여행 거절은 그렇다 쳐도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니.
혹시 염준열의 어머니는 외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까?
‘염준열의 어머니는 언론에 잘 등장하지 않고, 목격 정보도 그다지 없는 편이지.’
프로 플레이어 팀 마스터 염방열, 학생회장이자 스타 플레이어 염준열, 방랑벽이 있는 촉룡.
그녀와 가까운 가족은 다 외향적인 이들뿐이라 조금 의외긴 했다.
아니, 어쩌면 주변이 다 그렇다 보니 역으로 집에 있는 걸 좋아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제가 졸업하면 함께 세계 일주를 가기로 약속하셨어요. 외할머니도 그때 같이 가요.”
“……그래? 내가 방해하는 건 아니고?”
“그럴 리가요. 제가 외할머니랑 같이 가고 싶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어머니도 외할머니와 같이 가고 싶다고 하셨어요.”
염준열이 몇 마디 하자 촉룡의 서운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보통 진족들이 후예들을 아낀다고 하지만, 염준열이 용족 사이에서 유독 큰 사랑을 받는 건 이렇게 바르고 착하고 정이 넘치는 말만 골라 해서 그런 것 같다.
조손끼리 단란한 대화를 나누던 촉룡은 처음보다 몇 배는 더 밝아진 얼굴로 말을 걸었다.
“내 손주이자 제자인 준열이를 구해 줘서 정말 고맙구나. 용제건 그 못난 놈도 그렇고…… 그놈은 대체 요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쯧쯧.”
촉룡은 용제건이 승천하려 한다는 사실을 아는 걸까?
용제건은 승천 외에도 이것저것 지적당할 점이 많아서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오늘 용제건이 1반 아이들과 진심으로 싸운 것만 봤다면 어르신이 저런 말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염준열은 승천 사실에 관해선 잘 모르는 듯했지만, 짐작 가는 구석이 많은지 어색하게 웃어 넘겼다.
“용족의 은인이 듣던 것보다 훨씬 몸가짐이 바르고 착한 아이라 안심했단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렴. 아, 여행 중에는 답장이 늦어질 수도 있어.”
촉룡은 디바이스 코드를 건넨 후, 축제 구경을 하러 갔다.
플마고에서는 말 한마디 하기 전에 퇴장하는 바람에 잘 알지 못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따뜻한 성품의 용이었다.
‘염준열도 플마고에서 봤을 때와 많이 달랐지.’
플마고에서 본 염준열은 다가가기 어려운 상대였다.
단기 유학을 마치고 온 염준열이 마주해야 했을 상황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긴 했다.
염준열과 형 동생 하면서 지내던 용제건, 그와 가깝던 은광고인들이 세상을 떠났으니까.
염준열은 소홍룡이라는 말에 지금보다 더 날카롭게 반응했고, 낯선 이들을 경계했다.
플마고에 막 등장한 시점의 염준열이라면 나를 스승으로 삼을 것 같지 않았다.
플마고 속 염준열은 스승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목적을 파악하고 배제하기 위해 ‘그 단어’를 추적할 것이다.
“의신아, 바쁠 텐데 시간 내 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귀한 분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염준열과 가까운 용을 소개받아서 기뻤다.
그 이후로도 축제 중 자잘한 사건 사고는 있었지만,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그렇게 축제의 끝이 왔다.
“무사히 축제를 마친 걸 기념하면서, 건배!”
김유리의 건배사에 맞춰 가까이 앉은 이들과 잔을 부딪쳤다.
폐막식을 마친 후, 1학년 0반은 뒤풀이를 하러 이동했다.
뒤풀이 장소는 김유리의 집이었는데, 시험 공부를 위해 방문했을 때보다 집안 분위기가 훨씬 화사했다.
‘가구 배치가 바뀌고 장식이 몇 개 더 늘었을 뿐인데, 이렇게나 다르다니.’
거실에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리스가 장식되어 있었다.
꼬마 전구를 두른 트리에는 워터 볼과 리본, 레터링 장식 같은 오너먼트들로 꾸며져 있었다.
이 오너먼트들은 김유리의 아버지가 퇴원한 후, 요양하며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해프닝이 이것저것 있긴 했는데, 별일 없이 축제가 끝나서 다행이에요!”
“별일은 많았는데.”
“대석아, 정말로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났다는 얘기잖아.”
민그린이 반박했지만, 송대석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폐막식을 마치는 순간에도 정말 별일이 많았다.
“폐막식에서 권제인 선배님이 연주하셨던 곡, 정식 음원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우선 들리는 대로 악보를 만들어 봤습니다. 필요하시면 드리겠습니다.”
“벌써? 와, 셈여림표도 표시했네 ……!”
폐막식 무대 중 권제인의 신곡이 발표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원래 연주하기로 한 곡은 따로 있었는데, 권제인이 축제 중에 영감을 받았던 모양이다.
권제인이 발표한 신곡은 ‘The Dazzling Cyan Pearl’, ‘눈부신 시안색의 진주’라고 해석 가능한 말이었다.
‘‘dazzle’이 ‘황홀함’으로도 해석된다는 점과 시안색을 생각하면 누구나 저 제목을 보고 용제건을 연상하겠지.’
권제인에게 영감을 준 대상은 무려 용제건이었다.
권제인은 용제건과 성국언의 체스 대국, 1반과 한 보물 사냥을 보고 나서 그 곡을 떠올렸다고 한다.
권제인이 연주할 곡을 바꾸고 싶다고 하자 폐막식 무대 총책임자가 바로 허락해 줬다.
권제인의 신곡은 제목처럼 빛났고, 용제건처럼 자유로웠다.
장난기가 느껴지는 선율에는 기쁨과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곡의 절정을 지나자 쓸슬하고 아련하게 흩어지는 바이올린 소리가 여운을 남겼다.
―제가 기억하는 용제건 선생님은 자유로운 분이지만, 비행을 마치면 반드시 땅에 발을 붙일 것 같았어요.
연주를 마친 권제인이 신곡에 관해 코멘트했다.
권제인은 용제건의 제자로서 축제 때 그의 모습을 보고 여러 생각이 들었나 보다.
―하지만 지금은 하늘로 그대로 올라가 버리실 것 같아요.
권제인은 승천에 관해 전혀 모를 텐데 어떻게 저렇게 정확하게 짚어 낼 수 있는 걸까.
권제인의 감상을 들은 용제건은 계속 웃기만 했다.
“용쌤이 하늘 가면 우리 내년에 부담임 바뀌는 거냐?”
“계속 부담임 하셨으면 좋겠는데…… 내년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권제인의 연주를 계기로 아이들이 잠시 용제건 얘기를 했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슈바르츠밸더 키르쉬토르테를 인원수대로 잘라 나누던 중, 독고미로가 무심코 던진 말 덕이었다.
“내년에 어떤 분이 우리 반 담임이 될까?”
독고미로의 말에 반 아이들이 우뚝 굳었다.
반 아이들은 담임 교체 가능성을 상상도 못 한 건지 순식간에 패닉에 빠졌다.
함근형 선생님이 바빠 뒤풀이도 못 오고, 크리스마스 때에도 자리를 비울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불만스러워했는데 아예 담임이 바뀐다는 말이 충격이었나 보다.
“지금 부담임 선생님이 문제가 아니네. 어떡하지?”
“3학년이 졸업하니까 임연화 선생님이 맡을 수도 있겠다. 임연화 선생님도 좋으신 분이긴 한데…….”
“2학년 0반은 졸업할 때까지 제갈재걸 선생님이 담임을 하실 거라고 들었습니다만.”
“음, 그걸 위해서 선배님들이 교직원 사택 로비를 점거하고 드러누우셨지.”
“그럼 저희도 드러누우면 되겠네요! 찬솔 선배님들께 어떻게 점거하셨는지 물어볼게요!”
사월세음의 말에 반 아이들이 기뻐했다.
우리 반 아이들은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했던 짓을 할 생각인 건가!
함근형 선생님은 객관적, 주관적으로 봤을 때 훌륭한 교사니까 그러는 마음도 이해가 간다.
교직원 사택 점거 작전이 펼쳐지면 반 아이들을 위해 가장 위험한 역할을 맡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진짜?”
“그래, 우리 반은 0반치곤 얌전한 편이니 담임도 계속 우리 반을 맡길 원할 거다. 다른 교사들도 공연히 담임을 바꿨다가 사고가 생기는 걸 원치 않겠지.”
줄곧 말수가 적었던 황지호가 길게 말했다.
황지호의 말에 반 아이들의 얼굴이 폈다.
다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아, 맞다. 크리스마스 행사 일정에 관해 말하려고 했는데.”
김유리의 말에 방금 삼킨 생크림과 체리의 맛이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크리스마스이브부터 하는 자선 행사 말하는 거지?”
“응! 축제에 한 상영회 영상을 쓸 거라 준비할 건 딱히 없긴 해. 그런데 내가 자리를 비우게 될 것 같아서…….”
김유리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김유리는 물의 영향을 크게 받는 존재인데,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눈이 내릴 예정이니 학교 밖에 두고 싶었다.
나비령은 그 점을 이용하기 위해 김유리를 은광고 안에 들여보냈고 모든 힘이 다할 때까지 폭주하게 만들었다.
김유리의 폭주가 은광고를 덮친 에너미들을 일소했으나 그 중심에 있던 김유리는 무사하지 못했다.
플마고에서는 나비령이 둔 그 희생수 덕에 퍼스트 크리스마스 수습이 쉬워졌지만, 나는 김유리를 희생시킬 생각이 없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죽호에게 과외를 받는 걸 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이다.’
1학년 0반 학생 중, 크리스마스 이벤트에 불참하는 건 김유리만이 아니었다.
“나는 못 간다.”
김유리에 이어 송대석이 불참 의사를 밝혔다.
송대석은 한창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이라 시간을 내기 어려운 상태다.
축제 기간에는 무리해서 빠진 거라고 한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민그린의 얼굴도 못 보고 일할 예정인 송대석을 불쌍하게 보는 시선이 꽤 있었다.
‘송대석은 그날 학교 안에 있는 것보다 밖에 있는 게 든든해. 그날 플레이어 위성을 통해 계속 은광고를 관찰해 주겠지.’
다음으로 발언한 건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 당시 교내에 없었던 한이였다.
“미안해. 둘째 날에는 시간을 낼게.”
“나도 한이네 보육원에 가 볼 생각이야.”
한이와 공청훤은 그날 보육원에 있었다.
플마고에서 두 사람이 퇴장했던 사건은 퍼스트 크리스마스보다 나중에 발생한다.
둘은 이 세계에서도 보육원 아이들과 조촐하게 보낼 예정인가 보다.
플마고 때와 다른 게 있다면 독고미로도 보육원에 있을 거라는 점이다.
“이 몸도 자리를 비울 것 같군.”
마지막으로 황지호가 불참 의사를 밝혔다.
“설마 너도 보육원 행사에 올 생각이야?”
“하하하하! 아니다. 기회가 있으면 꼭 참가하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군.”
황지호의 말에 독고미로가 경계했다.
툭하면 황지호가 한이를 귀찮게 했으니 독고미로가 저렇게 반응하는 건 당연했다.
결과적으로 크리스마스이브 학교 행사에 참가하게 된 건 권레나, 맹효돈, 목우람, 민그린, 사월세음 그리고 나.
표면적으로는 이렇게 여섯 명이었다.
‘황지호와 황명호의 부재 여부를 누군가가 확인할 가능성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황지호와 같이 움직일 수 없게 되었지만, 덕분에 다른 수를 둘 수 있게 되었다.
“조의신, 맡기고 가도 되겠나?”
“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준비는 끝났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