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90화 (586/925)

82. 퍼스트 크리스마스 (1)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점, 나비령은 연못 근처에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이 정원에는 살아 있는 것이 가까이 오지 않았다.

연못 주변을 날아다니는 나비들은 전부 나비령이 이능파로 만든 허상이었다.

나비령은 이능파로 만든 나비를 희롱하며 생각에 잠겼다.

‘크리스마스에 모든 게 그분 뜻대로 되면 곤란해. 목련 아가씨가 아직 내 손에 있다면 일이 쉬웠을 것을.’

나비령은 폭풍을 막기 위해서 이번 크리스마스 사건을 어떤 식으로든 망치고 싶었다.

완전히 막지는 못하더라도, 은광고 구성원들이 다수 희생되더라도.

만약 김유리와 가호로 이어진 상태라면 뜻대로 다룰 수 있겠지만, 그 가호는 청소년 수련회 사건 때 끊어지고 말았다.

이번 건에 나비령이 직접 개입하는 건 불가능했다.

‘제인이를 통해서 호족한테 알리려고 했는데…… 이미 움직이고 있는 것 같네.’

성탄절을 앞두고 영원의 호수 팀원 소속 주요 플레이어들이 전부 한반도에 집결했다.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서라는 명목이 붙어 있었지만, 나비령의 생각은 달랐다.

현재 영원의 호수는 세 기사의 맹세와 대치 중이므로 한반도에 병력을 모으는 건 뭔가 이상했다.

나비령은 신중한 권제인이 영국에 간부 한 명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주변을 캔 결과, 권제인이 크리스마스 사건을 대비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 어떻게 알아냈을까. 덕분에 할 일이 줄었어.’

권제인이 알고 있다면 황호도 알고 있을 테니 굳이 나비령이 위험을 감수하고 이번 건에 관해 경고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자의 폭풍을 막겠다는 의지는 여전했으나 나비령이 의심을 사지 않으며 움직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분이 세운 계획은 이미 많이 틀어졌고, 여러 수가 막혔어. 호족과 토족이 ‘이계 부르기’를 꿰뚫어 보았다는 것도 알아내셨고. 분명 상정했던 것보다 더 강한 수를 두시겠지.’

그자는 제 머릿속에 든 것을 심복과 공유하지 않았다.

나비령을 비롯한 수하는 각자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할 뿐, 그 이상의 영역은 그저 짐작할 따름이었다.

나비령은 의심받지 않을 정도로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자의 동태를 살피고 정보를 모으고 은밀히 움직여야 했다.

나비령은 그자가 벌이는 일에 관해 윤곽은 잡아도 전모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비령은 이번 크리스마스에 그자가 어떤 일을 벌일지 가늠하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은광고에는 손대기 힘들겠어. 그렇다면 협회 쪽에서 움직여야 할 텐데…… 돕는다고는 해도 다루기 어려워. 가감하기가 힘드네. 자칫하다간 내 정체가 드러나니까.’

이번 크리스마스에 나비령은 은광고가 아닌 협회에서 암약하도록 명령을 받은 상태다.

나비령의 안배와 비늘은 협회 곳곳에 뿌려졌지만,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규정 집행부에 유능한 인물이 사사건건 나비령을 방해했다.

일부러 일감을 만들고 출신을 건드리고 정신적으로 흔들어도 그 인간, 홍규빈은 한결같았다.

‘하다못해 그 부하를 내 것으로 만들었어야 했는데.’

나비령은 홍규빈의 부하, 윤 대리를 떠올렸다.

모처럼 그가 선물해 준 나비 모티브의 브로치까지 착용했는데, 그는 동요했으나 넘어오지 않았다.

윤 대리의 윤리 의식을 꺾기에는 나비령을 향한 연심이 부족한 듯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남자의 목소리에 나비령이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을 들어 올렸다.

표정은 그리했으나 나비령의 기분은 한결 가벼워졌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생각하다가 단순하고 쉬운 것을 보니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큰 임무를 앞둬서 긴장한 건가?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 임무가 끝나면 바로 너를 도우러 오겠다.”

“……내가 걱정하는 건, 나의 안위가 아니야.”

남자의 말에 나비령은 달콤하고도 구슬픈 음성으로 답했다.

나비령은 마치 큰 실수라도 범한 것처럼 급히 옷깃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당신의 힘을 의심하는 건 아니야. 그냥, 나는…….”

나비령의 몸짓과 말에서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남자는 나비령이 여태까지 자신의 걱정을 해서 저렇게 수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멋대로 단정 지었다.

나비령을 어여쁘게 여기는 남자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입이 움직였다.

“걱정하지 마라. 태만한 호족의 결계에 손을 대고, 물건 하나를 찾으면 내 임무는 끝이다. 별로 위험하지 않아. 금방 네 곁으로 돌아올 거다.”

순식간에 남자의 임무를 캐낸 나비령이 실소를 숨겼다.

남자는 고개를 숙인 나비령을 말없이 안아 주었다.

‘정말이지, 인간보다 쉬울 수가.’

나비령이 가는 손을 뻗어 남자를 마주 안았다.

나비령의 온기가 닿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번 건을 마친 후에 이 정원을 살아 있는 나비로 채워 주마. 너와 보내는 시간도 늘리겠다.”

남자가 그녀와의 미래를 그리는 사이, 나비령은 지금 얻은 정보를 어떻게 이용할지 궁리했다.

이윽고 포옹을 마치고 물러났을 때.

남자는 나비령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을 보며 만족했다.

*    *    *

[정부와 플레이어 협회의 갈등이 깊어진 가운데, 이계부 장관이 협회 측에 긴급 회동을 제안했습니다. 신임 이계부 장관은 플레이어 위성의 국유화를 비롯한 국내 플레이어계의 누적된 문제를 주요 쟁점으로…….]

크리스마스이브의 아침이 밝았다.

아침부터 협회와 이계부의 불화를 두고 흉흉한 뉴스가 들려오는 건 플마고나 지금이나 다름없었다.

‘협회 위성을 국유화한다는 건 언제 들어도 어처구니가 없다.’

플레이어 위성 제작 과정에 들어간 자금은 협회에서만 나온 게 아니다.

예산의 일부는 정부가 출자했다.

이후, 이계 공략과 이계 산업 활성화로 여유가 생긴 협회는 이자까지 쳐서 위성에 들어간 투자금을 돌려주려 했다.

그러나 정부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닌 위성의 소유권이었다.

이계부는 플레이어 위성의 소유권을 정부가 갖고, 협회는 사용료를 지불하고 위성을 운용하는 방식으로 계산을 마치자고 제안했다.

선심을 쓰듯, 빠르게 소유권을 넘기면 10년간 위성 사용료를 받지 않겠다는 특약도 덧붙였다.

‘소유권을 내놓기 싫으면 플레이어 위성의 작동 원리를 공개하라고 했던가.’

플레이어 위성은 인류의 과학 기술과 어느 진족의 이능의 결정체로, 그 작동 원리는 총본부 내에서도 극비로 취급하였다.

이계 출현과 에너미의 존재를 감지하는 플레이어 위성이 없다면 인류가 일상을 영위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정부 주도로 플레이어 위성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고 연구를 거듭하면 더욱 세계가 안전해질 것이라는 게 이계부의 입장이다.

인류의 생존권과 공익, 국익이라는 그럴싸한 이유까지 붙어 있어 저 섬뜩한 의견은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정부에서 사용하는 행정 업무 프로그램과 보안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를 공개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잖아.’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해커에 의해 1시간 내로 정부 업무가 마비되지 않을까?

플레이어 위성도 같은 꼴을 당할 거다.

‘플마고에서는 성국언이 사망한 후, 플레이어 특별법 개정을 막을 인물이 없어지자 위성에 손을 댔지.’

플마고에서 성국언이 사망한 시점은 주수혁이 2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유일한 플레이어 정치인, 성국언이 사망하여 마지막 방파제가 사라지자 플레이어들은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플레이어의 인식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협회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정부까지 적으로 돌아서니 입지가 점점 좁아졌다.

그 이후, 폭주한 염준열이 사살되고 붉은 사자와 용족이 내란을 일으킨 반역자 취급을 받아 스러지자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다음은 날씨입니다. 성탄절을 앞둔 오늘은 전국적으로 맑겠습니다. 아침에는 영하 2도로 다소 쌀쌀하겠지만, 한낮에는…….]

등교할 준비를 마쳤을 때에는 일기예보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전국이 맑을 예정이라고 한다.

기상 캐스터가 보여 주는 위성 지도를 보니, 한반도 위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염준열이 보낸 디바이스 메시지에도 오늘 날씨는 맑을 거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도 눈이 오겠지.’

아직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며 기숙사 밖으로 나섰다.

*    *    *

붉은 사자의 팀 빌딩 로비.

용제건이 나갈 채비를 먼저 마치고 염준열을 기다렸다.

염준열은 스승이자 후배인 조의신에게 열심히 안부 메시지를 작성한 후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올리는 중이었다.

청룡과 염방열이 오늘따라 유독 안부 인사를 길게 받는 바람에 인사가 길어졌다.

염준열의 출발이 늦어지고,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로비에 서 있는 건 용제건뿐이었다.

‘리플레이 속에서 팀 빌딩을 마지막으로 본 게 오늘이었지.’

용제건은 리플레이 속 오늘을 떠올렸다.

그날 용제건은 주수혁의 초대를 받아 학교에 갔다.

조의신이 부재한 꿈 속에서는 주수혁 일행이 수많은 사건을 마주했다.

용제건은 그 사건 해결을 돕기 위해 같이 움직였고, 그 결과 이 세계에서보다 주수혁과 더 가깝게 지냈다.

주수혁은 그야말로 이야기의 주인공다운 완벽한 성품과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라 관찰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수혁이랑은 더 친하게 지낼 걸 그랬네. 아니, 아직 늦지 않았나?’

용제건이 주수혁이 알면 당혹스러워할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용제건 님.”

홍색의 옷과 면사를 착용한 용왕신의 무녀, 홍(紅)이었다.

용제건은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녹(綠), 벽(碧), 유황(硫黃), 자(紫), 홍(紅)으로 분류되는 다섯 무녀 중 가장 낯을 가리던 홍이가 리플레이 속 크리스마스이브 때에도 이렇게 말을 걸었다.

김신록을 잃은 날에도 같은 상황이 있었다.

“······저,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용제건은 오늘 들었던 일기예보를 떠올렸다.

한반도 전역이 맑을 예정이었다.

용제건은 유심히 홍이를 관찰했다.

그전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겁에 질려 있군.’

용제건은 아직 홍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용제건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실눈을 휘며 대화에 응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무녀들한테 날씨를 묻지 않았네. 중요한 날인데 말이야. 날씨가 많이 안 좋을 것 같아?”

“네…….”

“어느 정도 안 좋아? 혹시 눈이라도 오려나. 그러면 외출하지 않고 다 같이 팀 빌딩에서 눈 구경을 하는 것도 괜찮겠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드무니까.”

용제건이 다정하게 말하자 홍이가 안심한 얼굴로 말했다.

“눈이 올 것 같아요. 부디 두 분이 팀 빌딩에 머무셨으면 좋겠어요.”

용제건은 그 대답에 홍이가 무슨 의도로 그 말을 했는지 추리했다.

홍이는 오늘 용제건과 염준열이 은광고에 가는 걸 원치 않는다.

그녀의 말대로 행동한다면, 흑막은 염준열과 용제건을 죽일 절호의 찬스를 놓치게 된다.

홍이는 염준열과 용제건이 죽는 걸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적어도 지금은.

“홍이 넌 오늘 눈이 내린다는 걸 아는구나.”

“네……?”

마침 인사를 마치고 온 염준열이 로비로 나왔다.

염준열은 그에게 말을 거는 용족과 붉은 사자 팀원을 여럿 이끌고 있었다.

아마 홍이는 저 인파 탓에 염준열에게 말을 못 걸고 홀로 있는 용제건에게 말을 건 듯했다.

용제건은 리플레이 속에서 했던 것과 같은 작별 인사를 남겼다.

“그래, 우산을 챙겨야겠네. 다녀올게.”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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