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퍼스트 크리스마스 (2)
축제 때에 비해 눈에 보이는 사람 수가 적었다.
현재 교내에 있는 사람 수를 따지면 플마고의 크리스마스이브보다 적을 것이다.
‘플마고 때에는 추모의 목적도 있으니 일정을 억지로 조정해 참가한 사람도 꽤 있었겠지.’
무리하게 일정을 조정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 은광고인들은 예정대로 움직였다.
가족과 함께 성탄절을 보내기 위해 여행을 가거나 봉사 활동, 인턴 같은 외부 활동을 하러 간 학생들이 꽤 있다.
‘교사들도 많이 자리를 비웠지.’
플마고에서도 몇몇 교사들은 자리를 비웠다.
당시 제갈재걸의 자리를 대신해 교무부장직에 오른 최편득.
그때나 지금이나 부장 교사였던 함근형 선생님과 임연화가 그러했다.
플마고에서 그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해외 출장을 갔다.
‘단순히 최편득의 계략인 줄 알았는데, 빠지기 곤란한 출장이었어.’
그 해외 출장은 한중일 청소년 교류전과 관련이 있었다.
출장지에서 국제 플레이어 교육자 포럼이 열리는데, 직접 얼굴을 볼 기회가 적었던 한중일 청소년 교류전 관계자들이 회합을 가질 예정이라 한다.
플마고의 최편득이 남긴 행적을 보면 그 자리에서 교류전을 무산시키기 위해 국제적으로 깽판을 친 것 같지만.
그런 자리이니 은광고에서는 이름과 직책이 있는 교사를 보낼 필요가 있었다.
결국 전력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부장급 교사가 전원 학교에 있다면 둘 수 있는 수가 늘어날 텐데.’
하지만 당일이 돼서 아쉬워해 봐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어쨌든 참가한 인원수가 적은 것에 비해 이번 행사는 플마고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활기찼다.
여기저기에서 캐럴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산타 복장을 한 아이들이 보였다.
교복과 학교에서 지급한 더플 코트를 입은 차림인 내가 눈에 띌 정도였다.
다행히 나 말고도 평소처럼 입고 온 놈이 있었다.
“야.”
1학년 0반 교실로 향하던 중, 유상훈이 말을 걸었다.
그런데 겨우 인삿말이 한 글자라니.
적어도 시기를 고려해 ‘메리 크리스마스’ 정도는 말하면 좋지 않나?
나도 대충 ‘어.’라고 답하고 유상훈과 잡담을 나눴다.
유상훈의 말에 의하면, 크리스마스 기간에 1학년 1반은 ‘보물 사냥’ 준비 과정과 축제 날 벌인 용제건과의 대결 영상을 편집하여 상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용제건과 또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당연한 건가.’
1학년 1반이 리벤지 매치를 준비했다면 용제건은 기쁘게 응할 거다.
크리스마스 기간에는 싸울 수 없겠지만.
나는 유상훈의 지나치게 간결한 설명을 해석하며 1학년 1반의 동태를 파악했다.
그런데 성탄절 얘기를 한창 하던 중, 유상훈이 갑자기 예고 없이 훅 치고 들어왔다.
“너 축제 끝나고 계속 수상하던데. 뭐 하냐?”
“뭐가.”
축제가 끝난 후에는 크리스마스를 대비하느라 바빴다.
학교에는 꼬박꼬박 나왔지만 교내에서도 이것저것 한 게 많았다.
시치미를 뗐지만, 유상훈은 감도 좋았고 본 것도 많았다.
“며칠 전에 교장실에서 나오는 거 봤다. 선도부실에도 들르더만. 또 유상희 씨한테 뭐 부탁했잖아.”
유상훈은 그걸 왜 다 알고, 기억하고 있는 건가.
교내에서 마주쳐도 대충 손만 한 번 흔들고 지나치길래 별생각 없는 줄 알았는데, 속으론 수상하다고 여겼나 보다.
아니, 그냥 내가 빈틈이 많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 반 아이로부터 앞으로도 수상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중요한 작전을 수행 중일 때에는 덜 수상하게 굴어야겠다.
후일을 대비해 묻기로 했다.
“그걸 어떻게 다 알고 있어?”
“유상희 씨한테 뭔가 부탁한 게 맞나 보네.”
유상훈의 말에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용제건의 예의 그 화법 아닌가!
1학년 1반이 용제건을 연구했다더니 용제건의 화법도 분석했나 보다.
알고 있는 척하던 정보 셋 중에 하나는 가짜였구나.
내가 유상훈을 상대로 너무 마음을 놓은 것 같다.
“말할 생각이 없나 보네. 알았다.”
뭘 알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괜히 위험하게 움직이기 전에 막기로 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단독 행동은 하지 말고, 안내 방송을 확인하고 자치 기구의 장이나 선생님의 지시에…….”
“유상희 씨랑 똑같은 소리 하네. 봐서.”
유상훈은 유상희를 상대로도 떠보다가 저런 말을 들은 것 같다.
교실로 가는 동안 유상훈한테 계속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유상훈은 건성건성 답변을 해 댔다.
유상훈에게 잔소리를 하는 유상희의 심정이 절절하게 이해가 됐다.
“의신아, 어서 오세요! 메리 크리스마스이브!”
“왔냐, 부반장.”
1학년 0반 교실에 들어가자 순록 뿔 머리띠를 한 반 아이들이 나를 맞이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민그린이 종이 가방에서 머리띠를 꺼내 내밀었다.
“어제 손이 남아서 만들었어. 자, 이건 네 거.”
민그린이 손수 만든 작품이었나?
순록 뿔을 잘 보니 염색한 닥나무실로 엮은 매듭으로 되어 있었다.
민그린의 성격상 직접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색으로 실을 염색하고, 순록 뿔을 디자인했을 거다.
‘축제 때 계속 바빠서 반 행사를 돕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나 보네.’
그래서 이런 멋진 선물을 준비했구나.
종이 봉투 안에는 다양한 사이즈의 머리띠가 들어 있었는데, 아마 등교하지 않은 아이들의 몫까지 준비한 것 같았다.
민그린의 마음과 솜씨에 크게 감탄하여 바로 순록 머리띠를 착용했다.
“고마워, 잘 쓸게. 혼자 이만큼 다 만들기 힘들지 않았어?”
“나 혼자 만든 거 아냐. 우람이가 도와줬어. 머리띠 안에 강선을 심어서 내구도를 올리자고 제안했는데, 모양도 잘 잡히고 좋더라.”
민그린이 겸손하게 말했다.
그런데 민그린은 목우람의 도움을 받으며 머리띠를 완성한 건가?
1학기 중간고사 때 사람을 보자마자 도망쳤던 민그린의 모습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눈을 가리는 AR글래스는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어쩌면 민그린은 이미 AR글래스의 기능을 꺼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습관이 돼서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안경을 벗고 말고는 민그린의 선택이니까 굳이 그걸 묻거나 지적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런데 목우람은 어디 있어?”
“우람이는 현악부를 도와주러 갔어요. 오늘 빠진 분이 많아서 무대 세팅에 시간이 걸리나 봐요.”
권레나도 안 보인다고 했더니 현악부 일로 바쁜 듯하다.
현악부의 일을 돕는 거라면 바이올린 장인인 목우람이 적역이긴 하다.
‘그러면 권레나와 목우람은 중앙 구역 쪽에 있겠구나.’
현재 1학년 0반 교실에 있는 건 나, 민그린, 맹효돈, 사월세음.
이렇게 넷이었다.
인원수가 적으니 일찍 와서 준비를 하자는 의견이 있어서 우리 반은 상당히 일찍 모였다.
하지만 능력자 반장 김유리가 상영회 준비를 거의 완벽하게 마쳐 두고 자리를 비워서 할 게 거의 없었다.
“함근형 선생님 몫도 있는데…… 오늘 못 오시려나?”
“다 같이 순록 뿔 머리띠 쓰고 기념 사진 찍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우람이랑 레나가 오면 우리끼리라도 찍죠!”
상영회 준비를 마치고 목우람과 권레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
민그린의 디바이스에 전화가 걸려 왔다.
화면에 뜬 발신자 이름을 본 민그린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어, 대석이한테서 전화 왔어.”
“잘됐다. 순록 뿔 머리띠 한 거 잘 보이게 화상 통화로 받으세요!”
“그, 그럴까…….”
민그린은 반 아이들 앞에서 영상 통화를 하는 건 쑥스러운지 복도로 걸어 나갔다.
자동문이 열리기 전, 민그린에게 말을 걸었다.
“날이 추우니까 멀리 나가지는 마.”
내 말에 민그린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민그린은 문 근처에 멈춰 서서 후드를 쓴 자국이 남은 머리를 손으로 정리하고, 순록 뿔 머리띠를 고쳐 쓴 후 복도로 나갔다.
민그린이 나가자 맹효돈이 툭 한마디 했다.
“그 새끼는 바쁘다면서 전화는 하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낼 만큼 그린이랑 연락을 하고 싶은 거겠죠.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어…….”
맹효돈과 사월세음이 한창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내 신경은 온통 밖에 쏠려 있었다.
정확히는 은광고의 결계 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퍼스트 크리스마스 사건이 시작되는 장소는 은광고의 결계다.
그리고 사건이 터지는 시각은 일반 방문객들의 입장이 시작된 직후였다.
“이제 사람 올 텐데 준비해야 되나?”
“바로 오진 못할 거예요. 통행증 확인을 하고 결계를 통과해야 하니까요.”
“아, 결계…….”
맹효돈이 사월세음의 말에 납득했다.
맹효돈이 파이트 클럽에서 탈출해 처음으로 등교하던 날, 그는 결계의 힘을 직접 확인했다.
은광고의 결계는 학생인 맹효돈은 통과시켰지만, 그를 뒤쫓던 에너미를 배제하였다.
‘은광고의 결계는 강력한 방패지만, 동시에 강력한 감옥이 될 수도 있어.’
교실 벽에 설치된 홀로그램 시계의 숫자가 바뀌는 게 보였다.
일반 관람객 입장 시각이 되었다.
* * *
플레이어 협회 위성 관리팀 산하 연구소.
연구원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출근하는 처지에 놓였으나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첫째는 플레이어 위성의 관측값 해석 작업이 더뎌졌기 때문이고, 둘째는 고등학생 객원 연구원 송대석이 군말 없이 출근한 탓이었다.
송대석은 한창 놀아야 할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고,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고, 그에게는 이브를 함께 보낼 이성의 소꿉친구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솔선수범하여 연구에 매진했다.
그런 송대석을 보면서 감히 어른들이 불만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요령 없는 송대석을 위해 살짝 그를 돕기로 했다.
“잠깐 쉬었다가 합시다!”
“오늘은 이브니까 가족한테 전화나 할까!”
“나는 가장 친한 친구한테 먼저 전화해야지!”
연구원들은 송대석이 듣도록 한 소리 한 후, 각자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화하는 척했다.
송대석은 그걸 보고도 눈치 없이 멀뚱멀뚱하게 있었다.
송대석의 소꿉친구 민그린은 바쁜 그를 배려해 먼저 연락하지 않을 텐데, 저 눈새는 손을 놓고 있었다.
보다 못한 연구원이 대놓고 물었다.
“대석아, 이브인데 친구들한테 연락은 했니?”
“어, 아뇨. 아직요. 그럼…… 저도…….”
그 말을 들은 후에야 송대석이 디바이스를 가동해 민그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그린은 화상 통화로 응했다.
[대석아, 메리 크리스마스이브.]
송대석은 화면에 보이는 민그린의 얼굴에 입을 떡 벌렸다.
민그린은 후드 대신 뿔 모양 머리띠를 착용하고 있었다.
‘잘 어울린다……!’
송대석이 칭찬할 타이밍을 놓친 사이, 민그린이 말했다.
[대석이 몫도 있어. 언제 줄까?]
“어…… 오늘 일찍 끝나면 저녁에는 집에 간다.”
[그럼 오늘 줄게.]
송대석은 민그린을 보기 전에 집에 들러서 미리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챙겨야 겠다고 다짐했다.
민그린의 머리띠에 시선을 떼지 못하며 송대석은 통화를 이었다.
그때, 그의 눈에 뭔가 들어왔다.
‘뭐야, 저건.’
민그린의 뒤로 인형 옷을 입은 집단이 이동하는 게 보였다.
혹시 민그린과 부딪칠까 봐 주의하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팟!
갑자기 화면이 꺼지고, 통화가 부자연스럽게 종료되었다.
‘디바이스 오류인가?’
송대석이 다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지금은 연결이 닿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떴다.
송대석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였다.
삐, 삐잇! 삣! 삐비비비빅!
위성 연구실 여기저기에서 경보 알람이 울려 퍼졌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울리는 경보음과 함께, 붉은 색으로 물든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홀로그램을 확인한 연구원이 경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그거잖아. 동결형 이계가 활성화할 때 잡히는 신호야!”
은광구를 덮은 붉은 점들을 본 송대석이 급히 패널을 조작했다.
송대석은 곧바로 민그린이 있는 은광고의 상황을 확인해 보려 했다.
그러나 몇 번이나 화면을 조작해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은광고가 보이지 않아!’
은광고를 덮은 거대한 구름이 플레이어 위성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