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퍼스트 크리스마스 (3)
일반인 입장이 시작되기 직전.
은광고의 주요 출입구는 정문, 후문, 동문, 서문으로 각각 자치 기구 임원들이 배치되었다.
은광고의 결계에 정식 등록된 게 아닌, 일시적으로 출입 허가증을 받아 입장하는 이들은 네 개의 출입구 중 하나를 이용해야 했다.
허가증을 받고 결계에 임시 등록된 인물이라 해도 저 네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은광고를 드나드는 건 불가능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뭐야, 왜 학생회밖에 없어. 선도부 애들은 어디 갔어?”
전 학생부회장 지명수가 정문을 둘러보다 말했다.
정문에는 은광고 명물인 시계탑이 있어서 그런지, 네 출입구 중 사람이 가장 많이 몰려 줄이 길었다.
“선도부는 오늘 이벤트 준비한다고 들었습니다.”
대기열을 확인 중이던 현 학생부회장 곽경구가 답했다.
“이벤트? 걔들이 그런 것도 해?”
“명수 형이 수국향기 팀 빌딩 방문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의제로 올라왔습니다.”
“내가 그날 회의록을 확인 안 했구나. 미안.”
“괜찮습니다. 바쁘실 텐데 도와주러 오셔서 감사합니다.”
지명수는 학생회를 은퇴한 몸이니 딱히 회의록을 읽지 않아도 사과할 일이 아니었다.
또, 지명수는 최근 수국향기 입단을 앞두고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후배가 걱정되는지 시간을 내서 자치 기구 일을 돕고 있었다.
“그럼 지금 인원수가 부족하지 않아? 허가증 확인하는 데에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원우 형이 도와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원우가? 아, 저기 오네.”
마침 도원우가 정문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TC 연구소 사건을 경계로 도원우의 가장 인간적인 면모였던 추함이 사라지고, 다른 사람이 되었다.
과거의 도원우는 추하고 행복했으나, 지금은 안 추하고 안 행복한 인간이었다.
‘기왕이면 안 추하고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길 바랐는데…… 상희한테 크리스마스 인사는 했을까? 안 했겠지.’
지명수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대로 졸업하면 정말로 도원우와 유상희 사이에 있는 연이 영영 끊어질 것 같았다.
아무 대화 없이 이대로 끝이 난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그저 은광고 동창 사이로 남게 될 것이다.
도원우의 멍청하고 추하고 행복한 모습을 더는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어쩐지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도원우가 날카롭게 외쳤다.
“결계 주변에서 물러나!”
도원우의 지시에 학생회 임원들이 몸을 날려 학교 안쪽으로 피했다.
이계 공략에 익숙해진 플레이어들은 상황 파악이 안 돼도 일단 경고하는 대로 움직이는 데에 익숙했다.
쿵, 쿠쿵, 콰콰쾅! 파지지직! 쾅!
결계에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이능파로 인한 방전 현상이 이어졌다.
결계의 거부 반응이었다.
침입을 거부하는 결계가 내뿜는 스파크와 연기로 인해 밖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가까이에 있는 학생회 임원들은 그 정체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은 방금까지 방문객이라고 생각했던 존재들이었다.
형체를 바꾼 그것들의 몸체에 의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천 조각이 없었다면 알아보기 힘들었을 거다.
수십, 수백 개의 개체가 결계의 힘에 당해 타들어 가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몸을 부딪쳐 오고 있었다.
충돌음과 방전음이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저건…… 에너미인가? 왜 경보가 안 울리지?”
“주변에 이계가 발생했다는 경보는 없었습니다. 진족이 푼 에너미일 수도 있겠군요.”
“아, 올해 초에 경보 없이 은광구에 에너미가 날뛴 적이 있었지. 다들 무기를 실체화시켜!”
얼어 있던 학생회 임원들이 지명수와 곽경구의 침착한 태도 덕에 냉정을 되찾았다.
전원 하나둘씩 무기를 구현화시켜 싸울 준비를 했다.
“학교 안은 괜찮아도 밖이 문제네. 에너미는 다 결계를 노리고 있는 것 같은데, 만약을 대비해서 사람들을 대피시켜야겠어. 내가 갈게.”
지명수의 광림, 부유선물(浮遊選物)은 여차하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떠오르게 하여 피난을 도울 수 있다.
그렇게 판단한 지명수가 은광고 결계 밖으로 나가려 했을 때였다.
“가지 마.”
디바이스를 조작하던 도원우가 홀로그램을 끈 후, 말했다.
“지금 디바이스 통신이 끊겼어. 플레이어 위성의 경보도 송신되지 않아. 그리고 결계 상태가 이상해.”
도원우의 말대로 은광고 결계의 상태가 묘했다.
정체불명의 에너미들의 돌진이 거듭될수록 투명한 결계가 점점 불투명하게 변하였다.
어느 사이엔가 바깥은 보이지 않게 되었고, 결계의 거절 반응으로 인한 스파크도 가라앉았다.
마치 은광고의 결계가 다른 무언가로 변한 것처럼 보였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어느 사이엔가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고요해진 은광고 교내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 * *
1학년 0반 교실 안.
창밖으로 눈이 내리는 게 보였다.
‘입장 시각이 되어 적이 움직였구나.’
입장이 진행되면 방문객들이 결계를 통과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결계가 통행증의 진위를 판별하기 위해 작동하게 된다.
흑막은 그 순간을 노렸다.
입장객 사이에 수백 마리의 권속을 숨긴 흑막은 입장 시각이 되자 에너미를 일제히 결계에 돌진시켰다.
물론 에너미를 돌진시키는 것만으로는 결계를 파괴할 수 없었다.
흑막이 노리는 건 결계에 부하를 가해 틈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틈을 타 12지 동맹의 배신자가 결계를 조작해, 은광고 결계를 변질시켰을 것이다.
‘지금쯤 긴 꼬리가 은광고 안에 들어와 있겠구나.’
결계를 한 번 과부하시키고, 그 틈을 노렸다고 해도 은광고 결계를 이 정도로 변질시키기는 어렵다.
흑막과 긴 꼬리는 아주 오랜 기간 은광고의 결계를 손보면서 이 기회를 노렸다.
작년 실기 시험 때 에너미와 진족을 들여보낸 건 일종의 예행연습이었을 것이다.
‘알면서도 당해야 한다는 게 뼈아프네.’
하지만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를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변수를 늘리면 긴 꼬리를 놓치고, 흑막의 다음 수를 읽어 내기 어려워질 거다.
‘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수를 둘 차례다.’
위잉.
교실 자동문이 열리며 복도에서 통화하던 민그린이 들어왔다.
디바이스 화면을 보며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디바이스 상태가 이상해. 통화가 도중에 끊겼어.”
“네? 제 디바이스 빌려드릴까요?”
하지만 사월세음의 디바이스도 먹통이었다.
통신은 방금 끊겼다.
통신의 단절은 마족의 ‘눈’의 차단과도 이어진다.
이제 은광구 주변을 보는 마족의 ‘눈’도 그 힘을 잃었을 것이다.
지금부터 신경 써야 할 건 체스보드 위에 직접 올라온 자들의 시선뿐이다.
“통신 상태가 안 좋은가 봐요…… 와, 지금 밖에 눈 와요!”
“헐, 진짜네.”
“눈 때문에 통신 상태가 안 좋은 건가? 눈사람 만들고 싶다.”
사월세음, 맹효돈, 민그린은 들뜬 얼굴로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갈 기세였다.
통신이 안 되는 걸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아직 위기감이 없는 듯했다.
눈이 품은 삿된 기운을 읽어 내는 스킬이 없는 학생들이 그저 기쁜 마음으로 눈을 맞았다가 큰일을 당했다.
나는 아이들을 불러 세웠다.
“이 눈은 맞으면 안 돼. 눈이 그칠 때까지 나가지 마.”
“네? 눈이 곧 그치나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던 아이들이 멈췄다.
반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눈보다는 내 말을 우선시해 줄 모양이다.
“할 말이 있어.”
* * *
1학년 건물 최상층, 교무실.
창문 너머로 눈이 내리는 걸 본 김신록이 탄식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
눈송이를 본 김신록은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적호와 용제건의 리플레이 보고서를 수차례 반복해서 정독한 김신록은 저 눈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삿된 눈으로 인해 수많은 은광고인들이 희생당했다.
또 저 눈에는 풍사와 우사의 힘이 깃들어 있으며, 눈을 뿌리는 구름은 용왕신의 무녀들이 다루는 오색 채운이다.
지금 이 눈을 보고 호족이나 용제건이 무슨 생각을 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눈이 오네. 슬슬 나가 봐야겠다.”
초조해하는 김신록을 보며 연신 신실 웃던 용제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까지 차를 마시고 있던 용제건은 긴장한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용제건의 저 뻔뻔한 태도를 보니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오늘 일이 모두 계획대로 진행되면 저 용은…….’
김신록은 그 이후를 생각하지 못했다.
이번 크리스마스가 무사히 끝나려면 용제건이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응원하기 어려웠다.
김신록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용제건이 찻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을 좀 봐야겠다. 신록이는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래?”
“싫어.”
“그럼 같이 갈래?”
“…….”
선뜻 같이 간다고 답하지 못했다.
저 삿된 눈은 보통 존재가 아니었다.
눈을 맞으며 밖에서 행동하려면 그만한 준비가 필요했다.
섬세하게 이능파를 컨트롤해 몸을 보호하며 밖에서 그들을 노리고 있을 적과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김신록의 경우, 역용술을 풀 필요가 있었다.
“저 눈이 품은 삿된 기운이 좀 독해서 이능파로 몸을 가리려면 힘을 개방해야 할 거야.”
용제건이 뻔히 아는 소리를 해 댔다.
지금 용제건을 따라올 거면 본모습으로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김신록은 망설이다가 역용술을 풀었다.
그러자 이목구비가 변하고, 머리카락과 눈이 붉은 비단 같은 색을 띠었다.
김신록의 본모습을 본 용제건이 황홀하게 웃었다.
“그래, 그럼 바로 가자!”
휘이이!
용제건이 교무실 창문을 열어젖히고 창밖으로 뛰어내려 비행 스킬을 사용했다.
김신록도 도약 스킬로 따라갔는데, 창밖으로 나가도 바람 한 점 느껴지지 않았다.
시안색의 공간이 김신록을 눈보라로부터 지켜 주고 있었다.
‘공간술로 가려 줄 거였으면 왜 본모습을 드러내라고 한 거지?’
김신록이 항의하면 용제건은 더 신날 게 분명했기에 입을 다물기로 했다.
곧 둘은 1학년 담당 교사들이 주로 이용하는 뒤뜰에 착지했다.
교실과 좀 떨어져 있는 이 주변엔 사람 한 명 없었다.
“그럼 해 볼까. 신록아, 떨어져 있어.”
하늘을 올려다보던 용제건이 손바닥을 펼쳤다.
사아아……!
눈보라 사이로 강렬한 이능파가 퍼져 나가며 용제건의 머리카락이 시안색으로 물들었다.
크게 뜬 용제건의 눈 역시 머리카락과 같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동시에 펼친 손 사이로 옥색의 이능파가 모여들어 구체로 변하였다.
용제건의 광림, ‘여의보주 현현’이 발동되어 만물의 인식 속에 존재하는 여의보주가 물질적으로 실체화된 것이다.
“황호와의 계약에 따라 그의 소원을 이루어 주겠어.”
‘소원’이라는 말에 반응한 여의보주가 한층 더 빛을 발했다.
빛이 강렬해질수록 용제건은 점점 용의 모습에 가까워졌다.
세로로 열린 동공, 얼굴에 돋기 시작한 비늘, 완전히 시안색으로 변한 머리카락.
그리고 눈에 어린 신성한 기운까지.
김신록은 신에 가까워지고 있는 친우의 모습을 목도하고 말을 잃었다.
“오늘 이 땅에 내리는 삿된 눈으로부터 은광고를 지킨다.”
파아아아아!
용제건의 말이 끝난 순간, 거대한 시안색의 공간이 은광고 전역을 뒤덮었다.
여의보주가 자아낸 공간 속의 은광고에서는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았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