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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93화 (589/925)

82. 퍼스트 크리스마스 (4)

반 아이들에게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 관한 설명을 마치는 사이 눈이 그쳤다.

정확히 표현하면 용제건의 힘이 은광고 안에 눈이 뿌려지는 걸 막은 거다.

‘예상대로 황지호와 한 계약을 걸고 이룬 소원만으로는 눈을 완전히 그치게 하는 건 불가능했구나.’

여의보주가 이룰 수 있는 소원에는 한계가 있다.

여의보주는 재량껏, 혹은 대가를 받고 소원을 이루어 준다.

용제건의 능력이나 받은 대가에 비해 지나치게 분에 어긋난 소원은 생명과 기력을 깎아 먹고,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아무리 빌어도 플마고의 김신록이 생환하지 않고 용제건이 약해져 갔던 것처럼.

그 점을 고려해 황지호가 용제건의 교원 계약을 수정하는 대가로 이런 소원을 빌었다.

‘오늘 내리는 삿된 눈으로부터 은광고를 지킬 것.’

굳이 삿된 눈의 원인을 제거해 달라고 하지 않은 건, 소원이 이루어지는 형태를 여의보주에게 맡기기 위해서다.

눈이 내리는 원인을 없애 버리는 형태로 소원이 이루어지면 최고겠지만, 그렇게 하면 용제건에게 부담이 갈 것 같았다.

풍백과 우사는 신화 속의 존재고, 용왕신의 무녀들은 강력한 상위 존재로부터 힘을 나눠 받은 이들이다.

그런 자들을 고작 교원 계약을 수정해 주는 대가로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은광고 전역을 뒤덮은 눈을 방치할 수 없었다.

그 결과가 지금 용제건이 만든 거대한 공간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삿된 눈은 옥색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공간에 가로막혀 더 이상 이 땅을 오염시키지도, 은광고인들의 힘을 앗아 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눈이 멈춘 건 아니야.’

용제건이 쓰러지거나, 여의보주가 이룬 소원보다 강력한 힘이 공간을 부수면 다시 눈이 내릴 것이다.

‘그래도 눈으로 인해 은광고의 전력이 묶이는 건 막았어. 첫 수는 제대로 들어갔다. 그렇다면 다음은…….’

한편, 생각에 잠겨 있던 아이들이 내 시선을 따라 창밖을 봤다.

창밖으로 더 이상 눈이 오지 않는 교정과 은광고 전체를 감싼 시안색의 공간이 보이고 있었다.

“하늘이 용쌤의 이능파 색으로 물들어 있어.”

“지금 부담임이 한 짓도 부반장이 말한 거랑 관계가 있냐?”

“용쌤이 공간술을 사용하신 거 같아요. 그렇다면, 정말로 지금 은광고는 의신이 말대로 위험한 상태인 건가요?”

반 아이들은 지금 상황을 예측한 것 같진 않았지만 침착하게 질문을 던졌다.

쏟아지는 물음에 하나씩 답했다.

“그래. 은광고는 공격당하고 있어. 통신이 끊겨서 외부의 지원을 부르긴 힘들어. 하지만 곧 교내에 에너미가 들끓을 테니 싸워야 해.”

“방금까지 통화했으니까, 대석이라면 바로 알아챌 거야. 위성으로 은광고를 관찰하고 있지 않을까?”

“은광고를 덮고 있는 구름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어. 구름이 걷히거나 결계를 원상태로 돌리지 않는 한, 외부에서 은광고 상황을 확인하기 어려울 거야. 그리고…….”

사기를 꺾는 말이 될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이었다.

단순히 통신이 단절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설령 통신이 재개된다 해도 밖에서 지원이 오긴 어렵다는 사실을 전해야 했다.

지금 외부와의 통신의 복구를 우선시해 봤자 전력과 자원 낭비일 뿐이다.

“외부의 도움을 기대하긴 어려울 거야. 지금쯤이면 높은 희귀도의 이계가 대량으로 발생해서 대처하고 있을 테니까. 오더라도 아주 늦게 올 거야.”

“설마 밖이 더 위험한 상태인 거냐?”

“그 정도는 아니야. 현재 한반도에 상주 중인 프로 플레이어 팀들만으로도 공략할 수 있는 수준일걸.”

내 말에 아이들은 자신의 처지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바깥을 걱정했다.

맹효돈의 탄래중 시절 은사가, 사월세음과 민그린의 가족들이 학교 밖에 있으니까 어쩔 수 없긴 했다.

반 아이들은 사기가 꺾이기는커녕 안심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부반장,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냐?”

“쟤 계획을 다 세운 것 같은데.”

“의신이가 아무 준비 없이 이런 상황이 닥치게 하진 않았을 거예요! 저희한테 설명을 해 준 건,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그런 거죠?”

맹효돈, 민그린, 사월세음은 우리가 지금 은광고 안에 갇혔고, 공격당할 거라는 걸 이해했으면서도 불안해하지 않았다.

저 셋은 나를 믿고 있었다.

일반 방문객 입장 시각부터 줄곧 식어 있던 손끝을 움직여 주먹을 꽉 쥐었다.

“응, 부탁할 게 있어.”

내 말에 반 아이들이 어쩐지 기뻐하는 얼굴을 한 것 같았다.

마치 내가 뭔가를 부탁하는 걸 기다린 것 같은 태도였다.

“그래, 말해 봐.”

“네!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조건 할 게요!”

흔쾌히 답한 맹효돈과 사월세음,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는 민그린 모두가 의욕에 차 보였다.

이렇게 착한 아이들한테 위험한 일을 떠넘기다니,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되돌릴 수 없었다.

턱턱 막히는 숨을 가다듬은 후, 나는 차근차근 계획을 설명했다.

“먼저 이능이 없거나 약한 사람들을 대피시킬 거야. 은광고 안에는 안전한 지역이 있어. 그곳으로 유도할 거야.”

은광구에는 비상구가 있지만, 플마고에서는 최편득과 부정 입학자의 계략으로 막혔다.

이번에는 최편득이 없으니 다른 이를 이용해 함정을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적이 모르는 확실하게 안전한 지역으로 사람들을 대피시킬 계획이다.

하지만 모두를 안전한 곳에 피난시키는 건 어려웠다.

“사람이 몰리면 에너미의 주목을 끌 테니 대피시키는 인원수는 제한시킬 예정이야. 싸울 수 있는 플레이어들은 싸워야 해.”

“그럼 피난은 어떻게 시킬 거야? 통신은 안 되잖아. 아, 뛰는 건 자신 있어.”

맹효돈과 민그린이 몸을 풀며 말했다.

지금 내가 온 학교를 달리면서 피난을 유도해 달라고 해도 기꺼이 응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것보다 훨씬 효율적인 이능을 지니고, 수많은 사람을 대피시킨 경험을 가진 능력자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피난을 유도하는 건 사월세음의 이능을 빌릴 거야.”

“네! 의신이가 옆에 있으면 할 수 있어요!”

사월세음의 광림, ‘왕이 가라사대’는 경애하는 자의 목소리를 널리 전하는 이능으로, 대상을 선정해 명령을 전달할 수 있다.

현재 은광고 교내에 있는 일반인 교직원, 싸우는 데에 적합하지 않은 이능을 가진 플레이어들의 명단은 확보한 상태다.

지도와 명단을 사월세음에게 보여 주면서 지시를 내리면 어렵지 않게 대피를 진행할 수 있을 거다.

“그럼 그 안전지대는 어딘데?”

“몇 군데 있어. 중앙도서관 지하서고라든가.”

플마고의 퍼스트 크리스마스 사건 당시, 도서부원들은 중앙도서관으로 도망쳤다.

도서부원 대다수가 전투에 능하지 못했고, 이미 부상당한 상태였기에 그들은 밖으로 나가거나 다른 학생들과 합류하지 못했다.

방어전을 이끈 학생회와 선도부는 이들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고 인원을 파견할 여유도 없었다.

결국 도서부원들은 중앙도서관에서 농성전을 펼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이들은 전원 생존했다.

‘중앙 도서관 지하 서고의 위험한 서적들이 머금은 기운들 때문에 에너미들이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지. 어쩌다 에너미가 도서관 안으로 흘러들어 와도 미궁 같은 서고 속으로 도망치면 됐고.’

지하 서고의 이능파 밀도가 지나치게 높아 장시간 있는 건 위험했지만, 시간을 정해 일반 서적이 있는 서가에 들르면 영향을 덜 받을 거다.

길을 잘 아는 도서부원들이 계속 인솔할 필요가 있으니 많은 인원을 피난시키는 건 어렵겠지만, 어쨌든 도서관이 안전 구역이라는 건 확실하다.

미로처럼 복잡한 건물 구조는 방어에 유리했다.

물론, 에너미가 아닌 긴 꼬리 같은 진족이 오면 곤란하겠지만, 그곳에는 그들의 타깃이 아닌 이들을 대피시킬 예정이다.

“그래서, 피난을 시키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거냐?”

“중앙 구역으로 이동해서 학생회와 합류할 거야. 도원우 선배님이 곧 방송부를 통해 싸울 플레이어를 모집할 거니까.”

플마고 속의 도원우는 기민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했다.

외부와의 통신은 단절되었지만, 방송부에게 지시를 내려 학교 내 방송 회선은 살리는 데에 성공했다.

도원우는 방송을 통해 학생회관에 생존자를 모아 방어선을 구축했다.

결국 도원우 본인을 포함해 큰 희생을 치렀지만 전멸은 면했다.

‘삿된 눈을 맞고 싸워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지. 게다가 에너미는 눈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점점 학습하며 강해졌어.’

자꾸 플마고의 퍼스트 크리스마스에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맞이한 최후가 떠올랐다.

나는 애써 그 모습을 머릿속에서 떨쳐 내며 설명을 이었다.

“이능을 쓰고 나면 사월세음은 전투에 참가하기 어려울 테니, 이후의 전투는 둘한테 맡길게.”

“……너는?”

“물론 나도 같이 싸울 거야. 중앙 구역에 도착할 때까지는.”

맹효돈이 눈살을 찌푸렸다.

끝까지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게 마음에 안 드나 보다.

“그 이후에 나는 거주 구역 쪽으로 가야 해.”

“나도 같이 가면 안 되냐?”

거주 구역의 상황을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수준의 맹효돈이 그 자리에 있으면 자칫하다간 인질이 될지도 모른다.

맹효돈이 내 생각을 읽은 것 같지는 않지만, 인상을 구기긴 해도 같은 질문을 더 하진 않았다.

“중앙 구역에는 레나랑 우람이가 있어. 가서 합류하자.”

“맞아요! 두 분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를수도 있잖아요.”

민그린과 사월세음이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슬슬 움직여야 할 시간이 됐으니 서두르기로 했다.

“그럼 먼저 피난을 유도할게. 사월세음만 남고 두 사람은 밖에서 기다려 줘. 지정하는 위치로 이동하게 하고, 이 말을 반드시 전해야 해.”

사월세음의 광림을 발동하기 전, 중요한 말을 덧붙였다.

“이동할 때에는 절대 에어 보드를 이용하지 말 것. 그리고 우산을 쓴 자를 보면 곧바로 도망칠 것.”

*    *    *

용제건의 양손 사이에 있던 여의보주가 허공으로 녹아 사라졌다.

그러나 용제건의 세로로 열린 동공도, 얼굴에 남은 비늘도 여전했다.

본모습을 감추기 어려울 만큼 힘을 소모한 듯했다.

“…….”

김신록은 은광고를 감싼 옥색의 공간을 올려다봤다.

김신록을 포함한 은광고 전체가 이 기적을 보았다.

구름이 걷히면 은광고 밖에서도 이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

‘기뻐해야 하는데, 수고했다는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김신록이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실눈을 뜬 용제건이 순간 비틀거렸다.

용제건을 부축하기 위해 막 달려갔을 때였다.

스륵.

주변의 건물 위, 그림자가 보였다.

기척을 한계까지 죽이고 있다가 막 모습을 드러낸 듯했다.

막 나타난 정체불명의 존재들은 전원 우산을 쓰고 있었다.

“여의보주의 힘이 생각한 것보다 강한데. 어떻게 된 거야? 눈을 막을 만한 힘은 없다더니. 괜히 우산을 준비했네. 아, 저 공간 밖에선 아직 눈이 오고 있으니까 공간의 근원을 쓰러뜨리면 되는 걸까. 그럼 다시 눈이 내리겠지. 준비는?”

“포위를 마쳤습니다.”

“권속들이 공격 태세를 갖췄습니다.”

우산을 쓴 이들은 김신록과 용제건이 아는 진족이었다.

그들은 청소년 수련회에서 김신록을 습격했던 번민의 곰과 수하들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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