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퍼스트 크리스마스 (5)
2학년 구역.
이곳에도 잠시 눈이 내렸으나 눈을 맞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운동장에서 ‘제갈재걸 선생님 3D 화보집 앙코르’를 개최하던 2학년 0반 학생들이 거대한 이능파 방어막을 허공에 띄웠기 때문이다.
“아니, 오늘 날씨 맑을 거라고 했는데 뭐임.”
“기상청이 나를 속였어…… 이럴 줄 알았으면 카메라 방수 팩 챙기는 건데…….”
“야, 기상청 홈페이지 안 열려. 통신도 안 돼.”
“……저 눈 뭔가 이상한데. 그냥 눈이 아닌 것 같아.”
“그냥 눈이 맞든 아니든 제갈재걸 선생님이 눈을 맞게 할 수는 없다!”
“얘들아, 이능파 모아!”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해 제갈재걸 거대 조각상은 야외에서 산타 의상을 입고 방문객을 환영할 예정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제갈재걸의 산타복이 다 젖을 판국이었다.
제갈재걸의 거대 조각상과 산타복을 지키기 위해 2학년 0반이 힘을 모았다.
최강최악의 악동들이 쏘아 올린 총천연색의 이능파막이 하늘을 덮었다.
“빨리 제갈재걸 선생님을 전시장 안으로 옮기자!”
“왕찬아, 광림 써라.”
2학년 0반 학생들이 운동장에 설치한 전시장 안으로 제갈재걸 거대 조각상을 옮긴 사이, 눈이 그쳤다.
정확히 말하면 용제건의 공간이 은광고 전체를 뒤덮어 눈이 땅에 닿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한편, 2학년 1반의 플라네타리움 준비를 돕던 염준열이 용제건의 공간을 발견했다.
‘제건이 형의 힘이야! 이 정도의 힘이면 여의보주로서 광림을 사용한 걸 텐데…….’
끊긴 통신, 갑자기 내린 눈과 눈을 막은 용제건의 공간.
염준열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직감했다.
그 직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뭐야, 저거. 누가 분장한 거 아니지?”
“통찰계 스킬로 확인해 봐!”
“……에너미야! 다섯 이상이 이쪽으로 접근 중!”
2학년 0반 소속 정해온이 통찰계 스킬로 에너미를 꿰뚫어 보고 외치자, 학생들이 일제히 무기 아이템 카드를 꺼내 실체화시켰다.
“전시회장 안으로 에너미 못 들어가게 막아! 저번 이계 공략 때 공격대 맡은 쪽이 에너미 상대하고, 수비대가 전시회장 폐쇄해!”
반장 금찬솔의 지휘에 따라 2학년 0반 학생들이 곧바로 움직였다.
2년가량 같은 반으로 지내며 다진 팀워크가 빛을 발했다.
2학년 0반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대응하는 사이, 건물 안에 있느라 상황 파악이 늦었던 학생들이 밖으로 나와 교전 준비를 마쳤다.
염준열은 안에서 고립되는 학생이 없도록 건물을 샅샅이 수색했다.
‘0반 애들이라면 저 정도 에너미들은 상대할 수 있어. 일단 전투는 맡기고 수색부터 하자!’
염준열은 2학년 건물을 돌아다니는 동안 창문 밖으로 봤던 에너미에 관해 고찰했다.
외견상 에너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추위에 강해 보이는 하얀 털가죽.
언 바닥을 미끄러지지 않고 이동할 수 있을 법한 발톱.
소리나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모습.
에너미의 특징과 눈이 내리려 했던 상황이 겹쳐져 떠올랐다.
‘만약 눈이 내렸다면 저쪽이 훨씬 유리했을 거야. 학교 안으로 에너미를 침투시킨 자들이 눈을 내린 걸까?’
마치 에너미들은 눈 속에서 싸울 걸 가정하고 출현한 것 같았다.
눈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학생도 있었는데, 만약 저 눈에 디버프 효과가 있다면 전황이 굉장히 불리하게 돌아갔을 것이다.
‘제건이 형이 눈을 막은 의미가 있겠지. 조심해야 해!’
큰 힘을 발휘한 용제건이 걱정되었지만, 염준열은 학생의 대피를 우선시하기로 했다.
통신이 되지 않아 용제건의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고, 용제건이 위험에 처했다면 염준열도 어찌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냉정하게 그렇게 판단했지만 자꾸 걱정되는 마음이 생겼다.
‘제건이 형, 학생회 애들, 선배님, 후배, 선생님들…… 그리고 스승님, 의신이가 무사해야 할 텐데!’
염준열이 2학년 건물에 사람이 남지 않은 걸 확인하고 바깥으로 나왔을 때.
교내 방송이 시작되었다.
[학생회에서 알립니다. 현재 교내에서 에너미가 다수 출현하였습니다. 학생 및 교직원 플레이어는 전원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도원우의 목소리였다.
방송에는 잡음이 섞여 있었으나 도원우의 또박또박한 음성이 학교 전체에 잘 울려 퍼졌다.
“전 학생회장이다!”
“지금 디바이스 먹통 아니었나?”
“교내 방송 회선을 살린 듯요. 음질 구린 거 보니까 옛날에 쓰던 회선인 거 같은데.”
도원우의 목소리는 매우 침착했다.
도원우는 듣는 사람도 마음이 안정될 만큼 차분한 어조로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현재 디바이스 통신과 위성 정보 수신이 불가능하며, 은광고의 결계 오작동으로 인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태입니다. 출입구 쪽으로 이동 중인 분들은 즉각 행선지를 변경해 주십시오.]
도원우가 한 말은 단체로 패닉 상태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내용들이었는데, 동요하는 이들이 없었다.
다들 지금 전력으로 에너미와 싸울 만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학생회장 도원우를 신뢰하고 있었다.
도원우는 재학 중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은 우수한 플레이어였고, 학생회장으로서 한 번도 학생들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교내 회선을 부활시켜 방송을 시작한 것부터 큰 신뢰감을 줬다.
[청각과 후각이 발달한 에너미가 확인되었습니다. 건물 안에 있어도 발각될 가능성이 있으니 조속히 중앙 구역으로 피난하시길 바랍니다. 단, 현재 본인이 위치한 구역에서 하루 이상 농성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그 자리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그 말에 2학년 학생들이 이동할 준비를 했다.
현재 이곳의 전력은 충분하지만, 2학년 건물은 농성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지금은 괜찮지만 2학년 학생들이 이능파를 소모한 상태에서 에너미가 대량 습격해 오면 전선이 무너질 가능성이 컸다.
중앙 구역으로 이동하라는 말에 납득한 학생들은 대열을 짰다.
에어 보드를 꺼내려는 학생들이 있었으나 이어진 방송에 동작을 멈췄다.
[최소 공격대 둘 이상의 단위로 이동할 것을 권장하며, 비행형 에너미가 배회 중이니 에어 보드 사용을 자제해 주시길 바랍니다.]
에어 보드를 탄 상태로 공중전을 벌이기는 쉽지 않다.
지상에서 싸우는 것보다 소모가 크고 격추당할 위험이 컸다.
[다음 방송은 1시간 후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긴급한 내용은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플레이어들의 건투를 빕니다. 이상입니다.]
‘지지직’ 하는 잡음과 함께 방송이 끝났다.
염준열은 방송의 내용을 되새기며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역시 원우 형이야. 나도 저런 학생회장이 되어야지……!’
현재 전원 등교한 반은 2학년 0반밖에 없어서 그들을 중심으로 공격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남은 2학년 학생들 중에서 척후병을 뽑고, 후미를 맡을 이를 정했다.
염준열이 위험한 역할을 자처했다.
“내가 제일 뒤에 설게. 내 광림을 발동 중일 때에는 뒤에서 습격해도 대처할 수 있고, 뒤처져도 홍룡을 타고 따라갈 수 있어.”
염준열의 말이 끝나자 마진승이 손을 번쩍 들었다.
마진승은 이 상황에서도 염준열을 상대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고 있었다.
“나도 맨 뒤에 설 거다!”
“님들 이능 상성 꽝이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가야지. 불로 대응하지 못하는 능력이 오면 어떡하냐!”
“님 광림 아직 잘 못 쓴다면서요.”
“크윽……!”
금찬솔과 왕찬솔에 의해 마진승이 완벽하게 논파당했다.
염준열은 한숨이 나오려 했지만,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한심한 자칭 라이벌을 상대할 때가 아니었다.
“편한 자리에 서. 진승이가 뒤에 있든 말든 별 차이 없으니까. 그러면 빨리 가자.”
파아아!
염준열이 광림, 홍룡소환(紅龍召喚)을 사용했다.
불꽃 어린 이능파의 결정체, 홍룡을 본 이들이 여기저기에서 감탄했다.
마진승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커진 홍룡이 그를 한 번 노려보고 휙 스쳐 지나갔다.
마진승은 염준열의 성장을 실감하고 순간 얼어붙었지만, 이를 악물고 홍룡과 나란히 걸었다.
그사이에 염준열은 머릿속에서 마진승을 지우고 생각에 잠겼다.
‘동하가 있으면 광림으로 은광고 전체를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오늘 바쁘다고 했었나?’
2학년 일행이 중앙 구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을 때.
2학년 건물 옥상에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아무도 기척을 느끼지 못한 건지, 옥상을 올려다보는 이는 없었다.
그 누군가는 우산을 쓰고 홍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중앙 구역으로 이동하며 에너미를 몇 마리 쓰러뜨린 시점.
도원우가 진행하는 방송이 들렸다.
‘눈을 주의하라’는 내용이 빠진 것 외에는 플마고에서 한 것과 큰 차이가 없는데, 실제로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도원우의 조리 있고 흔들림 없는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이다…….”
“의신이 말대로 도원우 선배님이 방송을 했네요!”
“야, 넌 말하지 말고 있어! 에너미가 그쪽 본다!”
방송 중에도 에너미의 습격이 발생했다.
사월세음이 자기 입을 틀어막은 사이, 맹효돈이 에너미의 복부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맹효돈의 움직임에 맞춰 민그린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퍼억! 퍽!
두 개의 타격음이 거의 동시에 들렸다.
복부와 등을 동시에 가격당한 에너미가 비틀거리자 맹효돈이 오른발을 후려 상대의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쿠쿵!
에너미가 쓰러지자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울렸다.
보기보다 무게가 꽤 되었나 보다.
바닥에 쓰러진 에너미의 미간을 노려 내가 확인 사살 했다.
탕! 타앙!
총알에 직격당한 에너미가 꿈틀거리다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내 손에 들린 이능 총을 보고 맹효돈이 한마디 했다.
“부반장, 웬일로 총을 들었냐?”
“총이 이능파 소모가 적어서.”
“……앞으로 이능파 쓸 일이 많나 보네.”
맹효돈은 아까부터 나를 계속 수상하게 여겼다.
주거 구역으로 가자는 걸 거절한 게 마음에 걸린 건가?
불온한 기류가 흐른다고 생각한 건지 사월세음이 허둥지둥 끼어들었다.
“아, 그. 아까 피난 유도했을 때 말인데요. 좀 고립된 지역에 혼자 계신 분도 있었는데, 다행히 선도부분들이랑 합류한 것 같더라고요!”
사월세음이 ‘왕이 가라사대’를 발동하는 동안에는 상대의 상황을 다소 감지할 수 있다.
나는 상황을 설명할 겸, 화제를 바꿀 겸 한마디 덧붙였다.
“선도부에서 준비한 이벤트 때문에 그럴걸. 크리스마스에도 혼자 연구동에 남아서 실험하고 논문 쓰는 분들, 일하시는 분들이 많잖아. 산타 분장을 한 선도부원들이 선물을 배부할 예정이었어.”
맹효돈은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데?’라고 묻고 싶어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맹효돈이 뭐라고 말하기 전, 끼어든 인물이 있었다.
“조의신, 선도부실에 들른 이유가 그거였나?”
1학년 학생들이 접근하는 건 짐작했는데, 제일 앞에 듀얼링 실드를 든 유상훈이 서 있을 줄은 몰랐다.
당연히 선두는 안다인이 맡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유상훈이 앞에 있는 건가.
그야 유상훈은 제일 앞에서 방패가 될 생각으로 1학년을 이끌고 온 거겠지만, 안다인이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설마 안다인은 지금…….’
안다인을 발견하지 못한 사월세음이 물었다.
“어? 다인이는 어디 갔어요?”
유상훈은 마치 내 반응을 떠보려는 것처럼 나를 빤히 보면서 답했다.
“담임 찾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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