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퍼스트 크리스마스 (8)
마족은 플마고의 퍼스트 크리스마스에서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마족은 멀리서 방윤섭을 권속화시킬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마족이 이 자리에 등장했다.
‘원래 이 시기에 죽었어야 할 이들이 전부 살아남았어. 그러니 흑막도 세게 나온 거겠지.’
범상치 않은 이능파를 휘감은 이의 등장에 어수선해졌다.
다들 에너미와 싸우거나 방윤섭에게 정신이 쏠려 있다고 하나, 이렇게나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마족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해서 당황한 것 같다.
민그린이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산을 쓰고 있어……!”
‘우산을 쓴 자를 보면 곧바로 도망칠 것.’
1학년 0반 교실을 나서기 전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나 보다.
민그린의 목소리는 현재 토벌당하는 중인 에너미의 단말마보다 훨씬 작았는데, 인비디우스의 사제는 이를 흘려듣지 않았다.
“그 기분 나쁜 눈을 맞기 싫으니 우산을 써야지. 눈은 곧 내릴 테니까.”
인비디우스의 사제는 다시 눈이 내리게 될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정보를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굳이 삿된 눈을 경계하게 될 만한 단서를 뿌리는 이유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에 있는 학생들을 전부 죽일 생각이구나.’
어차피 죽게 될 상대에게는 정보를 숨길 필요가 없다.
교활한 마족이 입단속을 하지 않는 건 그 때문일 거다.
‘저자가 뒤에 감춰 둔 건 뭐지?’
인비디우스의 사제는 크게 펄럭이는 로브와 우산 그림자 뒤로 무언가를 감춰 두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기 전, 마족이 먼저 움직였다.
마족이 우산을 들지 않은 손을 들어 올렸다.
하늘을 향해 펼친 손바닥 위에는 방윤섭의 오른팔에 박혀 있던 것과 똑같은 자줏빛 안구가 들려 있었다.
파아앗!
손바닥에서 원래 색이 무엇인지 짐작도 안 갈 만큼 혼탁한 색의 이능파가 터져 나왔다.
마족의 로브에 새겨진 것과 같은 인비디우스의 문장이 하늘에 그려지고, 에너미들은 강렬한 이능파를 뒤집어썼다.
그러자 이능파를 받은 에너미들에게 이변이 발생했다.
그르르…… 그그극…….
“에너미가 더 강해진 거 같은데……?”
“뭐야! 방금 급소를 찔렀는데, 회복되어 있잖아.”
“방금 쓰러뜨렸던 에너미가 부활한다!”
에너미들의 상처가 아물고, 소멸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톱은 더욱 날카롭게, 몸을 덮은 털은 무성하게 변했다.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던 학생들이 동요했다.
피부를 저릿하게 만드는 수준의 이능파를 두른 누군가.
그 이능파에 반응해 힘을 얻은 에너미.
은광고 학생들이 결론을 내렸다.
“진족의 권속이었나…….”
“빵셔틀을 공격한 것도 설마!”
학생들이 긴장했다.
마족의 사제는 직접 공격할 마음은 없는지 여전히 우산을 들고 느긋하게 이쪽을 보고 있었다.
마족의 시선이 방윤섭 쪽에 고정되어 있어, 그 앞을 막아섰다.
나를 본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무명의 초신성은 예의가 바르다고 들었는데, 인사도 없네.”
어디에서 뭘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은광고를 위협하는 마족에게 차릴 예의는 없었다.
인사 대신 질문을 던졌다.
대답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마족은 순순히 답했다.
“은광고에는 무슨 일로 온 겁니까?”
“찾는 게 있어서. 혹시 까마귀 가면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인간? 그럴싸한 정보를 주면 죽이진 않고 권속으로 삼아 줄게.”
‘까마귀 가면’이라는 말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저 마족은 까마귀 가면을 쓴 자가 언령을 사용해 아바리티아의 사제를 붙잡은 걸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이를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
그 이유가 바로 저거였나 보다.
‘직접 찾아내려 한 거구나!’
이 자리에는 우리 반 아이들을 비롯해 까마귀 가면과 엮인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까마귀 가면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르는 사람도, 아는 사람도 침묵했다.
‘까마귀 가면이 나라는 걸 아는 애들도 많은데.’
내 정체를 아는 아이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만일의 경우에도 끝까지 내 정체를 폭로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분위기를 보니 모르거나, 알아도 말할 생각이 없나 보구나. 뭐, 상관없어. 까마귀 가면은 은광고와 연이 있는 것 같으니 말이야. 마족의 힘으로 학생을 학살하면 나오겠지.”
“까마귀 가면을 찾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섬기는 질투의 마신, 인비디우스 님의 교리 중 하나가 이거거든.”
순간,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마신의 계시라도 받는 듯 눈을 번뜩였다.
마치 마신이 사제의 입을 빌려 말하는 것 같았다.
[빛나는 것은 혼탁하게 물들이고, 바닥에 있는 것은 수렁에 처박는다.]
사제의 목소리와 전혀 다른 억양과 톤으로 말한 섬뜩한 소리가 그 교리인가 보다.
질투의 마신이 세상에 전파하고자 하는 교리답게 추악한 내용이었다.
“까마귀 가면은 빛나는 것이었지. 그걸 노리는 이들이 많아. 하지만 나는 내 손으로 그걸 죽이거나 붙잡고 싶어. 그리고, 기습을 하려는 거면 멈추지그래? 이미 들켰으니까 기습의 의미가 없어.”
그 말에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기습을 계획하던 이들이 굳었다.
곽경구에게 시선을 한 번 준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주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도 꽤 괜찮네…… 까마귀 가면이 없었다면 너를 노렸을 거야.”
“……!”
저 미친 마족의 사제가 감히 타이틀 히어로를 노리는 건가?
마족의 헛소리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거기, 너.”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방윤섭을 가리켰다.
방윤섭은 인비디우스의 사제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벌벌 떨고 있었다.
사족의 수장이 준 비늘로 가호를 받았어도,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너는, 그, 내 머릿속에서 말을 걸던…….”
“여기 눈이 하나 더 있다. 뱀 비늘 대신 이걸 심장 쪽에 받아들이고 힘을 폭주시켜라.”
“시, 싫어! 내가 미쳤냐!”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내민 두 번째 안구를 보고 방윤섭이 악을 썼다.
눈앞의 진족이 무섭지만, 저 안구에 더욱 공포를 느끼는 듯했다.
사족의 수장이 가호를 내린 방윤섭이 저렇게 격렬하게 심적으로 거부를 하면 권속화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마치 그렇게 나올 걸 알았다는 듯,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내게는 인질이 있다. 네가 내게 은혜를 입은 이후, 가장 많이 떠올리던 얼굴이지.”
촤악!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로브 뒤에 숨겨 둔 것을 드러냈다.
그림자 뒤에는 이능파 봉인술식이 새겨진 천 뭉치가 있었다.
그리고 천을 치우자 입이 틀어막힌 채로 꽁꽁 묶인 최영희가 보였다.
방윤섭은 숨을 헉 들이켜더니 최영희를 향해 뛰쳐나가려 했다.
“놔, 놔! 이 새끼야! 쟤가 저기 있잖아!”
나한테 붙잡힌 방윤섭이 악을 썼다.
방금 전까지 오른손의 안구에 삼켜질 뻔하고, 마족의 사제에게 벌벌 떨었던 방윤섭 같지 않았다.
인비디우스의 사제는 보란 듯이 최영희의 미간에 손끝을 가져갔다.
손끝에 모인 탁한 빛의 이능파가 칼날처럼 굳자 피부가 찢긴 건지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항을 멈추고 내 힘을 받아들여라. 그렇게 하면 너와 인질은 내 권속으로 삼고 죽이지는 않겠다.”
마족의 말에 방윤섭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 시선 끝에는 주수혁을 비롯한 2반 아이들, 빵을 배달하다가 안면을 튼 우리 반 아이들 그리고 최영희가 있었다.
최영희는 입이 막힌 바람에 말을 할 수 없지만 정신 없이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방윤섭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망설이고 있네. 여긴 빨리 처리하고 합류하기로 했는데. 그러면 본보기를 보여 줄게. 인질은 죽이면 가치가 사라지니까…… 다른 인간들을 죽여야겠지.”
그 모습에 초조감이 깊어졌다.
‘예상보다 늦어!’
시간을 더 끌었어야 했는데, 내 수가 어긋나고 말았다.
인비디우스의 사제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마신의 힘을 개방하려 했다.
나는 급히 외쳤다.
“전원 대피! 이탈이 불가능하면 방어 준비!”
이능파로 방어하려 했지만, 마족이 어디를 노리는지 알 수 없었다.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로브를 걷어 올리자 팔뚝에 마신이 새긴 무수한 스티그마타가 드러났다.
마치 야수가 쥐어뜯은 듯한 스티그마타에서 뿜어져 매캐한 빛이 향한 곳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기습에 가담하려 했던 건지, 뒤로 물러나 있던 민그린과 목우람이 있었다.
* * *
2학년 구역에서 출발한 일행은 신중하게 중앙 구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범하게 앞으로 나아갈 줄 알았던 2학년 0반 학생들은 편집증에 가깝게 주의하며 전진했다.
“우기환 선배 그 인간들이 예전에 얼마나 악랄한 덫을 깐 줄 알아?”
“그래! 학교 안이라도 조심해야 해!”
금찬솔과 왕찬솔이 막 입학했을 때, 그들이 제갈재걸에게 감화되기 전.
은광고인들은 최강최악의 악동들 때문에 ‘지옥의 한 달’을 보냈다.
그 시기에 이들은 서열 정리를 한답시고 선배 0반들에게 도전했는데, 우기환은 후배에게 진심으로 맞섰다.
1학년과 2학년 구역 사이에서 전쟁을 치렀던 이들은 학교에서 싸우는 데에 익숙했다.
“야, 이러다가는 중앙 구역에 가는 데 몇 시간은 걸리겠다!”
“지금까지 상대한 에너미들은 희귀도가 그렇게 높지 않았어. 그것들이 우기환 선배님 수준의 덫을 깔 수 없을걸.”
“천천히 가는 것도 무섭고, 서둘러 갔다가 뭔 일이 생기는 것도 좀 무섭긴 해.”
“신중한 건 좋지만 합류가 늦어지면 소모가 커.”
의견이 갈리는 가운데, 갑자기 정해온이 외쳤다.
“멈춰!”
그 말에 2학년 일행이 즉각 행군을 중단했다.
뒤에서 따라오던 염준열이 홍룡을 타고 올라 하늘에서 정해온을 내려봤다.
“무슨 일이야?”
“전방에 있는 기계 보여?”
비행 중인 염준열과 통찰계 스킬을 가진 학생들이 정해온이 가리킨 방향을 확인했다.
경계하던 이들이 기계의 정체를 확인하고 안심했다.
이계 시뮬레이터였다.
크기나 디자인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구형으로 추측되었다.
“신형 이계 시뮬레이터로 교체하기 위해 밖에 보관 중인가 보네.”
“이 학교에 아직 저 정도로 구형인 기기가 있었어?”
“아날로그 제품도 있는데 구형 한두 개쯤은 있겠지.”
은광고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물건이었으나 정해온은 고개를 저었다.
“저 기계, 방송국에서 본 거야.”
“뭐?”
“나는 전투에 참가 안 했지만, 실물을 보기는 했어. 저게 있던 지하 주차장에서 이계가 네 개나 생겼어! 이계 밖인데 플로어 마스터 같은 에너미도 나오고…….”
정해온이 발견한 건 예전에 남궁 그룹에서 개발했다던 지력을 이용하는 이계 시뮬레이터였다.
“그때 그 이계 시뮬레이터 몇 개나 있었어?”
“한 개.”
금찬솔의 질문에 정해온이 딱 잘라 답했다.
“……지금 이 주변에 저 기계가 몇 개나 있지?”
“하늘에서 봤을 때에는 다섯 개 있어!”
염준열의 대답에 금찬솔과 왕찬솔이 무기를 든 손에 이능파를 실었다.
“야, 빨리 저거 다 부숴 버리자!”
“공격! 돌격하라!”
우우우웅……!
그러나 그 판단이 늦은 것인지, 은광고의 지력을 빨아들인 이계 시뮬레이터가 가동되었다.
2학년 일행이 이계 시뮬레이터들을 향해 달려든 순간,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마치 그들은 이계에 있는 것 같았다.
우산을 쓴 자가 멀리서 이계처럼 변한 공간을 지켜보다가, 그 안으로 들어갔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