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퍼스트 크리스마스 (9)
갑자기 방윤섭이 날뛰기 시작했을 때, 권레나는 채찍을 놓치고 말았다.
에너미 탐지 스킬을 믿고 에너미가 아닌 존재들에게는 완전히 신경을 끈 게 패착이었다.
권레나가 반사적으로 채찍을 향해 손을 뻗기 전, 목우람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레나!”
콰아아앙!
목우람의 도끼날이 방윤섭의 오른손이 날린 충격파를 빗나가게 했다.
충격파는 땅을 길게 그으며 폭발했다.
만약 목우람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권레나는 저 부서진 바닥 꼴이 났을지도 모른다.
바로 조의신을 비롯한 1학년 학생들이 도착했기에 권레나는 전선에서 물러났다.
무기를 놓친 권레나가 있어 봤자 방해만 될 게 뻔했다.
‘우람이랑 반 아이들이 안 와 줬으면 지금쯤 나는…….’
권레나는 분하긴 했지만, 그만큼 두려웠기에 조용히 물러났다.
권레나의 분한 마음은 곧 공포로 뒤덮였다.
정체불명의 진족이 나타난 순간, 권레나는 두려움에 질려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목우람과 민그린은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기척을 죽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습을 가할 생각인 곽경구와 주수혁을 보조할 생각인 듯했다.
‘저 둘은 싸울 생각이야!’
강적을 만나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생환한 목우람.
실전 경험이 적고 낯을 많이 가리지만, 유수의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자란 민그린.
두 사람은 수많은 권속을 부리는 진족을 상대로도 전의를 상실하지 않았다.
목우람과 민그린은 저 진족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을 텐데도 싸울 생각인 듯했다.
둘은 진족의 뒤를 노리고 조용히 돌아서 움직였다.
“그리고, 기습을 하려는 거면 멈추지그래? 이미 들켰으니까 기습의 의미가 없어.”
그러나 그들의 기습 시도는 실패했다.
진족의 눈이 순간 권레나의 친구들을 훑었다.
그 눈을 본 권레나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권레나는 저런 눈을 한 진족과 인간들을 환몽 경매에서 수도 없이 봤다.
‘누군가를 괴롭히고, 해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 눈이야.’
저 진족은 사람을 동등한 생명으로 보지 않는 눈을 하고 있었다.
권레나는 저 진족이 여기에 있는 이들을 공격하리라고 확신했다.
권레나는 공포를 느낀 것과 동시에 결의했다.
‘이번에야말로 친구들을 지켜야 해!’
조의신은 권레나가 환몽 경매에서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라고 말했다.
권레나가 염준열의 모습을 한 적벽괴도 조의신을 구하려 했으니까.
그러나 ‘무언가를 했다’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권레나는 환몽 경매에서 사월세음을 구하지 못했다.
권레나도 친구들을 돕고, 구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은광고에서 배운 것들을 전부 떠올려 봤다.
권레나는 낙제를 겨우 면하는 신세의 플레이어에 지금은 무기도 없다.
자신보다 우수한 플레이어들을 구할 수단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권레나가 생각에 잠긴 동안에도 상황은 급하게 흘러갔다.
진족은 인질로 잡힌 최영희를 보여 주며 방윤섭에게 권속이 될 것을 권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권레나는 친구들을 지킬 방법을 찾는 데에 온 신경을 쏟았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때, 권레나의 눈에 놓친 채찍 대신 쥐고 있었던 SSR급 이능 바이올린 카드가 들어왔다.
권레나는 플레이어로서의 이능은 별로였지만, 연주가로서의 재능을 타고났다.
그녀는 바이올린을 빠르게 익혔고, 바이올린을 통해 이능을 발현시킬 수 있었다.
권레나는 주오 아일랜드에서 권제인과 함께 연주한 자리에서 광림, ‘허상 연회’를 발동시키기도 했다.
‘바이올린을 연주해서 허상 연회로 저 진족의 눈을 속일 수 있지 않을까……?’
권레나는 기말고사에 대비해 시뮬레이터 룸에서 비사종 에너미를 상대했던 것을 떠올렸다.
채찍을 놓친 권레나가 바이올린을 실체화하여 연주하려 했지만, 바이올린은 노래하기를 거부했다.
진짜 에너미가 아닌 연습용 상대에, 친구들이 응원하고 있던 자리였는데도 그랬다.
권레나는 그때보다 더욱 동요하고 겁에 질린 상태이므로 바이올린이 응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때, 조의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원 대피! 이탈이 불가능하면 방어 준비!”
권레나는 그 말에 이탈이나 방어를 하는 대신 친구들이 있는 쪽을 보았다.
자줏빛 안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와 뒤섞인 바람에 본래 색을 짐작할 수 없는 흐리고 혼탁한 빛이 민그린과 목우람을 향해 쏘아졌다.
민그린과 목우람이 방어를 굳힌 채로 뒤로 물러났지만, 스티그마타가 머금은 상위 존재의 힘을 피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그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부반장!”
조의신이 무방비한 상태로 둘 앞에 섰다.
이능파로 몸을 보호하는 것보다 가속하여 둘 앞에 서는 걸 우선시한 건지, 조의신이 방어를 위해 뭔가 준비한 흔적은 없었다.
권레나는 자신을 구한 은인이 지금 스스로를 희생하려 한다는 걸 직감했다.
‘의신아……!’
환몽 경매에서도, 첫 번째와 두 번째 시도를 할 때에도,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조의신은 권레나를 구해 줬다.
권레나도 조의신을 구하고 싶었다.
마신의 힘이 조의신을 덮치기 직전, 권레나는 바이올린을 실체화하여 직감에 의존해 움직였다.
* * *
민그린과 목우람이 이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자 나도 모르게 몸을 날렸다.
수를 어떻게 둬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저 둘이 다치거나 죽는 걸 보기 싫다는 마음이 컸다.
파아아아아……!
혼탁한 빛에 휘감기기 직전, 뒤늦게 이능파를 끌어올리려 했으나 신체를 가속하는 데에 힘을 쓴 바람에 쉽지 않았다.
내 신체 능력을 고려했을 때, 죽지는 않으리라 판단했으나 고통은 각오해야 했다.
다음 수를 생각하며 각오를 굳혔을 때였다.
파스스…….
그러나 충격은 없었다.
눈앞에서 백금색의 잔해가 혼탁한 빛을 삼키다 흩어지는 게 보였다.
본래의 형체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로 조각조각 난 백금의 파편, 볼품없이 휘어진 현, 빛을 잃은 스크롤과 브릿지가 바닥에 굴러다녔다.
“의신아! 다치지 않았어? 바보 아니야! 앞을 막으면 어떡해!”
“부반장, 괜찮습니까! 아…….”
목우람이 내 안부를 묻다가 파편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했다.
목우람은 그 파편들을 보자마자 원래 그게 무엇이었는지 안 것 같았다.
‘설마 내가 아무 피해도 입지 않은 건…….’
스티그마타가 뿜은 빛이 잦아들자 잔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부수어지기 전의 실물을 자주 봤기에 알 수 있었다.
권제인이 권레나에게 선물한 백금색의 이능 바이올린이었다.
민그린도 바이올린을 알아본 건지 멍하니 그 잔해를 바라봤다.
“레나의 바이올린이 스킬을 막은 거야……?”
높은 희귀도의 아이템은 일정 수준의 스킬을 무효화하기도 한다.
권레나가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동안에 비사종 에너미의 부식 스킬이 통하지 않았던 것처럼.
권레나는 우리가 마족의 스킬에 당할 것 같자 이능 바이올린을 실체화하여 던진 듯했다.
직접 연주하며 광림을 발동시킨다는 선택지도 있었는데, 권레나는 주저 없이 바이올린을 희생시켰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이능 바이올린이 완전히 부수어졌는데도 권레나가 기쁘게 중얼거렸다.
권레나에게 저 바이올린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아는 나로선 기뻐할 수 없었다.
좌절한 권레나에게 희망을 준 곡을 연주한 바이올리니스트.
권레나가 가장 존경하고 동경하는 스승이 직접 선물한, 그녀를 위해서 만든, 세계에서 하나뿐인 바이올린이다.
권레나는 그걸 우리를 위해 포기한 거다.
‘차라리 내가 다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나는 다치면 치료할 수 있지만, 거의 가루처럼 부수어진 바이올린이 원래 형태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목우람이 빈말로도 ‘제가 고쳐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안 하는 걸 보니 그럴 것 같았다.
높은 희귀도의 아이템을 복구하려면 그만큼 강력한 복구 이능이 있어야 할 텐데, 세계에서 한 명밖에 없는 장인의 유작을 복구하려면 상위 존재가 직접 나서도 될지 안 될지 모르겠다.
권레나의 보물을 어떻게 보상하면 좋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쾅!
“조의신,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라.”
어느 사이엔가 달려온 유상훈이 내 앞에 서서 듀얼링 실드를 고쳐 쥐며 말했다.
유상훈이 쓸데없는 생각은 말라고 했는데, 지금 내가 한 생각 중에는 쓸데없는 것이 없었다.
아니, 마족과 대치한 일촉즉발의 상황이니 전투와 관련이 없는 건 지금 상황에선 쓸데없을지도 모르겠다.
“인비디우스 님의 힘을 막을 수준의 아이템이라니. 한 번뿐이었다고 하지만 대단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힘을 거두고 내가 챙길 걸 그랬나?”
마족의 사제는 이능 바이올린의 잔해를 흥미진진해하며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발끝으로 턱받침이었던 걸로 추정되는 파편을 툭 하고 걷어찼다.
그러자 겨우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파편이 ‘부스스’ 하고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아…….”
권레나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모양새를 본 마족의 사제는 순식간에 흥미를 잃고 고개를 들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보물을 부수어 놓고 쓰레기라도 걷어찬 것 같은 태도였다.
“아이템 하나를 박살 낸 것만으로는 본보기가 안 되겠지?”
마족의 사제가 다시 방윤섭을 응시했다.
방윤섭은 또 무모하게 최영희를 구한답시고 달려들다가 주수혁에게 붙잡혀 있던 상태였다.
“놔! 놓으라고! 지금 방심하고 있잖아!”
“저자는 방심한 게 아니야. 여유를 부리는 거야!”
방윤섭은 주수혁에게 놓으라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마족의 제안에 응할 것 같지는 않았다.
마족의 사제도 그렇게 판단한 것 같았다.
“좋아. 이능파가 아깝지만 한 방 더 쏠까?”
마족의 사제가 우산을 다른 팔로 고쳐 들고는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반대쪽 팔로 스티그마타의 힘을 개방할 생각인 것 같았다.
‘다음 힘이 개방되기 전에 수가 완성되지 않으면 이쪽에서 공격해야 해!’
스티그마타에서 힘이 발산된 이후, 에너미의 공격은 더욱 거세지고 공기는 무거워져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스티그마타의 개방으로 이 주변이 마신의 힘에 잠식되고 있었다.
계획한 수가 어그러지더라도 저 두 번째 공격은 막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당신의 힘을 봉인합니다.]
어디선가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음성에 실린 이능파가 ‘우웅!’ 하고 울려 퍼졌다.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당신도, 당신의 권속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습니다.]
쿠우우웅……!
마족으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마족과 그 권속을 짓눌렀다.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들어 올린 손이 벌벌 떨렸지만, 움직이지는 못했다.
에너미들도 거짓말처럼 공격을 멈추고 굳어 버렸다.
‘드디어 왔구나!’
예상보다 늦었지만, 내가 준비한 수가 하나 먹혀들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학생들이 싸우고 있는데, 교사로서 면목이 없네요.”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 속.
선량한 얼굴을 한 교사, 언령을 사용하는 정음(正音) 공청훤이 등장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