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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03화 (599/925)

82. 퍼스트 크리스마스 (14)

안다인은 줄곧 스코프 너머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진족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못 한 게 아니었다.

용제건 옆에 있는 붉은 머리의 사내와 담임 김신록의 모습이 겹쳐져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생김새나 이목구비는 달랐지만, 오른쪽 눈만 보이는 남성의 분위기나 표정이 전부 안다인이 아는 김신록이었다.

거의 확신한 상태에서 용제건이 상대를 ‘신록아’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말았다.

‘김신록 선생님의 본모습이었구나……!’

안다인은 어째서 김신록이 자신의 정체를 필사적으로 숨겼는지도 바로 깨달았다.

이 자리에 있는 진족들과 권속들은 전부 김신록을 노리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것을 막고, 공간술로 방어막을 친 용제건이 아니라 아무 저항도 못 하고 있는 김신록을 노리는 건 이상했다.

아니, 김신록이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냐, 선생님은 싸우려고 하셨어.’

김신록은 아이템 카드를 꺼내고, 이능파를 끌어올리려 시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시도는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 채 허무하게 끝났다.

‘김신록 선생님은 진족의 후예셨구나. 선생님과 피의 근원이 이어진 진족 앞이라 저항을 하지 못하는 거야.’

대체 어느 진족이 자신의 후예를 죽이려 드는 건가?

안다인은 의문과 함께 분노가 솟았다.

김신록이 왜 제자들로부터 거리를 두려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첫째가 정체를 숨기기 위함이고, 둘째는 자신을 죽이려는 진족으로부터 멀리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걸 다 알고 있었고, 김신록을 지키려 하는 용제건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지 않은가.

그때, 용제건이 말했다.

―신록이가 못 싸우는 거 보니까 저기에 있는 건 다 웅족인가 보다.

―말 좀 그만해.

웅족이라는 말에 안다인의 분노가 더 짙어졌다.

입학 실기 시험 때, 김신록이 재생 시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크게 다친 걸 떠올리면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쩌저적!

그 순간, 용제건의 공간술이 부수어졌다.

시안색 공간 사이로 피를 토하는 용제건을 보는 순간 안다인이 이능 총을 실체화해 저격할 준비를 했다.

‘……지원을 기다리긴 어렵겠어. 두 분의 활로를 뚫자. 내 이능파를 쏘면 선생님이 알아채 주실 거야!’

김신록이 안다인의 개입을 기꺼이 여기지는 않겠지만, 이대로 지켜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방아쇠를 당기려던 순간, 웅족이 다시금 안다인의 집중력을 흩트리는 말을 했다.

―먼저 호족의 후예부터 죽여라.

안다인은 자신이 입술의 움직임을 잘못 읽었나 의심했으나 이내 다시 생각했다.

‘호족의 후예라고? 김신록 선생님은 웅족의 후예잖아. 설마…… 양쪽 다 해당되나?’

안다인의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이 전부 맞춰졌다.

‘호족과 웅족은 반목하고 있다. 개천신화 시절부터 반목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라는 것은 한반도에 사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신화 때부터 이어진 호족과 웅족의 반목 사이에서 김신록이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적어도 웅족은 김신록을 살해하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는 게 분명했다.

‘김신록 선생님…… 대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저런 자들에게 시달려 오신 걸까……!’

안다인은 눈시울에 열이 몰리는 감각을 느꼈지만 입술을 깨물며 꾹 참았다.

안다인은 은광고에 들어와서 너무나도 즐거운 한 해를 보냈다.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건 저 다정한 담임 선생님 김신록의 덕이 컸다.

그런 선생님을 위해 싸우는 거라면 웅족 따위는 무섭지 않았다.

안다인은 광림과 파생 스킬을 동시에 발동시킬 준비를 했다.

‘……저게 뭐지?’

갑자기 스코프 너머가 붉은 안개로 뒤덮여 시야 확보가 되지 않았다.

그때, 아주 작게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인아.”

안다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휙 하고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 두 명이 서 있었다.

기척을 어떻게 죽인 건지 이만큼 가까이에 접근했는데도 전혀 알 수 없었다.

둘 중 한 명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저도 모르게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상대는 여전히 목소리를 낮춘 상태로 안다인에게 부탁했다.

“조금만 기다려 줘.”

*    *    *

학생회관, 1번 출구 주변.

현재 이곳의 전투는 일단락된 상태다.

어디에서 에너미가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상대이므로, 막 교대한 학생들이 주변을 경계하며 감시하는 중이다.

그래서 전투를 핑계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마침 저는 쉬고 있으라는 말을 들었거든요. 의신 학생도 쉴 때가 된 것 같으니 같이 얘기하면 좋겠어요.”

공청훤은 웃고 있었지만 거절할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았다.

대화를 미루려고 어떻게든 각을 잡고 있을 때, 다행히 공청훤이 옆에 있는 유상훈에게 말을 돌렸다.

“흠…….”

“상훈 학생도 의신 학생에게 할 말이 있나요?”

“아, 반장 얘기로 좀…….”

“다인 학생 말인가요?”

유상훈은 안다인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나?

공청훤에게 붙잡히느니 유상훈과 안다인 걱정을 하는 게 나을 것 같긴 했다.

그 대화에 말을 얹으며 끼어들려고 했으나 유상훈이 나보다 더 빨랐다.

“궁금한 게 있었는데…… 쟤가 수상한 걸 보니까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니, 대체 뭐가 어떻게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다.

모처럼 친구 도움으로 난관을 헤쳐 나가나 싶었으나 유상훈은 눈치 빠르게 발을 뺐다.

공청훤은 유상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웃었다.

“그렇군요, 그럼 먼저 실례할게요. 의신 학생, 들어가서 뭐 좀 마실까요? 이동 후에 계속 전투를 하느라 물 한 모금 못 마셨을 텐데.”

“저는 괜찮습니다.”

“사양하지 않으셔도 돼요. 학생회 측에서 식수 확보에 성공했다고 들었거든요.”

그렇게 나는 그대로 공청훤에게 이끌려 학생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회관 안에 들어가니 전투로 이능파와 체력을 소모하는 바람에 쉬는 중인 학생들이 보였다.

학생회에서는 임시 사령부로 쓰는 학생회실을 제외한 회의실 등의 시설을 모두 개방한 상태였으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로비에 모여 있었다.

다들 침낭, 담요 혹은 코트나 점퍼 등의 옷을 바닥에 깔고 앉거나 누워 있었다.

‘배정받은 회의실 안에 가면 소파가 있어서 더 편하게 쉴 수 있을 텐데. 파티션을 설치하면 개인 공간도 확보할 수 있고.’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쉬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여기에 있는 학생들 중에서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학생들은 없었다.

학생회관에는 행사용 자재들, 아이템 카드가 보관되어 있는데, 만일을 대비해서 현재 보유 중인 물품을 활용해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필요한 도구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거나 의견을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에너미의 종류와 공략법에 대해 토론하는 학생들이 제일 많았다.

‘다들 이렇게 열심이었으니까 플마고에서도 학생회관 안에서 며칠간 농성이 가능했지.’

플마고의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 속칭 ‘콘크리트 붕괴’ 사건에서도 초반의 학생들은 이랬다.

그 삿된 눈이 내리는 상황에서도 학생들은 전부 열심히 싸웠다.

시간의 흐름이 다른 은광고 안에 갇힌 학생들이 점점 지치고 희망을 잃고 죽어 가는 모습에 콘크리트 유저층의 멘탈도 갈려 버렸지만.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달랐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눈앞에 있는 공청훤이었다.

“저를 안내해 주신 적호라는 분과 의신 학생은 아는 사이신가요? 그야 당연히 아시겠지만요.”

비어 있는 회의실 안, 공청훤이 미지근한 물을 건네며 말했다.

커피나 차도 있었으나 다른 학생들의 몫을 남길 겸 물을 마시기로 했다.

‘제일 먼저 묻는 건 적호에 관해서구나.’

공청훤을 데리고 온 게 적호니까 그에 관해 이야기하면 운을 떼기 쉬울 거다.

적호와 내가 세운 수의 연관성에 관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그분이 저를 안내할 때 사용한 힘은 보통 이능이 아니었어요. 이 상황에는 아주 유효한 힘으로도 보였죠. 하지만 그분은 더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았어요.”

공청훤은 걱정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적호가 대체 누구고 무슨 짓을 한 건지 궁금해하기보다는, 공청훤은 그가 염려되는 것 같았다.

“적호가 걱정되나요?”

“네, 그분과는 보육원에 자주 봉사 활동을 오시는 분들께서 소개해 주셔서 오늘 처음 대화를 나눴는데, 저한테 말을 걸 때부터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어요.”

공청훤은 신인으로서의 기억이 없는데도 호족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한이는 아무것도 못 느끼는 것 같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공청훤은 이동하는 내내 적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않고 여기로 와 주신 건가요?”

“이상하게 별 이유 없이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분들이 있더라고요. 황지호 학생 때에도 그랬죠. 그 아이는…… 적호처럼 위태로워 보이기보다는 그냥 미안한 감정이 크다고 해야 하나.”

황지호의 이름까지 나오다니.

공청훤은 신인 시절에 호랑이들에게 느꼈던 감상을 아직도 갖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심했어요.”

“……네?”

공청훤은 회상에 잠긴 듯한 얼굴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의신 학생이 수상해 보이니, 적호도 괜찮을 것 같아요.”

공청훤이 마치 유상훈 같은 소리를 했다.

*    *    *

“적호 님!”

우둑, 두두둑.

창애에 붙잡힌 적호의 발에서 뼈가 부수어지는 소리가 났다.

적연이 풀린 순간, 마치 적연에 반응한 것처럼 호랑이 덫으로 유명한 물푸레나무 창애가 나타나 그 발을 붙들었다.

보통 나무로 만든 덫으로는 전설계 호족의 신체를 꿰뚫을 수가 없는데, 호랑이 창애는 적호의 뼈와 살을 꿰뚫었다.

적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나 몸의 중심이 무너지려 했고, 이를 지켜보는 김신록은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것 같았다.

“적호, 네가 아들 주변에 있을 거라곤 예상했다. 그때와 달리 용제건은 그 번거로운 붉은 안개 밖에 있지만.”

“…….”

“그자는 너를 죽여 두라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네 아내가 몸을 담은 진웅팔선의 일각이니까 그자가 모르는 것도 안다.”

아내와 진웅팔선이라는 말에 적호로부터 핏빛의 이능파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덫에 붙잡힌 적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적호는 움직이는 대신 입을 놀렸다.

“미치거나 잠든 곰 새끼 집단이 뭐가 잘났다고 헛소리를 하는 거냐. 실성한 건 두 놈이라고 들었는데 너를 포함해 세 놈인가 보군.”

“옛날보다 말을 곱게 쓰는군. 사랑의 힘이 참 위대해.”

번민의 곰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적호의 말이 조금도 곱게 들리지 않은 이들도 몇몇 있었으나 의문을 제기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부부가 서로를 이렇게 애틋하게 여기는 중인데 떨어져 있어야 하다니, 참으로 괴로운 일이야. 안 그래?”

진웅팔선 중 둘이 실성하고 셋이 긴 잠에 빠졌다고 알고 있었는데, 실성한 건 둘이 아니라 셋인 게 틀림없었다.

적호는 번민의 곰이 완전히 실성하여 미쳤다고 생각하고 욕이나 실컷 퍼붓기로 했다.

아들이 근처에 있다는 점을 참작하여 욕의 수위를 낮춰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적호, 네게 선택권을 주마. 그때처럼 웅족을 위해 움직여라.”

번민의 곰은 선장으로 김신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 하면 네 아들은 잃어도, 아내는 되찾을 수 있을 거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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