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04화 (600/925)

82. 퍼스트 크리스마스 (15)

은신 언령을 풀고 등장한 제갈재걸을 발견한 2학년 0반은 경악했다.

제갈재걸은 얼굴과 몸을 전부 가리는 인형 옷을 입고 있었지만, 2학년 0반 학생들은 이능파의 색, 걸음걸이, 제자로서 느낀 본능과 직감 등으로 저 안에 있는 인물이 제갈재걸이라고 확신했다.

제갈재걸이 입고 있는 건 보통 인형 옷이 아니라 산타 복장을 입은 동물 인형 옷이었다.

인형 탈은 따오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었는데, 이는 제갈재걸에게 가호를 내린 토트에서 따온 듯했다.

토트는 하늘에서는 따오기의 머리를, 땅에서는 개코원숭이의 머리를 한다고 알려져 있다.

벽화 속에서는 따오기 모습이 많이 나오므로 따오기를 데포르메한 디자인을 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아아아악!”

“크으윽!”

제갈재걸이 입은 인형 옷차림을 감상한 2학년 0반 학생들이 비명을 두 번 질렀다.

처음 비명을 지른 이유는 저 안에 제갈재걸이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잘 어울린다고 느껴져 감탄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두 번째 이유였다.

“아아악! 왜 우리는 아직 싸우는 중인 거야!”

“인형 옷을 입은 선생님이랑 놀래!”

“아씨, 에너미 또 왔어!”

“미친 진족아, 그만해라아악!”

그들이 두 번째로 비명을 지르는 이유는 모처럼 제갈재걸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인형 옷을 입고 있는데 놀 수 없기 때문이었다.

크리스마스에 이 난리가 난 것도 화가 나는데, 인형 옷 차림의 제갈재걸과 크리스마스를 만끽할 수 없다는 건 더욱 화가 났다.

마치 극도로 배고픈 상태에서 유리창 너머로 만찬이 차려진 걸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2학년 일행에 촉룡과 제갈재걸이 합류했다고 하나 여전히 그들은 진족의 미궁 속에 있었고,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전투 중에 한눈팔지 말렴!”

2학년 0반 학생들의 비명에 제갈재걸이 일갈했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왁왁거리며 소리를 지르던 2학년 0반 학생들이 다소 진정했다.

그러나 이들이 진정한 건 잠시뿐이었다.

따오기 인형 옷 속의 제갈재걸이 말을 거는 걸 보니 2학년 0반 학생들은 당연히 마음이 들떴다.

“아니…… 제갈 쌤이 이런 이벤트를 준비해 온 거야? 우리를 위해서 그런 거겠지? 선생님, 그런 거죠?”

“당연히 그렇겠지. 왜 뻔한 걸 물어서 선생님의 시간과 정신력을 낭비하게 해, 왕찬아.”

“말도 안 돼! 빨리 사진 찍고 놀아야 되는데 에너미랑 진족이 방해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린 싸움이나 해야 한다고? 이건 좀…… 온 우주가 우리를 억지로 깐다.”

방금 전까지 에너미와 진족이 자신들을 괴롭힌다면서 제갈재걸에게 일러바치던 이들이 이를 갈았다.

촉룡과 제갈재걸이 이라노우스의 사제를 붙잡고 있는 한, 2학년 0반 학생들은 안전하겠지만 제갈재걸은 제자들을 걱정해 서두르기로 했다.

제갈재걸은 이능파를 담아 허공에 글자를 새겨 언령을 발동시켰다.

파아앗!

남청색의 빛줄기가 이라노우스의 사제를 향해 쏟아졌다.

빛의 근원에는 제갈재걸이 정자체로 쓴 ‘속박’이라는 글씨가 있었다.

제갈재걸이 부여한 힘에 언령이 발동하여 사제를 붙잡기 위해 포승줄처럼 빛이 꼬이고, 뻗어 나가길 반복했다.

제갈재걸의 언령이 이라노우스의 사제를 속박하고, 삼키려 했다.

“크으……!”

우드득!

그러나 이라노우스의 사제 대신 언령에게 속박된 건 우산 쪽이었다.

우산에는 마족 사제의 피가 묻어 있었다.

속박당하기 직전, 피와 이능파로 미끼를 만들어 언령을 회피하는 데에 성공한 듯했다.

“언령이 무서워 대신 피를 뿌린 게냐? 네가 섬기고, 네 손에 들린 분노가 수치스러워하겠구나.”

촉룡이 그가 섬기는 마신과 그람의 이름이 둘 다 ‘분노’인 점에 착안해 비꼬듯이 말했다.

그러자 그람을 쥔 마족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신의 이름대로, 사제는 분노에 몸을 맡기는 것이 그들의 교리였다.

지금은 분노의 교리대로 움직이면 죽거나 사로잡힐 게 뻔했다.

그러나 마족은 그저 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

촉룡의 도발에 이라노우스의 사제가 그람을 휘두르려 했지만, 곧바로 제갈재걸의 견제가 들어왔다.

아직 전선은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었지만, 이대로 가면 이라노우스의 사제가 언령에 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라노우스의 사제는 부서진 우산과 한 마리의 용도 베지 못한 그람을 보며 굴욕감을 느꼈다.

로브를 깊게 내려 모멸감으로 가득한 얼굴을 숨긴 이라노우스의 사제가 갑자기 염준열을 향해 돌진했다.

사제의 한 손에는 그람이, 다른 한 손에는 이라노우스의 인장이 새겨진 검이 들려 있었다.

“준열아!”

촉룡이 부르는 소리에 염준열이 반응해 홍룡을 타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하늘로 날아간 홍룡이 이라노우스의 사제를 향해 불꽃을 뿜었다.

그에 대응해 사제가 그람을 휘둘렀다.

화르륵!

우우우웅!

사제가 그람으로 홍룡의 불꽃을 벨 때마다 불이 꺼지고, 다시 홍룡이 불을 뿜기를 반복했다.

그람이 있다고 하나 불꽃으로 견제당하는 상태에서 공중에 있는 염준열을 노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염준열은 이라노우스의 사제가 그람으로 불꽃이 아니라, 염준열 본인이나 촉룡을 노리지 못하도록 계속 화염을 퍼부었다.

이라노우스의 사제 주변이 말 그대로 불바다가 되어,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만약 사제가 그람을 놓치거나, 휘두르는 걸 그만둔다면 곧바로 화염에 휩싸일 것이다.

‘이대로라면 안전하겠지만, 그람이 있는 한 안심할 수 없어!’

그때, 이라노우스의 사제가 염준열을 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얼굴을 본 염준열이 의아해했다.

‘……웃고 있어?’

사제는 비웃듯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준열아! 홍룡을 잠시 멈추게 하렴!”

제갈재걸의 목소리에 염준열이 화염을 퍼붓는 걸 멈추었으나, 이라노우스의 사제가 움직이는 게 먼저였다.

사제는 염준열이 만든 화염 뒤에서, 이라노우스의 인장이 새겨진 검으로 미궁의 벽을 갈랐다.

쉬이익!

사제의 검에 홀로그램 같던 벽이 종이가 찢기듯이 둘로 나뉘었다.

제갈재걸이 언령 스킬을 발동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사제가 먼저 벽과 벽, 미궁의 틈 사이로 몸을 날렸다.

푸스스…….

사제가 통과하자 미궁의 벽이 다시 사라지고 일그러진 홀로그램 같은 벽만이 남았다.

홍룡이 남긴 화염이 완전히 사그라들었을 때에는 이미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뭐야, 쟤 미궁 밖으로 나간 거임?”

“아닌 거 같은데. 틈 사이를 보니까 학교 같지 않았어.”

“여긴 저자의 가든으로 설정된 거 같으니까…… 보스 룸으로 도망친 거 아니야?”

2학년 0반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이라노우스의 사제가 멀어지자 주변의 에너미는 빠르게 소탕되었으나 여전히 그들은 미궁 안에 있었다.

염준열은 홍룡의 불꽃이 남긴 그을린 흔적을 보다가 허망하고 당혹한 감정을 느꼈다.

‘……나를 이용해 탈출한 거구나!’

이라노우스의 사제는 염준열이 공격을 받으면 전방위를 불꽃으로 태우리라는 걸 알았을 거다.

그 불꽃은 그람을 쥐고 있는 이라노우스의 사제는 해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르다.

용왕신의 가호, ‘나의 불이 너를 태우는 일은 없으리라’는 불을 사용하는 본인에게만 해당된다.

즉, 염준열이 뿜은 불 탓에 다른 사람이 접근하거나 힘을 쓸 수 없었던 거다.

같이 싸울 때를 대비하여 그 가호는 잠시간 다른 사람에게 나눠 주는 게 가능하지만, 염준열은 거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염준열이 만든 화염이, 이라노우스의 사제가 도망가는 사이에 제갈재걸의 언령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준 셈이다.

촉룡이 용족의 후예인 염준열을 저지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면 염준열이 공격 수단을 잃어 위험해질 수 있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화염을 부르기 전에 가호를 나눠 드렸어야 했는데…….”

“준열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저자가 너를 공격하지 않는 대신 다른 학생을 인질로 잡았다면 일이 더 복잡해졌을 거다.”

촉룡이 염준열을 부드럽게 달랬으나 염준열의 기분은 바닥에 떨어졌다.

비록 촉룡이 그렇게 말했지만, 염준열은 자신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여기에 있는 2학년 학생들과 제갈재걸, 촉룡이 위험해졌다는 생각을 떨쳐 내지 못했다.

하지만 염준열을 제외한 전원이 아무도 그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야, 근데 도망갈 거면 밖으로 가지, 왜 안으로 간 거야?”

“그러게. 저놈한테 밖이 더 안전할 텐데. 아까 그 진족은 언령 스킬에 꼼짝도 못 했잖아.”

그사이에 2학년 0반의 고찰이 이어졌다.

염준열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던 촉룡이 말했다.

“함정을 준비했거나, 혹은 시간을 끌어 증원을 기다리려는 거겠지. 밖에는 저놈과 같은 뜻을 품은 무뢰배들이 있을 테니.”

그 말에 2학년 0반 학생들이 눈을 부릅떴다.

그들은 함정이나 증원이라는 말보다는 시간이라는 말에 분개했다.

“시간을…… 끈다고…….”

“저, 저 비겁한 놈! 당장 우리를 내보내라!”

“시간 끌지 말고 나와서 싸워라!”

“아니, 크리스마스이브에 뭐 하는 거냐고, 진짜!”

학생들 사이에 섞여서 씩씩거리던 금찬솔이 제갈재걸에게 물었다.

“선생님…… 지금 우리 사진 찍고 크리스마스 분위기 내면 안 되겠죠?”

그 말에 몇몇 2학년 0반 학생들이 기대에 찬 얼굴로 제갈재걸을 바라봤다.

마진승이 질린 얼굴로 0반 학생들을 봤지만, 저들은 몹시 진지했다.

물론, 금찬솔이 대표로 한 헛소리는 즉각 제갈재걸에 의해 반박되었다.

“안 된다. 여기가 어디인지 찬솔이도 잘 알고 있잖니. 에너미와 진족의 습격에 대비하렴.”

“하…… 그렇죠.”

금찬솔이 산타 복장을 한 따오기 인형 옷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금찬솔을 비롯한 2학년 0반 학생들은 지금 당장 저 멋진 옷을 입은 제갈재걸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고 싶어서 안달복달했다.

제갈재걸은 학생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부드럽게 말했다.

“여기는 미궁이니까 얼른 공략하면 된다. 걱정 말렴. 적이 보스 룸에서 버텨도, 증원을 불러도 내가 공략하마.”

제갈재걸이 하는 든든한 말에 2학년 0반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분위기는 침울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도 미궁 저편에서 에너미가 밀려들었다.

2학년 0반 학생들은 복잡한 미궁과 에너미들을 보며 아득한 얼굴을 했다.

그들은 속으로 에너미의 희귀도와 미궁의 복잡한 정도, 증원의 가능성 등을 계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빨리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금찬솔과 왕찬솔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쵸, 공략하면 되죠.”

“제갈 쌤은 항상 맞는 말만 하신다니까!”

갑자기 왜 저 악동들이 의욕에 찬 건지 알 수 없어 촉룡이 눈을 깜빡였다.

지금 대화의 흐름만 보면 2학년 0반 학생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2학년 0반 전원은 금찬솔과 왕찬솔의 뜻을 안 것처럼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계 시뮬레이터로 만들었든 아니든, 여긴 이계지.”

“그래, 공략하는 사람에 따라서 시간도 다른 법이고.”

금찬솔과 왕찬솔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미궁을 바라봤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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