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06화 (602/925)

82. 퍼스트 크리스마스 (17)

천신이 백호의 청에 응해 그에게 힘을 허락하자, 백호가 손에 든 웅렵조(熊獵爪)에서 순백의 이능파가 뿜어져 나왔다.

신화 속에서 최고의 무재로 꼽혔던 백호가 오로지 웅족만을 사냥하기 위해 들었던 검붉은 발톱, 웅렵조.

이는 웅족들에게 있어 굴욕과 공포 그리고 차마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동경의 상징이었다.

웅족과 그 권속들은 투박한 모양새의 웅렵조와 그 발톱이 머금은 빛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전율했다.

카아앙!

백호가 웅렵조를 한 번 휘두르자 결계가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흩어진 결계의 잔해가 광풍에 휩쓸려 간 후에야 웅족과 권속들이 홀린 듯이 바라보는 걸 멈추고 화들짝 놀랐다.

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대응하는 것보다 백호가 웅렵조를 휘두르는 게 먼저였다.

촤아아아악!

웅렵조가 할퀴고 간 자리가 검붉게 물들었다.

갑자기 일변한 땅과 풍경의 모습에 웅족들이 황망히 바람 속에 서 있었다.

구정물색의 이능파가 땅을 적신 걸 본 이들이 뒤늦게 상황 파악을 했다.

“서, 설마 단칼에 결계 앞에 배치된 권속들을……!”

양날칼을 든 여성 웅족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날붙이 무기를 들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너무나도 격이 달랐다.

진웅팔선 중 일각, 번민의 곰을 따르는 최측근으로서 나름의 실력을 붙여 백호와의 격차를 좁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따라잡기는커녕, 여태까지 그녀가 백호의 경지를 조금도 가늠하지 못했을 뿐인 게 판명되었다.

땅에서 하늘을 올려다본다고 어찌 하늘의 높이를 알 수 있겠는가.

저 웅렵조는 웅족을 도륙하고, 분쇄하고, 파괴하는 데에 특화된 무기다.

그러나 백호가 아닌 다른 이가 웅렵조를 휘둘렀다면 이 정도로 허무하고 처참하게 결계와 권속들이 무너지지는 않았으리라.

웅족들이 전의를 상실한 순간에도 백호는 앞을 가로막는 권속들을 찢어 버리고 있었다.

쾅!

번민의 곰이 선장으로 바닥을 크게 내리쳤다.

“정신 차려라. 호족 앞에서 추태를 보일 셈이냐.”

번민의 곰의 말에도 수하들은 좀처럼 사기를 되찾지 못했다.

번민의 곰은 한심한 것을 보듯 혀를 찬 후, 선장을 들어 바람 너머에 있는 적호와 김신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적호는 호랑이 창애에 걸려 있고, 호족의 후예가 손안에 있다. 백호가 제 친우와 그 아들을 못 본 척할 것 같나? 인질을 잡아!”

촤아아아악!

그 말에 백호가 순백의 이능파를 발산하며 한층 더 무겁게 웅렵조를 휘둘렀다.

웅렵조가 찢어발긴 권속은 최후의 단말마도 남기지 못한 채로 빛의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바람 속에서 번민의 곰을 응시하는 백호의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네 말대로다. 나는 내 친우와 그 아들을 못 본 척하지 않는다. 하나 그런 짓을 하려면 서두르는 게 좋겠군.”

쿠구구구…….

백호가 든 웅렵조가 그의 진노에 반응하여 묵직한 이능파를 발산했다.

웅렵조의 검붉은 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한 빛의 이능파에, 번민의 곰조차도 숨을 골라야 했다.

“웅렵조가 네놈을 찢어발기는 게 빠를까, 네가 저 둘을 손아귀에 넣는 게 빠를까.”

콰아아아아!

백호가 강풍 사이로 돌진하며 웅렵조를 휘둘렀다.

웅렵조가 노리는 것은 단 하나.

친우와 그 아들을 두고 망발을 뱉은 번민의 곰이었다.

“물러나십시오!”

“서두르셔야 합니다!”

촤아악!

백호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웅족들이 필사적으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들은 백호가 등장한 이상, 그들에게 승산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남은 길이라고는 적호 부자를 인질로 삼아 백호를 굴복시키는 것밖에 없었다.

“제가 먼저 손을 쓰겠습니다!”

‘호랑이 창애’를 설치한 수하가 주술을 써 적호를 붙잡은 물푸레나무 덫을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주술사 웅족이 이능파를 쏘아 보내도 덫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대체 왜…… 설마 이 이능파가 실린 바람 때문인가!’

광풍은 백호가 등장한 순간부터 끊임없이 불고 있었다.

바람이 웅족의 움직임을 막고, 이능파의 작용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 미친 듯이 부는 광풍은 백호의 돌진과 검격만은 방해하지 않았다.

웅족 주술사가 바람 사이로 이능파를 쏘지 못하고 한참을 헤매다 어찌저찌 바람 사이로 이능파를 보내려 했을 때였다.

툭.

“됐…… 아, 아아아악!”

주술을 사용하기 위해 술식을 맺던 손이 바닥을 굴렀다.

격통에 비명을 지른 순간 시야가 기울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한 건 주술사의 무릎이 웅렵조에 찢겼다는 걸 알았을 때였다.

주술사가 바닥을 구르면서 비명을 질렀다.

“커, 커헉, 팔이, 다리가……!”

“어서, 어서 저 후예와 그 아비를, 으…… 으아아아!”

그러나 웅족들은 백호를 조금도 막지 못했다.

백호가 웅렵조를 휘두를 때마다 팔이 날아가 무기를 놓치고, 다리가 잘려 도망가지 못하고, 목이 그어져 주문을 외우지 못하게 되었다.

웅렵조가 스치고 간 자리는 권속이 있던 잔해와 쓰러진 웅족이 남았다.

광풍 사이를 전진해 나가다가 한순간 뒤를 돌아본 번민의 곰은 섬뜩한 사실을 눈치채었다.

‘……숨을 끊은 건 권속뿐이다. 웅족들은 전원 살아 있어!’

백호는 웅족의 숨통을 끊지 않고 착실히 전투 불능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단순한 학살보다 더욱 섬뜩하게 보였다.

‘죽이지 않는 걸 보니 붙잡아서 정보를 캐낼 생각인가 보군!’

지금 이 시간에 백호가 은광고에 있다는 건, 오랜 시간 방황하던 백호가 다시 황호와 손을 잡았으며 웅족의 습격을 대비하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그렇다면 백호에게 목숨을 빼앗기는 자비를 기대하긴 어려울 거다.

황호는 은광고에 습격을 감행한 웅족들을 편히 죽이지 않을 거고, 유효한 정보를 뱉을 때까지 숨을 붙여 둘 거다.

여기에서 무너지면 호족에게 붙잡혀 지하 깊은 곳에 끌려가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꼴을 당하리라.

번민의 곰은 선장으로 잔상을 만들어 시선을 분산시키며, 적호와 김신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백호가 등장할 때부터 불던 바람이 번민의 곰이 움직이는 것을 계속 방해했다.

‘바람이 방해되는군. 이것도 호족의 수작인가!’

서걱!

파아아……!

번민의 곰이 남긴 잔상이 하나 웅렵조에 베어졌다.

잔상에 남긴 디버프 효과가 백호의 발목을 잡아 주리라 믿었으나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치 부정한 것을 정화하는 것처럼, 구정물색의 이능파가 백호에게 닿기 전에 바람에 씻겨 투명하게 변해 사라지고 말았다.

‘인질을 잡으면 저 바람의 근원부터 없애게 해야겠군.’

번민의 곰은 이를 갈며 화풀이로 적호의 팔다리 중 하나를 날려 버리고, 바람을 만들어 낸 술사도 죽여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와중에 번민의 곰이 만든 잔상이 다시 한번 베어졌다.

잔상은 하나씩, 하나씩 웅렵조에게 찢기고, 부수어지고, 지워졌다.

이윽고 번민의 곰이 남긴 잔상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번민의 곰도 거의 목표 지점에 도달한 상태였다.

‘다 왔다……! 먼저 아들 쪽을 잡아야 적호도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

빛의 입자가 실린 바람 때문에 시야가 막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희미하게 시안색 공간이 보였다.

금이 가 틈이 생긴 용제건의 공간도, 그 너머에 있는 붉은 머리의 청년도 시야에 들어왔다.

“……!”

김신록은 번민의 곰이 접근한 걸 알아챈 것 같았다.

적호와 쏙 닮은 얼굴이 시허옇게 질린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김신록은 도망가는 대신 용제건을 감싸듯 앞에 나섰다.

그 모습에 번민의 곰이 내심 안도했다.

“다행이군. 용왕신의 총아를 방패로 삼았다면 귀찮아졌을 텐데.”

이제 공간술도 사용하지 못할 만큼 지쳤다고 하나 여의보주의 육신은 보통 몸이 아니다.

용왕신이 제일 아끼는 여의보주의 화신이니, 어지간한 이계 금속보다는 단단하고 내구력이 좋다.

또한 수많은 기적을 일으켜 왔기에, 그 육신의 일부를 사용하면 강력한 이능을 발현시키는 데에 쓸 수 있을 정도다.

‘그자’가 지시하기 전에 용왕신의 무녀들이 자처해서 여의보주의 시신을 회수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흐린 하늘 뒤에서 오색채운을 부리며 호시탐탐 여의보주를 노리고 있을 무녀들을 생각하며 번민의 곰이 김신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김신록은 용제건을 데리고 뒷걸음질 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때, 번민의 곰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서걱!

콰아아아아!

백호가 날린 웅렵조의 검기가 땅을 부수며 번민의 곰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눈치채는 게 빨랐기에 번민의 곰은 급히 몸을 날려 검기를 피하는 데에 성공했다.

다행히 백호가 김신록에게 검기가 닿지 않을 정도로 이능파를 억제했기에 그 여파가 크지 않았다.

아직 김신록은 번민의 곰 코앞에 있었다.

번민의 곰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김신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 이제 인질이 내 손에……!”

탕! 탕탕탕!

그러나 번민의 곰이 뻗은 손에 총탄이 쏟아졌다.

급히 손을 물렸으나 총탄이 스친 건지 손가락과 손등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웅족의 피부를 이렇게 만들다니, 보통 총탄이 아니었다.

게다가 번민의 곰은 저격수의 기척도, 이능파가 실린 총탄이 쏘아지는 것도 감지하지 못했었다.

‘저격이라고? 호족 중에서 총을 쓰는 자가 있었나!’

어쩐지 김신록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저 저격수는 호족의 후예도 몰랐던 존재인 것 같았다.

공격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파지지지직!

“……!”

붉은 번개가 번민의 곰이 쥐고 있던 선장을 꿰뚫었다.

번민의 곰이 급히 이능파를 발산해 선장과 몸을 보호했지만, 이미 번개가 손바닥을 태운 이후였다.

“내 아들과 나를 뭐 어떻게 한다고?”

붉은 번개를 쏜 건 적호였다.

적호가 호랑이 창애에서 풀려나 있었다.

호랑이 창애는 본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완파되어 있었다.

‘그럼, 아까 백호가 날린 일격은 나를 노린 게 아니라…….’

백호는 적호를 묶은 호랑이 창애를 부수고, 겸사겸사 번민의 곰을 노린 듯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호랑이 창애에 풀려났더라도 저 정도의 번개를 뿜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적호가 지나치게 멀쩡했다.

적호는 회복 아이템도 듣지 않는 몸인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인질로 삼을 생각이래, 적호 씨.”

그때, 누군가가 적호의 말에 대답했다.

“똑같이 갚아 주고 싶은데, 쟤들은 인질로서 가치는 없잖아? 신록이 고문 소재나 늘려 줘야겠다.”

우우우웅…….

시안색의 이능파가 선명하게 빛났다.

은광고를 삿된 눈으로부터 지킨 옥색의 빛이, 이 주변에서도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용제건은 김신록에게 지지받고 있던 몸을 일으켜 그 앞에 섰다.

딱! 파아앗! 파앗! 파아아……

용제건이 손가락을 튀기자 수십 개의 공간이 생겨 김신록 주변을 감싸고, 번민의 곰을 포획하듯 둘러쌌다.

시안색 공간에 감도는 이능파가 뿜는 스파크에 피부가 따끔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용제건이 일어서자 광풍이 잠잠해졌다.

바람은 마지막으로 용제건의 몸에 빛의 입자를 뿌린 후, 허공으로 흩어졌다.

‘저 바람은 단순히 견제와 공격용이 아니라, 회복 효과도 있었나!’

번민의 곰은 뒤늦게 깨닫고 경악했다.

용제건은 허공으로 1m가량 떠올라 번민의 곰을 내려보며, 그가 했던 말을 되돌려 줬다.

“이젠 내가 신록이의 방패가 될 텐데, 귀찮게 되겠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0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