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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09화 (605/925)

83. 학교 밖 (3)

천은하의 모습을 한 은호를 본 이들이 경악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전원 천은하의 존재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천은하가 막 발견되었을 때 친자 확인을 수십 번 해 대고, 사내 정치에 어떻게 써먹을지 궁리하며 득달같이 달려들긴 했다.

그러나 천은하는 감금 증후군에 걸려 있었고, 일어날 기미도 없었다.

이용할 가치가 낮다고 판단한 후에는 신경을 껐다.

천동하가 천은하를 돌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호재라고 생각했다.

천동하의 신경을 분산시켜야 뒤에서 움직이기 편했으니까.

천동하는 우수한 데다가 혈통도 좋고, 공명정대했기에 그의 주변에서 일을 벌이기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몸이 회복되어 은광고 입학시험을 치렀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천은하가 감금 증후군에서 회복되었다는 건 전해 들었으나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 있던 탓에 거동이 어렵다고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천동하가 근무하던 연구소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는 상태라 들었다.

자신을 오래 돌본 천동하에게 감화된 건지 은광고 입학시험을 치른 듯했으나 보나 마나 떨어질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한국 최고의 명문고, 은광고의 입학시험은 결코 만만치 않다.

예전에 최편득 같은 부패 교사가 있을 때에는 입학 전형의 허점을 찔러 부정 입학 할 방법을 찾았겠으나 지금은 다르다.

오랜 시간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신체적으로 기능이 떨어진 상태인 사생아가 붙을 만한 학교가 아니었다.

시험을 치르는 것 자체는 본인의 자유이니 무시했지만, 어쨌든 천은하의 존재는 윗선의 안중에도 없었다.

자리에 대동한 이사진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천동하의 동생이라고? 동하한테 동생이…… 아.”

“우, 우리가 요청한 상대는 천동하다! 자네를 부른 게 아닐세!”

웅성거림이 커지자 잠시 넋을 놓았던 사내도 정신을 차렸다.

그럴싸한 자리를 꿰찬 후 갑질하고, 윽박지르고, 상대를 겁박하는 데에 도가 튼 그가 어린 애 하나 상대하지 못하면 체면이 안 섰다.

“지금 뭐 하자는 건가?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온 거냐.”

사내는 목에 힘을 주면서 발언했다.

얼굴에서도 위세가 느껴지도록 안면 근육을 경직시켰다.

사내는 목소리에 힘을 주면서 발언했다.

“사생아 주제에 천 사장님을 들먹여? 어른 앞에서 못 배운 티를 그리 내면 쓰겠느냐. 당장 동하를 데려와라!”

보통 이렇게 모욕과 겁을 주면 기가 약한 상대는 당황하거나, 분노하거나, 울거나, 겨우 참거나 넷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은호는 상대가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입을 다문 타이밍을 노려 웃으면서 모든 말을 부드럽게 받아쳤다.

“비록 사생아지만 제가 천 사장님 친아들이라서 언급할 수밖에 없으니 양해 부탁드려요.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배움이 부족하지만, 어른들과 교류를 가질 기회가 생기면 가르침을 구할 예정이니 심려치 않으셔도 돼요.”

은호의 조곤조곤한 말은 저도 모르게 화가 풀릴 만큼 따사로웠지만 속뜻은 그렇지 않았다.

저 말을 해석해 보면 사생아를 낳은 건 결국 작고한 천 사장 책임이고, 너희들은 가르침을 구할 만한 어른이 아니니까 신경 끄라는 소리였으니까.

그러나 은호의 미소나 말투에는 적의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그저 다정하고 붙임성 있게만 들렸다.

은호가 보통내기가 아니란 걸 눈치챈 건 이번 일을 꾸민 사내밖에 없는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잡힌 일정이라 동하 형이 대응하기 어려워 보이셨어요. 그래서 제가 대신하여 출석하겠다고 제안했죠.”

은호의 말이 이어질수록 어쩐지 잔잔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은호의 진심 어린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절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 같았다.

천동하를 대신해 어려운 자리에 출석한 은호가 기특하게 느껴지고, 그가 처한 상황에 동정심이 솟구쳤다.

이사진 중에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짧은 시간에 감화되는 사람들을 보며 사내가 경악했다.

‘안 돼, 이번 자리는 윗선에서 특별히 지시한 거다. 이대로 넘길 순 없어……!’

여기에 있는 자들 중 예의 그 윗선과 접촉하는 건 사내 한 사람뿐.

이번 회동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대부분 ‘천금하’가 될지도 모르는 두 번째 사생아의 진위 쪽에 주목하고 있기에, 진짜 목적이 천동하의 발목 잡기라는 걸 몰랐다.

제 뜻을 밝힐 수 없어 사내는 답답한 마음이었다.

한편, 은호는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한 사람, 한 사람의 반응을 살피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은호는 이중 흑막과 관계된 자를 찾고 있었다.

‘저자가 흑막의 지시를 듣고 움직인 자로군.’

은호의 시선이 방금 큰소리를 낸 사내를 스쳐 지나갔다.

은호의 시선은 무심하게 흘러갔으나 그는 머릿속으로 사내의 얼굴과 반응, 했던 말들을 끊임 없이 되새기고 있었다.

‘생각보다 쉽게 찾았네.’

이번에 은호가 이 자리에 온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천동하의 눈을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둘째는 천씨 일가 중 흑막과 연결된 인물을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조의신과 은호는 천씨 일가족 전원이 흑막과 이어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흑막의 부하가 없다고 하기에는 어두운 구석이 많았다.

그러나 전원 흑막의 관계자라고 치부하기엔 이상한 점이 많았다.

그 위화감의 중심에는 천동하가 있었다.

이를 두고 조의신은 이렇게 말했다.

―천동하 선배님의 눈은 흑막에게 상당히 성가신 존재야. 천씨 집안을 완전히 장악했다면 좀 더 강압적이고 확실한 방법으로 선배님을 은광고에서 떼어 놨겠지. 그런데 이런 허술한 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는 게 이상해.

물론 흑막이 진족을 동원해 천동하를 습격하고 사전에 처리하는 방법도 있었을 거다.

그러나 천동하의 동선은 은광고, 황명 연구소, 천씨 집안의 본가로 상당히 짧고 단순했다.

거의 은광구 안에서만 있으니 습격이 여의치 않고, 보통 플레이어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데다 천동하 본인도 높은 수준의 플레이어다.

공연히 처리한답시고 은광구에서 날뛰면 호족의 주의를 끌 게 뻔하니 수를 가려서 둘 수밖에 없었던 거다.

만약 천씨 집안을 완전히 장악했다면 집안 내에서 일을 벌인다는 등의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닌 듯했다.

―전원 관계자였다면 진작에 천동하 선배을 회유했거나, 축출했겠지만 아직은 무사해. 완전히 그 집안을 장악하지 못한 거야. 이미 흑막에 가담한 사람도 있겠지만.

조의신의 말대로였다.

은호의 말재주에 분위기가 쉽게 이쪽으로 넘어온 걸 보니, 흑막이 심은 사람은 많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사전 고지도 없이 멋대로 인선을 바꾸는 건 경우가 없다. 위에서 정한 일을 멋대로 둘이 바꾸다니, 천씨 집안을 우습게 보는구나!”

흑막과 이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사내는 만만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천은하가 천동하를 불러오지 않으면, 두 사람을 천씨 집안의 적으로 몰아갈 기세였다.

그러나 은호는 미소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로 답변했다.

“제가 속한 곳은 천씨 문중뿐이지만, 이번 일은 문중 회의에서 결정된 게 아니라고 들었어요. 동하 형이 천씨 문중 외에 적을 두고 있는 곳은 은광고와 황명 연구소고요.”

그 대답에 사내의 말문이 막혔다.

사내는 ‘위에서 정한 일’이라며 권위를 내세울 생각이었으나, 공식적으로 천동하와 천은하는 그들의 아래에 있지 않았다.

이들이 내세울 거라곤 나이밖에 없는 셈이었다.

사실 여기에 있는 이들의 나이를 전부 합쳐도 은호의 진짜 나이에 미치지 못해 사실상 위아래가 없었다.

은호의 말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어제 발송한 메일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오늘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답신을 하셨죠. 그래서 직접 뵈러 왔어요.”

“……!”

사내는 어제 비서로부터 그 메일을 전달받았다.

확인은 했는데, 첫 페이지부터 유전자 검사 과정 간소화에 관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

그 외에도 비약적으로 회동 시간을 줄일 제안이 줄줄 나와 있어, 사내는 메일을 읽다 말고 대충 얼버무리며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답변을 했다.

시간을 끌기 위한 수작이었는데, 덫에 걸린 건 사내 쪽이었다.

사내가 할 말을 잃은 사이, 은호는 중앙 홀에 있는 사람들과 하나둘씩 말을 트고 있었다.

“오늘 자리에는 제 친자 확인 과정에도 입회해 주신 분들이 많네요. 꼭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은호와 대화를 이어 갈수록 사람들의 표정에 웃음이 어렸다.

붙임성 있으면서도 조리 있는 은호의 말에 하나둘 빠져 갔다.

은호가 꺼낸 은으로 된 명함집에 명함이 계속 쌓여 갔다.

사내가 상정했던 것과 전혀 다른 상황에 초조해졌다.

‘이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사내는 그 윗선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제 입장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사내는 조금이라도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힘으로라도 저놈을 붙잡아서, 천동하에게 이곳으로 오도록 협박을 하는 게 낫나……!’

상대는 감금 증후군에서 막 일어난 예비 고등학생이다.

체구도 자신에 비해 작고, 이능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내도 일단은 플레이어였다.

그리고 천동하는 동생이 일어날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지켜볼 만큼 그를 아꼈다.

사내는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은호가 더 주변의 이목을 끌기 전에 중앙 홀 밖으로 불러내 일을 도모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스노우 앤 에어 측에 협조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내가 그렇게 판단하고 은호의 어깨를 잡으려 할 때였다.

타악!

그러나 사내의 손이 은호에게 닿기 전에, 그의 그림자에서 정장에 푸른색 넥타이를 착용한 남자와 여자가 한 명씩 나타나 그 앞을 가로막았다.

남녀는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었는데, 이능파 같은 걸 날려 사내의 손을 쳐낸 것 같았다.

주변에서 아무도 그 이능파를 느끼지 못하고, 남녀가 사내의 손을 직접 쳐 낸 것도 아니라 뭐라 트집을 잡지도 못했다.

갑자기 나타난 남녀 둘을 보고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이분들은 대체……?”

“형이 걱정하셔서 붙여 주신 분들이에요. 오늘은 친구분이랑 넷이서 보육원 봉사 활동을 하실 예정이었는데, 특별히 제 쪽으로 와 주셨어요.”

남녀는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사내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저 남녀는 상당한 수준의 플레이어인데, 다들 그저 평범한 경호원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오늘 가짜 사생아 역할을 맡은 중학생은 남녀의 몸놀림을 보고 감탄사를 짧게 내뱉었다.

“와…….”

저들의 역량을 가늠한 건 저 중학생과 사내, 둘밖에 없는 듯했다.

형이 붙여 줬다는 남녀의 등장으로 자연스럽게 화제는 그 형 쪽으로 흘러갔다.

자랑스럽게 형 얘기를 하는 은호를 보며 사람들이 ‘천동하를 아주 잘 따르는구나.’, ‘형제가 보기 좋다.’라며 칭찬했다.

“제 형은 체스를 잘 두세요. 두는 수에는 빈틈이 없지요.”

은호는 이 말을 하며 사내 쪽을 한 번 흘끗 바라봤다.

마치 방금 사내가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아는 것처럼.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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