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학교 밖 (4)
2학년 구역과 중앙 구역 사이, 이라노우스의 사제가 이계 시뮬레이터로 구현한 미궁.
마족이 보스 룸으로 도망친 후, 2학년 0반이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미리 약속한 것처럼 네 방향으로 흩어지더니 바닥에 무언가를 그렸다.
“원 그리기 힘들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도 도구를 들고 다닐걸.”
“야! 똑바로 그어! 안 그러면 집중력 흐트러질 때 이능파 유지하기 힘들어.”
2학년 0반 학생들은 곳곳에서 구시렁구시렁거리면서도 바닥에 열심히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제갈재걸과 염준열, 마진승은 갑작스러운 학생들의 기행을 이상하게 여기긴 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비록 이 비상시에 저러는 건 좀 그렇긴 해도 저들이 이상했던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2학년 0반 학생들의 의도를 파악한 건 제갈재걸이었다.
“설마, 그걸 할 생각이니……?”
“넵!”
“역시 제갈 쌤! 바로 저희의 마음을 알아주시네요!”
“선생님!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혼자 중심에 서서 이것저것 지시 중이던 금찬솔이 우렁차게 대답하고, 다른 학생들도 추임새를 넣었다.
제갈재걸은 학생들을 말리려 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내가 금방 공략하고 올 테니 기다리렴.”
“무슨 소리예욧!”
“공략을 하더라도 같이 갈 건데요?”
제갈재걸이 촉룡과 염준열, 마진승을 응시했다.
고민이 많아 보였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시 생각하렴. 물론,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믿을 수 있어. 하지만 비밀이란 건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악의가 없어도 언젠가 새어 나가기 마련이란다. 너희가 위험해지는 걸 원치 않는다.”
제갈재걸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말에 학생들이 우뚝 굳었다.
순간 이들의 마음이 흔들릴 뻔했으나, 제갈재걸이 입은 따오기 인형 옷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따오기 차림의 제갈재걸이 저런 부탁을 하니 들어주고 싶지만, 저 모습을 한 제갈재걸과 빨리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더 커졌다.
2학년 0반 학생들은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눈길을 주고받았다.
시선이 쏟아진 건 지금까지 몇 번이나 눈물 연극과 신파성 짙은 대사로 제갈재걸의 마음을 꺾었던 연극부 에이스, 연가람이었다.
제갈재걸을 설득하기 위한 대표가 정해지자, 연가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따오기 인형 옷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지금 은광고는 미증유의 위기 상태에 빠져 있어요. 저희야 제갈재걸 선생님과 있어 안전하다지만, 다른 곳은 과연 어떨까요?”
“……!”
제갈재걸이 순간 주춤했다.
은광고 전체가 위험에 처한 건 제갈재걸도 당연히 알고 있을 거다.
제갈재걸은 다른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떠오른 건지 몹시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연가람은 추가타를 날렸다.
“미궁에 빠지기 직전에 같이 이동 중이던 다른 반 아이들은 아직 마주치지 못했어요. 운 좋게 미궁 밖에 있을 수도 있지만, 이곳에 있다면 어떨까요? 그 정체불명의 마족에게 험한 일을 당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해요.”
그 마족이 노리는 건 염준열이었으니, 굳이 먼 곳에 있는 다른 학생들을 상대하며 힘을 뺄 가능성은 적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0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제갈재걸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미궁이 복잡하다고 하지만, 제갈재걸 선생님이라면 분명 이 난관을 헤쳐 내고 클리어하시겠죠. 하지만 그사이에 시간은 흐를 거고, 희생자가 발생할지도 몰라요.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시키는 게 안전할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너희가…….”
“저희는 괜찮아요.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선생님이 지켜 주실 거라고 믿어요.”
만약 비밀이 널리 퍼진다 해도 2학년 0반이 누군가에게 쉽게 당할 리가 없었다.
이들은 문제아로 취급받으면서도 은광고에 재적을 허락받을 만큼 플레이어로서 우수한 데다가, 금찬솔과 왕찬솔 두 반장과 부반장은 자금력과 인맥도 출중했다.
오히려 2학년 0반 학생들은 협회의 요청으로 숨기고 있는 비밀이 드러나면, 제갈재걸에게 보호받는다는 구실로 같이 있을 시간이 늘지 않을까 해서 몰래 퍼뜨리는 것도 고려해 볼 정도였다.
제갈재걸은 그런 마음은 알지 못하고 그저 위험을 감수하려는 제자들의 마음가짐에 감동했다.
“너희가 그 정도로 각오를 굳혔는데, 내가 아직 생각이 부족했구나. 미안하다.”
“아니에요, 제갈재걸 선생님은 저희를 걱정해서 그러신 것뿐이잖아요.”
연가람이 싱긋 웃으며 답하자 제갈재걸의 사각에서 2학년 0반 학생들이 소리 없이 축하의 세리머니를 했다.
제갈재걸은 이를 보지 못한 채로 등을 돌려 염준열과 마진승, 촉룡을 보았다.
2학년 0반 소속이 아닌 외부자 셋은 에너미를 경계하면서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부터 우리 반 학생들은 아직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어떤 행위를 할 겁니다. 부디 비밀을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대중에게 공개가 안 된 스킬이나 광림이야? 학생 전원이 사용하는 걸 보니 스킬인가 보네.”
“엄밀히 따지면 스킬은 아닙니다.”
제갈재걸이 촉룡의 질문에 답하는 사이, 2학년 0반 학생들의 준비가 끝났다.
2학년 0반 학생들이 바닥에 새긴 건 술식이라기보다는, 정밀한 구조의 기계 설계도 같아 보였다.
“반 아이들은 ‘이계 지배’를 시도할 겁니다.”
“……이계 지배라고! 말도 안 돼, 이계 지배가 무엇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야?
촉룡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계의 틈을 제어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흔히 이계 공략 하면 떠올리는 방법으로, 공격대가 이계의 보스 룸까지 침입하여 보스 에너미를 쓰러뜨리는 것.
둘째는 ‘이계 지배’로, 이계 자체에 이능파로 간섭해 이계와 그 소속 에너미들을 복종시키는 것.
두 번째 방법으로 지배된 이계를 보통 가든이라고 불렀다.
“하물며 여기는 이미 다른 진족에 의해 지배된 가든이야! 지배권을 뺏어 오려면 그 사제의 이능파 총량의 몇 배 이상을 압도하는 이능파로 이계에 간섭해야 하겠지.”
촉룡의 말에 염준열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예전에 용족이 소유한 가든을 두고 누가 지배권을 가져갈지 다툰 적이 있는데, 제일 먼저 지배한 용족으로부터 지배권을 빼앗기가 매우 곤란했다.
예시를 들자면, 비어 있는 찻잔에 채우는 것보다 이미 꽉 찬 찻잔에 새 찻물로 교체하는 과정이 복잡한 것과 같았다.
찻잔을 비우고, 물로 씻고, 차수건으로 닦아 내고, 찻물을 부어야 한다.
그만큼 타자의 가든을 빼앗아 오는 과정은 어렵고 힘들고 복잡했다.
“내가 본신으로 돌아가 모든 이능파를 쏟아부어 간섭해도 어려울 거다. 설령 이계 지배에 성공해도 가든을 유지시키는 건…….”
파아아아앗!
그 순간, 2학년 0반이 바닥에 새긴 문양이 빛나기 시작했다.
네 방향으로 나눠 선 2학년 0반 학생들이 각자 이능파를 발산해, 문양에 흘려 넣고 있었다.
그렇게 흘러든 이능파는 중심에 선 반장, 금찬솔을 향해 움직였다.
색과 밝기, 파장등이 가지각색인 이능파가 하나로 흘러 들어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말도 안 돼…… 이건 마치, 이능파가 하나로 되는 것처럼 보여!”
염준열이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능파는 서로 섞이지 않는다.
그것이 이 세계의 상식 중 하나였다.
다른 사람과 손을 잡는다고 해서 손과 손이 녹아들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2학년 0반 학생들은 오늘 처음 눈이 왔을 때, 제갈재걸 동상이 눈을 맞지 않도록 동시에 이능파를 쏴 올리긴 했지만, 이들의 이능파는 모자이크나 퍼즐처럼 가까이에서 뭉쳐 있을 뿐 섞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수십 명의 이능파가 금찬솔을 중심으로 정말 하나가 되었다.
“아이들은 이걸 ‘이능파 링크’라고 부릅니다.”
제갈재걸의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이능파를 하나로 합치는, 상식을 뒤엎는 현상에 외부자 셋이 넋을 놓고 이능파를 바라봤다.
금찬솔을 중심으로 링크되어 하나가 된 이능파가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로 빛을 뿜고 있었다.
‘단 한 명이, 이 정도의 이능파를 다룬다면 충분히 가든을 지배할 수 있을지도……!’
촉룡이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금찬솔이 크게 외쳤다.
“우리는 이 가든을 지배해서 밖으로 나갈 거야!”
파아아아앗!
금찬솔의 말에 링크된 이능파가 반응했다.
마치 금찬솔이 2학년 0반 학생들에게 말을 던지자, 학생 전원이 다 같이 한목소리로 답을 하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이능파의 격류가 미궁의 벽으로 휘몰아쳤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능파가 벽을 때리고, 부수고, 관통했다.
우우웅…….
이들의 이능파에 이계가 반응하여 공간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막 접근하다가 홍룡의 불꽃 세례를 받을 뻔한 에너미는 움직임을 멈추고, 벽은 계속해서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용궁에서 봤던 가든 지배권 싸움과 비슷해. 지금 누가 주도권을 가져갈지, 누구의 간섭이 더 강력한지 싸우고 있는 거야!”
촉룡이 미궁을 둘러보는 사이, 제갈재걸은 2학년 0반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 주변에 방어막을 쳤다.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미궁이 흔들리고 있었으나 학생들은 격변하는 주변 상황에 신경을 끄고 이능파를 쏟아붓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제갈재걸이 있으니 지켜 줄 거라고 믿고, 반장 금찬솔이 이계 지배에 성공할 거라고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미궁은 점차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2학년 0반에게 지배권이 점점 넘어오는 듯, 중심에 서서 이능파를 컨트롤하는 금찬솔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나 그때.
쿠구구구구…….
갑자기 기온이 몇십 도 내려간 것처럼, 싸늘한 기운이 주변을 감돌았다.
차가워진 공기 속에서, 다시 미궁의 벽이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금찬솔이 이를 악물고 집중력을 올렸으나 순간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무릎을 꿇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찬솔아!”
“크윽…… 이럴 줄 알았으면 그 가든 관리를 협회에 맡기고 올 걸 그랬나…….”
제갈재걸이 급히 금찬솔 주변에 방어 결계를 세우자 비틀거리며 일어났으나 미궁 상태는 아직도 안정되지 않았다.
촉룡은 미간을 좁히고 하늘 쪽, 막혀 있는 천장을 응시했다.
“분노의 마신 이라노우스가 개입했어. 저 사제를 꽤 아끼나 봐. 힘을 나눠 주고 있어!”
가호나 광림, 신앙으로 엮여 있는 존재는 서로에게 힘을 빌려줄 수 있다.
상위 존재는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하고 현세에 개입할 수 있는데, 이라노우스는 사제를 위해 직접 힘을 내리기로 한 듯했다.
이라노우스의 목적은 이계의 지배권을 계속 사제에게 존속시키는 것.
2학년 0반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힘의 천칭이 다시 마신의 사제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힘을 보태마. 어떻게 하면 되지? 마족이 또 나타날 수 있으니 언령술사는 방어를 전담해.”
“저도 할게요!”
“…….”
촉룡과 염준열, 마진승이 이능파 링크에 지원했다.
마신이 얼마나 힘을 빌려줬는지 알 수 없으나, 힘 차이가 압도적으로 벌어진 건 아니므로 저들이 가세하면 다시 주도권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특히 이능파의 총량으로 생각해 봤을 때, 촉룡과 염준열이 개입하면 이쪽이 이길 가능성이 있었다.
제갈재걸은 급히 설명했다.
“문양에 서서 이능파의 파동을 맞추면 됩니다. 사상, 정서, 생각과 감정에 파동이 달라지는 것을 이용해…….”
제갈재걸의 설명을 들은 촉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염준열과 마진승은 감을 잡지 못한 것 같지만, 이능파의 파동에 관해 촉룡은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저 아이들의 목적은 ‘이 가든을 지배해서 밖으로 나가는 것’. 거기에 생각과 감정을 맞추면 된다라…….”
문양 위에 선 촉룡이 혼잣말을 하며 이능파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촉룡이 혼잣말을 거듭할수록 파장은 점차 아이들의 것과 유사하게 변해 갔다.
이윽고 이능파가 2학년 0반 학생들과 섞여 들어갔을 때였다.
파지지직!
촉룡은 급히 이능파의 발산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방금까지 문양 위에 디디고 있던 발이 감전된 것처럼 저릿저릿했다.
이능파 역류 현상이었다.
파장은 일치했는데, 링크된 이능파는 촉룡의 존재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돼, 됐다……!”
마진승의 희미한 풀빛 이능파가 바로 금찬솔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촉룡이 염준열 쪽을 돌아봤을 때였다.
홍룡을 부른 상태인 염준열이 불꽃의 색을 한 이능파를 발산한 순간.
파아아아아!
홍룡이 기다린 것처럼 눈부신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