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학교 밖 (6)
중앙 구역에서 거주 구역으로 향하기 전.
학생회관의 회의실 중 하나.
“적호는 당신이 오늘 바쁠 거라고 했어요.”
슬슬 거주 구역으로 가 봐야 해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했는데 다행히 공청훤 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적호가 나와 이번 일에 관해 자세한 사항을 말했을 리 없으니, 아마 공청훤의 유도에 휘말려 말을 한 게 아닌가 싶다.
“의신 학생이 두려는 수를 제가 방해하면, 모두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말도 들었죠.”
그래도 적호가 정보만 분 게 아닌 것 같다.
나중에 내가 움직이기 편하도록 나름 안배를 했나 보다.
나는 냉큼 이 분위기에 편승하기로 했다.
“네, 그럴 거예요.”
“같이 갈까요?”
공청훤의 말에 몇 가지 수가 떠올랐다.
공청훤과 함께 움직이면 거주 구역 쪽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개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다가 생각을 바꿨다.
‘내가 가려는 곳은 마족이 나타날 가능성이 적어. 만약 나타나더라도 언령을 쓰는 내가 대처할 수 있지. 하지만 여기는 달라.’
중앙 구역에서 방윤섭을 이용해 학생들을 습격하던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붙잡혔다.
마족이 서로를 구출하려 들 것 같지는 않으나, 대체 무슨 꼴을 당했나 궁금해서 염탐하러 올 가능성은 있다.
그걸 생각하면 공청훤은 반드시 이 자리에 남겨 두고 싶다.
2학년 일행 쪽에 있을 제갈재걸이 일찍 중앙 구역에 도착했다면 모를까, 공청훤은 이곳에서 마족을 대비했으면 좋겠다.
‘이제 공청훤도 언령의 힘에 관해 알아야겠지.’
나는 공청훤과 같이 가겠다고 대답하는 대신, 언령에 관해 설명하기로 했다.
“선생님, 언령에 관해 말씀드릴 게 있어요.”
마족의 약점은 언령이다.
인비디우스의 사제는 공청훤에게 아주 쉽게 제압되었다.
그 수많은 권속도 마찬가지였다.
마족의 힘을 원동력으로 삼는 것들은 모두 인간의 언어에 약했다.
그렇기에 마족들이 이를 숨기고, 비밀리에 언령술사를 처리하려 한다.
이 사실들을 설명하자 가만히 듣던 공청훤이 되물었다.
“의신 학생은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죠?”
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플마고 속 제갈재걸이 흑막과 마족의 계략에 당한 이후였다.
상위 존재인 7대 죄악의 마신 중 하나, 탐욕의 아바리티아.
그 마신으로부터 힘을 받은 사제가 저주의 씨앗을 이용해 학생을 인질 삼아 제갈재걸을 덫에 빠뜨렸다.
그들이 흑막과 거래하는 상대인 건 맞지만, 그렇게나 지독하게 제갈재걸을 망가뜨린 건 오로지 그가 언령을 사용하는 플레이어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공청훤에게 밝힐 수 없으니, 적당히 얼버무리기로 했다.
“……저도 언령을 쓸 수 있으니까요. 마족과 싸운 적이 있어요.”
비록 플레이어의 궤적을 통해 사용하는 제갈재걸의 힘이지만, 어쨌든 나도 언령술사인 셈이다.
나는 제갈재걸의 힘으로 아바리티아의 사제를 잡았고, 지금 그 마족은 호족의 영역 저편에 처박혀 있는 상태다.
어쨌든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니 당당했다.
공청훤은 내 말을 들은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만물사용에 언령이라…… 마족과 대치한 적이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네요. 이겼죠?”
“네.”
“잘했어요.”
뭔가 선생님한테 듣는 말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아니, 공청훤은 실제로 선생님이고 나는 수업을 듣는 학생이긴 한데…… 위기 상황을 계속 겪고 싸워서 그런가, 뭔가 내가 학생이라는 걸 잊을 지경이었다.
공청훤은 내가 학생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려고 일부러 저런 말투를 쓰는 걸까?
“의신 학생이 굳이 언령이 마족의 약점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건, 이곳에 마족이 올 가능성이 있으니 저는 남으라는 뜻이겠죠?”
“…….”
“그래요. 여기는 제가 있어서 안전하겠지만, 의신 학생은요?”
“네?”
그야 다소 리스크가 있긴 하지만 괜찮을 거다.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했는데, 거짓말은 하지 않고 모호하게 답변하기로 했다.
“괜찮을 거예요.”
“의신 학생은 괜찮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로 들리네요.”
선량한 목소리로 요점을 찌르니 반박하는 게 쉽지 않았다.
공청훤은 순수하게 나를 걱정해서 저러는 걸 알아서 더 그랬다.
“의신 학생도 언령 스킬을 사용할 수 있으니 만약 마족이 나타나는 경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죠. 하지만 의신 학생이 마족을 상대하러 가는 것 같지는 않아요.”
하나하나 내 생각에 관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건 편하지만 기분이 묘했다.
공청훤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 자리에 왔을 텐데, 크리스마스 시나리오를 대비해 호랑이 저택에서 작전 회의를 할 때 느꼈던 기분이 들었다.
원래 신인이라서 그런 걸까?
“그러면 조심히 가세요, 의신 학생.”
뭐라고 할까 고민할 때, 공청훤이 불쑥 말했다.
내가 멍하니 할 말을 잊고 있을 때, 공청훤이 웃으며 나를 배웅했다.
“처음에 말씀드렸잖아요. 적호로부터 의신 학생을 방해하면 모두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요.”
“그건 그런데…….”
공청훤은 마치 말리려는 사람이 하는 소리를 하지 않았나.
그것도 의도한 바였던 것 같다.
“처음부터 의신 학생이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도록 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내버려 두면 쉬지도 않고 달려갈 것 같았죠. 함께 갈 생각도 있고, 걱정도 했지만 붙잡을 생각은 없었어요.”
그거야 그렇긴 하다.
공청훤에게 붙잡히지 않았으면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비우다가 전무영의 광림을 써서 얼른 탈출해 거주 구역으로 갔을 거다.
‘나를 쉬게 하기 위해서 잡아 둔 거였구나.’
나는 공청훤이 권했던 컵을 잡아 미지근한 물을 삼켰다.
그 모습을 본 공청훤이 만족스러워했다.
나는 그렇게 공청훤에게 뒷일을 맡기고 거주 구역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학생회관을 나간 후, 우선 은호가 준 아이템 카드를 실체화하여 착용했다.
실체화된 건 까마귀 인형 옷으로, 약간의 기척 억제 기능이 붙은 은호의 수제 방어구였다.
이동하는 내내 전무영의 광림을 쓰면 이능파 소모가 크니까 위장용 방어구를 사용하기로 했다.
발각되어도 변명이 가능할 만한 디자인으로 정했는데, 그게 이 인형 옷이었다.
‘은호는 호랑이 인형 옷을 입히고 싶어 했지.’
작전 회의 때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인형 옷 디자인으로 호랑이를 추천했다.
내 이능파 색이 검기 때문인지, 호랑이들은 검은색 호랑이 인형 옷을 입히고 싶어 했다.
용제건이 혼자서 ‘용 인형 옷도 괜찮지 않을까? 주오 드래곤즈의 마스코트, 용용이 인형도 꽤 귀엽잖아.’라고 말하긴 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김신록의 한심해하는 시선을 좀 받다가 만 게 고작이었다.
그래도 괜히 나와 호족과의 관계성이 공공연해지면 나중에 움직이기 어렵다는 설명을 하자 못마땅해하면서 까마귀 인형 옷을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일단 검은색 호랑이 인형 옷도 만든 듯했다.
물론, 그 인형 옷은 저택에 두고 왔다.
‘이제 가야 되는데.’
막상 학생회관을 뒤로하고 떠나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에 남은 우리 반 아이들, 동급생, 선배, 교사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너무 많았다.
퍼스트 크리스마스 당시, 저 학생회관에서 얼마나 무참한 꼴로 항전을 계속했는지 떠올리면 더 그랬다.
‘……믿고 내가 할 일을 해야 해!’
그 지긋지긋한 눈이 내리지 않으면 은광고인들이 저런 에너미에 질 리가 없다.
하물며 아직 저들은 ‘학습’하기 전이다.
학생들이 죽으면 죽을수록 눈발은 굵어지고, 경험을 쌓은 에너미들은 더욱 교활해졌다.
어쩌면 기우제의 제물처럼 삿된 눈은 학생들을 죽음을 먹고 강해졌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수는 이제 통하지 않으니, 괜찮을 거다.
나는 그렇게 몇 번이나 되뇌며 거주 구역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우어어어…….
그르르…….
거주 구역으로 이동하는 사이, 인기척을 찾아 학생회관으로 이동하는 에너미들을 수십 마리 마주쳤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저들은 학생회관 각 출구에서 싸울 준비를 한 학생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내가 할 일을 마치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면 은광고가 에너미의 위협에 대처할 일도 없어.’
에너미를 발견하고도 모른 척하는 걸 그렇게 변명하고는 계속 달려 나갔다.
은호가 강력한 이능을 걸어 둔 건지, 아니면 운이 좋았던 건지 나를 발견하고 공격을 가하는 에너미들은 없었다.
그렇게 거주 구역에 도착했다.
지익회관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바리케이드를 쌓고 있는 가운데, 천익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소란스러워 보였다.
‘이계 공략 중인 건가!’
지익회는 학생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비상구를 조사하다가 이계와 맞닥뜨렸다고 한다.
지금은 성시완을 중심으로 공격대가 편성되어 이계를 공략하는 중이고 ‘계’새끼가 남아 수비대와 지익회관 쪽 방어를 담당하고 있다는 대화 내용이 들렸다.
몸을 숨기고 학생들의 대화를 듣다가 갑자기 불신감이 치솟았다.
나는 ‘계’새끼를 믿을 수 없었다.
옛 한국 지부장의 이능으로 본 그놈의 기억을 보면 누구나 믿지 못할 거다.
‘계’새끼는 내가 쓴 공략을 찾아보느라 대사도 제대로 읽지 않았던 놈이다.
또, 플마고 최상위권 플레이어블 캐릭터 안다인을 그렇게 육성시키고도 간단한 에너미를 처리하지 못해 헤매는 겜알못의 모습을 보고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적어도 성시완이 합류할 때까지는 상황을 지켜보자.’
나는 산책로에 설치된 간이 쉼터용 정자의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몸을 낮춰 저격용 이능 총을 실체화해 스코프 너머로 지익회 상황을 살폈다.
방금 이계의 틈으로부터 에너미가 발생한 게 보였다.
‘에너미는 넷이다. 지금 주변에 있는 플레이어는 박승현, 김현구 그리고…… ‘계’새끼!’
박승현이 혼자 에너미를 상대하는 건 불안하지만, 그래도 옆에 김현구가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마침 제일 먼저 에너미를 발견한 건 김현구였다.
김현구가 ‘계’새끼보다 빠릿빠릿하게 반응한 걸 보니 믿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전투 면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여태까지 나타난 에너미에 비해 희귀도가 높은 건가. 그래도 충분히 대처할 만한 수준의 에너미인데 당황하고 있어!’
전장에서 변수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법이다.
경험이 적은 1학년들은 예상보다 강한 적이 나오자 당혹스러워했다.
김현구의 도움을 받아 박승현이 아슬아슬하게 피했지만, 이들은 전의를 상실한 듯 도망치려 했다.
‘진지를 구축하던 중에 습격당했으니, 퇴로에는 장애물이 많아. 진지 뒤에 숨기도 곤란해. 희귀도가 그렇게 높지는 않으니 싸우는 게 나을 텐데.’
지금 저 셋 중에서 싸우는 건 무거워 보이는 해머를 휘두르는 ‘계’새끼 하나였다.
지원을 부르기에는 다른 곳에도 막 에너미가 나타난 상태라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이 상황에 개입하기로 했다.
탕탕! 탕!
우어어어······.
쿠웅!
만물사용으로 다룬 이능 총이라 그런지 탄환은 내가 원하는 대로 정확히 에너미의 급소를 꿰뚫었다.
저격으로 주변의 에너미를 모두 쓰러뜨린 후, 괜히 박승현이 저격수를 찾아본다고 시간을 낭비할 가능성이 있으니 얼굴을 비추기로 했다.
까마귀 인형 탈을 쓴 채로 그쪽으로 접근했을 때.
인형 탈 너머로 계이담과 마주쳤다.
‘저 새끼가 지금 왜 나를 저런 표정으로…… 아.’
기대에 찬 얼굴을 한 ‘계’새끼를 보니 불쾌감이 솟아올랐다.
깔끔했던 사격.
인형 탈로 감춘 체형.
지금 ‘계’새끼의 시선.
이를 미루어 보았을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저놈은 지금 이 인형 탈 밑에 안다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보다.
휙!
불쾌감을 견디지 못하고 인형 탈을 벗어 던졌다.
벗은 인형 탈은 아이템 카드가 되어 내 손으로 돌아왔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