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학교 밖 (7)
1학년 구역, 교직원이 주로 이용하는 뒤뜰 주변.
인형 옷을 입은 이들이 쓰러진 웅족들을 옮기고 있었다.
이들이 옮겨질 예정인 곳은 은광고 연구동 구역 광림 연구 4관, 은영관의 지하.
호족에게 붙잡힌 웅족이 가는 나락이었다.
인형 옷 안에 있는 이들은 전원 호족으로, 사전에 배치한 이들이었다.
“다른 곳은?”
백호가 짧게 묻자 인형 옷을 입은 호족이 정중하게 답했다.
“지시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수가 많아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알았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주변이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사전에 뒤처리를 하기로 담당한 호족들이 손을 쓴 덕에 이곳엔 엷게 이능파의 기척이 남아 있을 뿐, 격전이 벌어진 곳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깨끗했다.
인형 옷을 입은 호족들이 물러나자 주변이 잠잠해졌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건 용제건이었다.
“진웅팔선 중 하나를 산 채로 잡다니, 운이 좋네. 질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번민의 곰이 죽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거든. 신록이가 많이 바빠지겠다.”
“…….”
오늘 두었던 수가 맞아떨어져 오랜 기간 호족과 대립해 온 진웅팔선 중 하나, 번민의 곰을 사로잡았다.
번민의 곰이 마지막까지 김신록을 어찌해 보겠다고 입을 놀렸으나 적호의 번개로 혀가 구워지고, 백호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아 기절한 채로 붙잡히고 말았다.
백호와 적호는 번민의 곰이 들고 있던 선장도 박살 내려고 했으나 김신록이 연구 소재로 삼고 싶다는 말에 부수지 않고 보관하기로 했다.
제 뜻을 존중해 주는 백호와 적호를 생각하니 김신록은 기쁘면서도 낯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이번 일은 끝나지 않았다. 정신 차려야지.’
김신록이 그렇게 자신을 다잡으며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하고 있을 때.
용제건이 정신이 번쩍 드는 소리를 했다.
“신록아, 이동하기 전에 제자랑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
“은광고의 학생들을 믿어서 저 곰의 거래 제안에 응하지 않은 거잖아. 학생을 믿으면 선생으로서 격려도 해 줘야지.”
용제건은 피를 토한 게 언제였냐는 듯 멀쩡해진 상태로 놀리듯이 말했다.
웅족과 싸우는 내내 불었던 바람은 바로 ‘치유광풍(治癒狂風) 유상희’의 광림이었다.
본래 공격 및 견제용 광림이었던 유상희의 바람은 아케아의 힘과 가호를 받으며 치유 이능이 추가되었다.
광범위한 전장 속에서 적을 공격하고 디버프를 주고, 아군을 치유하는 유상희의 이능은 최강의 서포터 능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상희의 치유 능력은 천신의 제약에 걸려 있는 적호와 이능파와 체력이 상당히 소모된 용제건을 회복시켰다.
소모된 이능파를 회복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건지, 용제건은 만전의 상태라고 하긴 어려웠지만 싸울 수 있을 만큼 이능파를 되찾은 상태였다.
‘회복되자마자 이 용은……!’
방금 전까지 김신록 어깨에서 다 죽어 가던 용제건을 생각하면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그 모습이 자꾸 생각나 평소처럼 압정을 던지지는 않았지만, 능글거리는 얼굴을 보니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용제건이 언급한 학생들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용제건이 칭한 학생은 사전에 조의신의 부탁으로 호족과 협력하기로 한 유상희만을 칭하는 게 아닐 것이다.
‘……붙잡힐 뻔했을 때, 총탄이 그자의 손으로 날아왔지.’
유상희가 부른 광풍을 뚫고 총탄은 몇 발이나 웅족의 손을 노리고 날아왔다.
웅족이 움직이는 속도, 바람의 세기 등을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사격 솜씨였다.
굉장한 건 사격 솜씨만이 아니었다.
일반 총기로는 진족의 피부에 상처도 내기 어렵다.
그렇다는 건 이능파를 실어 이능 총으로 번민의 곰을 쐈다는 것이다.
저격 솜씨, 타고난 강력한 이능파, 그 이능파를 컨트롤하는 힘 등등을 모두 갖춘 플레이어.
마치 신의 힘이 깃든 것 같은 총탄을 쏘는 명사수.
김신록은 자신의 제자, 안다인을 떠올렸다.
사박.
호족이 물러나자 여태까지 멀리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두 사람이 나타났다.
앞장선 건 유상희였다.
“상희 학생, 협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협력을 청하지 않으셨어도 은광고에 이런 일이 닥친다면 자진해서 나섰을 거예요.”
적호와 유상희가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김신록은 입을 떼지 못했다.
김신록도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할 텐데 유상희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안다인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곧은 시선을 받다가 김신록은 자신이 지금 본모습을 하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김신록은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용제건이 대화하는 내내 ‘신록아’를 연호해 댔으니 자신의 정체는 드러났을 것이다.
아니, 굳이 용제건이 입을 다물고 있었더라도 머리 모양이나 입은 옷차림 등으로 김신록이라는 걸 알았을 거다.
단순히 본래 모습만 드러난 것이 아니고, 호족과 웅족의 후예라는 것도 다 드러났을 텐데.
김신록이 어떤 취급을 받고 얼마나 위험한 위치에 있는지 알았을 텐데.
‘……화를 내지 않을까?’
김신록은 웅족이 노리는 상대다.
번민의 곰이 학생의 안전을 두고 거래를 하려 했던 것처럼 얼마든지 제자들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상태였다.
‘그때 13조 학생들이 전멸할 뻔한 건 나 때문인데!’
작년 입학시험 때 있었던 웅족의 침입을 생각하면 김신록은 아직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조의신이 모두를 구하지 않았다면 13조 학생들은 전멸했을 게 분명하다.
김신록 때문에 학생들이 죽었다면 그는 죽어도 눈을 편히 감지 못했을 것이다.
교사로 지내지 않았다면, 아니, 아예 태어나지 않아서 적호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 없었다면.
김신록은 죽어서도 계속 후회할 것 같았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 교사로 지냈지…….’
그런데도 김신록은 신분을 숨기고 은광고의 교사로서 지냈다.
표면상의 이유는 호족이 운영하는 은광고에서 일하며 도움이 되고 싶어서였으나, 은광고에는 김신록 외에도 우수한 인재들이 많다.
김신록이 있어도 없어도 은광고의 운영에는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김신록은 애써 깊게 생각하려 하지 않았지만, 그가 오랜 시간 교사로서 지낸 이유는 명백했다.
교사로 지내는 게 좋아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게 보람차서.
그저 김신록 자신을 위해서, 학생을 위험에 내몬 것이나 다름없었다.
“선생님.”
가까이 들린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김신록은 저도 모르게 땅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안다인은 어느 사이엔가 김신록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김신록 선생님.”
본 모습을 한 상태로 ‘김신록 선생님’이라고 불려진 건 조의신 외에 안다인이 처음이었다.
안다인은 평소의 침착하고 냉정한 모습에 비해 다소 흐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다인은 비통해하며 말했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위험한 처지에 처하신 줄 모르고 저는 그냥 서운해하기만 했어요. 선생님께서 마음을 열지 않으시는 걸 안타까워했죠.”
제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안다인의 마음 씀씀이에 관해 전혀 몰랐던 김신록은 절로 마음이 아파졌다.
안다인이 김신록을 탓하는 말을 조금도 하지 않아서 미안한 마음이 치밀었다.
“다인아…….”
김신록이 안다인의 이름을 부르자 엷게 미소 지었으나 눈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눈을 보니 김신록은 다시 말을 잃었다.
사죄부터 할 생각이었는데, 제자가 울먹거리는 걸 보니 가슴이 답답해져 입도 잘 안 열렸다.
그사이에 안다인은 평소의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침착하다기보다는, 굳은 결심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앞으로는 김신록 선생님과 함께 싸우고 싶어요. 제자가 스승의 은혜를 갚게 해 주세요.”
안다인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김신록이 눈을 크게 떴다.
김신록은 먼 옛날부터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제자들이 무슨 말을 할지 상상해 봤지만, 그중에 같이 싸우겠다는 말을 떠올린 적은 없었다.
김신록은 황망한 얼굴로 되물었다.
“함께 싸우다니…….”
“웅족이 선생님을 노린다면, 웅족과 싸울게요.”
“웅족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그런 위험한 말을……!”
“방금 싸운 걸 봐서 알아요. 선생님께 직접 공격하려 했던 자가 웅족의 핵심 세력 중 하나, 진웅팔선의 일각이라는 것도요.”
안다인은 자신이 누굴 저격한 건지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안다인은 그 광풍 속에서 나눈 대화를 전부 듣고, 기억한 후 그 내용에서 정보를 추려 내 정리를 마친 상태였다.
김신록은 안다인이 위험한 정보를 접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제자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걱정이 치솟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웅족을 사냥할 정도로 강해지고, 철저하게 준비할게요.”
안다인이 ‘웅족’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순간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보통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보이는 눈빛이었다.
김신록은 여전히 당혹스러워했으나, 백호와 적호 그리고 용제건은 흐뭇해하며 이 광경을 바라봤다.
김신록의 정체를 알아도 이렇게나 잘 따라 주는 제자가 눈앞에 있으니, 기특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제 아들을 위해 싸워 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김신록 선생님의 아버님 되시는 분인가요?”
“네, 적호라고 합니다.”
적호는 친밀감을 담아 안다인을 바라봤다.
적호는 리플레이 속에서 신수의 무덤 앞에 있는 안다인을 만난 것을 계기로 제법 친하게 지냈었다.
물론 이 세계에서는 없던 일이었기에 연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적호는 안다인의 선하고 바른 모습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한편, 안다인도 김신록의 아버지라는 말에 바로 경계를 풀었다.
적호가 김신록을 위해 싸우는 모습을 봐서 더더욱 그랬다.
적호와 안다인은 순식간에 통성명을 마치고 연락처까지 교환했다.
그 모습을 제일 기쁘게 보는 건 용제건이었다.
“다인이가 신록이랑 같이 싸워 준다면 안심된다.”
“용제건 선생님께서 예전에 하신 말씀은 지금 상황과 관련 있는 건가요?”
“응.”
“…….”
안다인은 1학년 1반의 축제 이벤트를 마친 후, 용제건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상위 존재가 되면, 어느 진족들로부터 신록이를 지켜 줬으면 해.
그 진족들이라는 건 웅족을, 어쩌면 호족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김신록은 호족과 웅족의 후예.
그러니 두 진족에게는 제대로 저항하기 힘드니까.
용제건이 했던 말의 비밀을 대부분 풀어냈지만, 여전히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안다인은 용제건의 시안색 눈을 응시했다.
가늘게 뜬 실눈은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
“……!”
눈이 마주친 순간 안다인은 용제건에게서 위압감을 느꼈다.
용제건의 눈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품고 있었다.
“용제건 선생님…… 그 눈은 혹시…….”
“용제건…….”
“…….”
이 기운을 느낀 건 안다인뿐만이 아니었다.
유상희도, 적호도, 백호도 이를 감지했다.
“아, 은광고 학생들이, 어쩌면 학교 밖에서도 내가 발휘한 기적을 이해했을지도 모르겠다. 위상이 올라갔나 봐.”
용제건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황금색의 봉투 안에는 금실로 치장되고 옥색의 실로 마감된 눈가리개가 있었다.
용제건은 천천히 눈가리개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눈을 가린 용제건이 태연하게 말했다.
“나 곧 승천할지도 모르겠다.”
용제건의 눈에 상위 존재의 기운이, 신격이 어려 있었다.
김신록은 눈가리개로 가려진 친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