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학교 밖 (12)
제천대성의 등장에 놀라긴 했으나 이 자리에 있는 그의 대사에 별 반응을 보이는 이는 없었다.
기척을 지우고 사태를 관망 중인 황호와 여차하면 지력을 끌어올려 싸울 준비를 하는 청룡은 물론, 저강렵조차 무표정이었다.
휘말린 일반인들은 도망치기 바빴고 그나마 굴린부르스티가 얼빠진 얼굴로 자신이 ‘우주최강’이라는 단어를 들은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러워했다.
반응이 영 시원치 않자 분신 가운데에 있는 제천대성의 본신이 아주 잠깐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황호는 그 꼴을 한심하게 여기면서도, 제천대성이 정말 이 자리에 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조의신의 수가 진짜로 통하다니……!’
제천대성은 배신자가 아니며 향후 배신할 가능성도 0에 가까웠다.
제천대성이 12지 동맹을 저버리는 순간 관음보살이 한 봉인이 풀리고 긴고주가 황호의 손에 들어오니까.
제천대성은 이전에 긴고주가 담긴 부적의 봉인을 넘기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12지 동맹의 불가침 조약을 깬 배신자가 아니다. 만약 나와 원족이 12지 동맹을 배신한다면 그 안에 적힌 긴고주가 황호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제천대성은 황호가 웅족과 있었던 일로 타 진족을 얼마나 경계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협력을 구하기 위해 저런 담보까지 걸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제천대성이 호족의 협력을 얻으려 했던 이유는 바로 그의 동생, 무지기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호족의 협력 그리고 조의신의 수로 무지기를 구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제천대성은 호족에게 무지기 수색을 의뢰하면서 이런 말도 했었다.
―일이 잘 풀리면 나중에 그 배신자라는 걸 때려잡는 일에도 협력할게.
제천대성이 배신할 가능성은 0에 가깝고, 사실상 배신자 처단의 협력 약속도 얻어 낸 상태다.
그러나 황호는 제천대성을 부를 생각이 없었다.
‘배신할 가능성이 없고, 빚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협력하리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황호는 제천대성이 배신자 측에 있는 저강렵을 보고 뒤늦게 중립을 유지하려 들 가능성도 생각했다.
제천대성이 그런 선택을 해도 12지 동맹을 배신하지 않은 셈이니, 긴고주는 손에 못 넣고 작전을 전부 새로 다시 짜야 한다.
그렇기에 차라리 처음부터 제천대성은 없다고 상정하고 일을 계획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제천대성을 이번 작전에 동원해야 한다면, 저강렵과는 마주치지 않게 배치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조의신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제천대성에게 저강렵을 상대해 달라고 부탁해 볼게.
조의신은 제천대성에게 저강렵을 맡기려 했다.
게다가 말을 하는 걸 봤을 때, 황호를 통해 제천대성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게 아니라 조의신이 직접 제천대성과 담판을 지을 것처럼 말했다.
황호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
―마치 의신이 형이 직접 제천대성과 만나겠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은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긴 했지만 말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지금 조의신더러 제정신이냐고 되묻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엄밀히 따지면 조의신은 12지 동맹에 속한 몸이 아니니, 제천대성이 허튼짓을 해도 배신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의신은 은호가 모르는 사실을 들어 이에 반박했다.
―황지호랑 제천대성이 이전에 이런 대화를 했어.
조의신은 예전에 도시후를 두고 두 수장이 한 이야기를 꺼냈다.
강제로 광림이 발동되어 어쩔 수 없었다고 하나, 도시후의 이능이 무지기를 봉인했고 그에 따른 원념도 도시후를 향했다.
제천대성이 후일 도시후를 공격할 가능성을 염려한 황호가 물었다.
―이자는 내가 비호하려 했던 자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손을 대려는 건 아니겠지?
그러자 제천대성은 아주 무거운 말로 받아쳤다.
―하하하! 내가 그런 짓을 한다면, 너를 배신하는 꼴이 되겠군.
즉, 도시후를 공격하는 행위는 황호를 배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조의신은 그 대화를 바탕으로 자신이 안전하다고 확신했다.
―내가 호족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만 사전에 밝히면, 나랑 제천대성이 1대1로 만나도 아무 문제 없을 거야.
그 말을 들은 황호는 생각했다.
조의신이 호족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긴 했구나.
매번 매정하게 한발 물러나 있는 태도를 보이기에 전혀 모르는 줄 알았다.
황호는 툭하면 은인 운운하길 잘했다고 여겼다.
이런 감상을 느낀 건 황호만이 아닌 듯했다.
―그렇군요. 의신이 형은 호족의 은인이니까 우리의 비호를 받고 있죠.
―조의신의 말대로입니다. 호족은 조의신에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당연히 비호의 대상에 조의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적호까지 추임새를 넣으니 조의신은 일순 그런 말을 한 걸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필사적으로 말을 돌리려 하고 차를 마시고 신수를 쓰다듬으며 안정을 찾으려는 모습을 보고 황호는 신나게 처웃었다.
그 덕에 앞으로 조의신이 제 입으로 호족의 비호 운운하는 일은 없어질 것 같지만, 어쨌든 황호는 만족스러웠다.
―그래, 그렇다면 안전은 보장된 것 같군. 하지만 굳이 조의신 네가 직접 제천대성을 만나야 할 이유는 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점을 해결하려고. 아마 그 의문의 대답에 따라 제천대성의 협력 여부가 결정될 거야.
―네가 대체 어떤 의문을 품었는지 들어 보지.
그러자 조의신이 찻잔을 내려놓고 그 의문을 입에 담았다.
―내가 품은 의문은 두 가지야.
―두 가지나 되나?
―첫째는 제천대성이 12지의 배신자 중에 저강렵이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는 점이야.
제천대성은 12지 회담에 참가하여 이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배신자가 저강렵인 줄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황호에게 긴고주가 담긴 봉인을 건네고, 배신자를 때려잡겠다며 나섰다.
―내가 흑막이라면 저강렵을 포섭한 시점에서 제천대성을 회유하려 했을 거야. 둘은 서천취경(西天取經)의 여행을 거치며 연을 맺은 사이잖아. 하지만 제천대성은 배신자에 관해 아는 게 없어 보였어.
저강렵은 제천대성에게 손을 내밀 시도조차 하지 않은 듯, 제천대성은 배신자에 관해 아는 바가 없어 보였다.
제천대성이 중립을 지키고, 저강렵의 배신을 모르는 척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의심스러운 점은 더 있었다.
―게다가 흑막의 손에는 제천대성의 동생인 무지기가 있었어. 여차하면 무지기를 이용해 협박하고 굴복시킬 수도 있는데, 흑막은 그러지 않았어.
조의신의 말을 들어 보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듣고 보니 어째서 제천대성이 흑막에 가담하지 않은 건지 이상할 정도였다.
―제천대성의 의동생이나 다름없는 저강렵, 친동생인 무지기. 이 두 개의 수를 가지고도 흑막은 제천대성을 건드리지 않았어. 내가 품은 첫 번째 의문은 이번 사태에 제천대성이 무지하다는 점이야.
조의신은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한 듯 생각에 잠긴 채로 말했다.
―아직 추측의 영역이지만, 제천대성과 저강렵 사이에 무슨 일이 있던 게 아닐까? 그래서 흑막 측에 가담하라는 제안조차 할 수 없던 상황이 아니었을까? 제천대성과 직접 이야기해서 이 점을 명확히 하고 싶어.
자신이 둘 수의 가능성을 따져 보는 게 마치 체스를 두는 기사 같은 말투였다.
적호는 그 말에 납득하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제천대성과 조의신은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그런 속 깊은 이야기를 하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조의신의 은혜를 입었다고 하지만, 그 약아 빠진 원숭이가 입을 바로 열 리가요.
이 점은 황호도 동의했다.
황호도 처음에는 조의신을 얼마나 재 보고 떠보고 관찰했던가.
고작 한 번의 은혜를 믿고 한 사람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기에는 이 세상은 지나치게 험했다.
황호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아찔할 만큼 그의 은인에게 날 선 태도를 보인 적이 있었다.
황호가 그러했는데, 제천대성도 바로 조의신을 믿을 리가 만무했다.
―그 점은 문제없어요.
하지만 조의신은 딱 잘라 말했다.
팟!
조의신은 마법을 부린 것처럼 아이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이템 카드 테두리 색을 미루어 보았을 때 희귀도는 UR급.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카드의 표면을 보았을 때, 아이템 카드의 정체는 상보심금파였다.
삼청 중 하나, 도덕천존이라고도 불리는 태상노군이 저강렵을 위해 팔괘로로 만든 쇠스랑이었다.
아이템 카드 표면에 그려진 상보심금파는 조의신의 이능파 색인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는 상보심금파가 완전히 조의신을 주인으로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상보심금파에게는 자아가 있어 주인을 선택하죠. 상보심금파가 저강렵 대신 선택한 새 주인의 말이라면 제천대성이 귀를 기울여 줄 거예요.
조의신의 말은 그럴싸했다.
분명 상보심금파의 새 주인이자 호족의 비호를 받는 인물이 대화를 청하면 제천대성은 성실히 응해 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뭔가 부족했다.
이 점은 은호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제천대성이 의신이 형 말에 귀를 기울인다 해도, 이야기를 끌어내는 건 어려울 거예요. 단순히 의동생이 가지고 있던 무기의 새 주인이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제천대성은 허술해 보이고, 친근해 보여도 심계가 보통이 아니니까요.
그 말을 들은 조의신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여전히 수상했다.
그 얼굴을 본 은호가 확신했다.
―의신이 형이 품은 두 번째 의문은 그 상보심금파와 관련된 거겠군요.
조의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의신은 상보심금파를 통해 알게 된 무언가와 품은 의문들을 바탕으로 제천대성과 독대했다.
그리고 그 결과, 제천대성은 이 자리에 왔다.
화려한 등장 후, 잠시 민망해하던 제천대성이 저강렵에게 말을 걸었다.
“팔계야, 상보심금파는 어디에다 두고 이런 떨거지들과 온 거냐?”
제천대성이 완전무장한 저강렵을 여의봉 끝으로 쓰윽 가리키자, 졸지에 떨거지 취급 당한 800 수군 중 하나가 분개하여 외쳤다.
“떨거지라니! 제아무리 제천대성이라해도, 읍읍!”
“입 닥쳐! 너 때문에 저 여의금고봉이 이리로 향하면 네놈을 방패로 삼을 테다!”
“쉿! 쉬잇!”
철없고 배움이 얕은 이들은 알지 못했으나 고참급에 해당하는 수군들은 제천대성의 무서움을 잘 알았다.
제천대성의 불같은 성질머리는 말할 것도 없었고, 별 이유 없이 여의금고봉에 얻어터진 수많은 영웅호걸과 기타 잡배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제천대성의 분신 중 하나가 고개를 돌려 방금 목소리를 낸 수군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여의봉을 만지작거리는 꼴이 얼굴을 기억해 놨다가 나중에 이빨을 다 박살 낼 예정인 것 같았다.
일단 제천대성의 본신은 저강렵과 이야기하기에 바쁜 듯했다.
“뭐, 지금 상보심금파는 주인을 잘 만난 것 같긴 하다만.”
“……! 그 망할 까마귀 자식이 어디 있는지 아는 것이오?”
“응, 대충. 하지만 안 알려 줘.”
“손 형!”
상보심금파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는 듯한 제천대성의 말에 저강렵이 부들부들 떨었다.
저강렵의 집중력과 정신력을 한껏 어지럽게 한 후, 제천대성이 물었다.
“팔계야, 무지기가 여태까지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그랬던 거냐?”
“손 형의 동생 말이오?”
“그래. 이계 충돌 후에 한 번 만났을 때, 동생의 행방을 찾아봐 달라 부탁한 걸 기억하고 있을 텐데.”
제천대성의 뜬금없는 질문에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전부 어리둥절해했다.
제천대성에게 있어 몹시 중요한 질문이지만, 다른 이들 귀에는 영 상황에 맞지 않은 잡소리로 들렸다.
그러나 제천대성의 말에 함부로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저강렵은 투구 밑의 얼굴을 구기고는 툴툴거리며 답했다.
“손 형이 찾지 못하는 걸 내가 어찌 아오? 손 형은 내가 그런 일에 능하지 못한 걸 알고 있잖소! 늘 짐꾼 취급 하더니 아쉬울 때만 정보 수집을 시키고…….”
“진짜로 몰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냐?”
제천대성은 저강렵을 빤히 쳐다봤다.
저강렵이 고도의 연기를 펼치는 건지, 정말로 모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제천대성은 경험에 근거하여 지금 가장 유효한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제천대성은 저강렵이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바람을 가르고 날아갔다.
800 수군들이 제천대성이 탄 근두운이 남긴 잔상을 눈으로 따라가기도 전에 바람을 찢는 소리와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쐐애애애액! 퍼어억!
“팔계야, 일단 여의봉으로 백 대만 맞자.”
제천대성은 ‘앞으로 구십 구 대’라고 덧붙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