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학교 밖 (13)
제천대성은 여의봉을 놀려 저강렵을 패기 시작했다.
전광석화와 같이 여의봉을 움직일 때마다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저강렵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여의봉을 막아 보려 했으나 방어하려 들면 제천대성은 더욱 매섭게 여의봉을 휘둘렀다.
퍽! 퍼억! 쾅! 퍽! 뻐억! 빠각!
여의봉의 연타가 계속되었다.
정말로 여의봉으로만 패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싶을 정도로 기괴한 소리가 섞이곤 했다.
이계 충돌 이후 제천대성은 비정기 오찬회의 주최자, 호사가 진족으로 이름을 감추고 얌전하게 지냈으나 본질은 어디까지나 천방지축, 호행난주 손오공이었다.
지금까지 참아 온 걸 푸는 것처럼 제천대성은 신나게 저강렵을 팼다.
“소, 손 형! 내 얘기 좀, 억!”
“백 대 맞고.”
보는 눈이 있어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고 어떻게든 방어를 해 보려던 저강렵이 대화를 시도했으나, 제천대성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저강렵은 방어가 불가능하자 도주를 시도했지만, 그걸 봐줄 제천대성이 아니었다.
제천대성이 허우적거리는 저강렵의 정강이를 여의봉으로 몇 번 매질을 하자 저강렵은 참지 못하고 꺽꺽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끄흑, 손 형! 어찌 나한테 이러…….”
“다물어.”
제천대성은 아직 백 대를 마저 못 때렸는지 다시 여의봉을 휘둘렀다.
압도적인 무력 차에 전원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여기에 있는 이들은 저 둘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둘의 기원은 서유기의 손오공과 저팔계.
서유기 속에서 묘사된 둘의 역량 차이는 명확했다.
서유기 속의 저팔계는 손오공의 무력에 미치지 못했다.
수중전이라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으나, 이곳은 지상이고 지금 저강렵에게는 상보심금파가 없었다.
그래서 둘이 차이가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으나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둘 다 12지 동맹 수장이라 그래도 비슷할 줄 알았는데!’
‘승산이 전혀 없다, 저강렵은 제천대성을 이길 수 없어!’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는데 제천대성이 봐주고 있는 게 아닌가?’
총대장의 구타 장면을 지켜보는 천계의 수군 사이에서 동요가 퍼져 나갔다.
제아무리 은하수를 지키던 천계의 수군이라고 해도 결국은 병졸이었다.
장수가 적에게 붙잡혀서 시원하게 처맞는 꼴을 보고 있으면 지휘 체계는 엉망이 되고 사기는 바닥을 치고 만다.
반격은 고사하고 방어도 제대로 못 하는 저강렵을 보고 사기를 올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 저강렵 장군을 구해라! 이쪽의 숫자는 800이다! 여기는 호족의 신역, 제천대성이 제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는 없…… 억!”
빠아악!
호기롭게 외친 진족의 뒤통수에 여의봉이 꽂혔다.
제천대성의 본체가 저강렵을 패는 사이 견제만 하고 있던 분신 중 하나가 800 수군을 향해 외쳤다.
“대장이 맞고 있으면 부하도 맞아야지. 딱 대.”
괜히 어그로를 끄는 소리를 해 긁어 부스럼을 만든 진족을 원망스럽게 보는 시선이 쏟아졌다.
방금 도발한 진족은 저강렵의 부하로서 당연한 소리를 한 셈이었지만, 힘과 폭력 앞에서 상식과 논리는 통하지 않는 법이었다.
퍽! 빠각! 펑!
제천대성의 분신들이 여의봉을 휘두르자 800 수군이 혼비백산하였다.
저강렵에 비해선 맷집이 약한 건지, 수군들은 여의봉 두세 방에 곤죽이 되었다.
특히 제천대성은 자신을 향해 입을 놀렸던 이의 이빨을 모조리 박살 내 버렸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청룡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외쳤다.
“전원 공격! 도망치는 수군을 공격한다! 은광고의 결계에서 거리를 두고 노려야 한다!”
“네!”
제천대성의 분신들은 800 수군의 대열 속에서 번개처럼 날뛰었고, 용족들은 도망가는 이들을 남김없이 격추시켰다.
일방적인 섬멸전이 전개되는 동안에도 저강렵은 여의봉으로 얻어터졌다.
화르르륵! 퍼억! 퍽! 퍽!
저강렵은 제가 모아온 800 수군이 무너지는 광경을 아득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팔계야, 넌 맞는 거에 집중해야지.”
섬뜩한 소리에 저강렵이 급히 몸을 비틀었다.
퍽!
저강렵은 여의봉으로 눈 바로 옆, 관자놀이를 얻어맞았다.
만약 조금만 늦었다면 눈알에 여의봉이 날아들었을지도 모른다.
저강렵은 욱신거리는 온몸으로 떨었다.
이렇게 얻어맞아 본 건 아득하게 먼 옛날 이후였다.
얼마 전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진족 여성에게 배를 꿰뚫리긴 했지만, 몇 번 찔리는 것과 백 대를 얻어맞는 건 결이 달랐다.
‘그때보다 더 굴욕적이고 더 아프…… 잠깐만.’
회복을 위해 이능파를 운용하던 저강렵은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저강렵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패는 손오공이 복부는 내버려 두고 있었다.
저강렵의 체형을 고려하면 복부를 패는 게 타격감이 좋을 텐데, 왜 배는 때리지 않고 내버려 두는 걸까?
저강렵은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왜, 왜 배는 안 때리는…….”
“그 부위는 남겨 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아쉽게 됐다.”
제천대성은 저강렵의 멀쩡한 배를 보며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저강렵은 저 말을 듣고 누군가가, 제천대성에게 저런 부탁을 할 만한 유력자가 저를 패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강렵이 경악해서 물었다.
“대체, 누, 누가!”
“맞고 이야기하자고 했잖아.”
방금 묻는 말에 대답을 한 건 손 형이지 않소!
……라고 저강렵이 외치려 했다.
뻐어억!
그러나 여의봉이 뺨을 강타하는 바람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저강렵은 억울함과 고통에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지금까지 저강렵이 흑막 측에 가담하여 저지른 악행을 고려하면 맞아도 쌌지만, 그는 그저 억울하게 느꼈다.
저강렵의 억울함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잠깐, 그런데 방금 백 대를 다 맞지 않았나?’
저강렵이 그런 의문을 품었으나, 제천대성은 아직 여의봉을 더 휘두를 생각인 듯했다.
“백 대 다 때렸나? 아니, 내가 잘못 셌을 수도 있으니까 넉넉하게 열 대만 더 맞자.”
“소, 손 형!”
퍽! 퍼억!
제천대성이 누구를 패는 횟수를 잘못 셀 리가 없는데 그냥 열 대를 더 때리고 싶었나 보다.
결국 저강렵은 백열 대를 맞은 후에야 매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강렵은 흠씬 얻어맞아 설 힘도 없어 땅바닥을 굴러다녀야 했다.
제천대성은 눈을 가린 안대 너머로 저강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저강렵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손 형이 안대를 써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건 처음이다!’
직접 보지 않아도, 지금 제천대성이 얼마나 싸늘하고 차가운 눈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제천대성은 먼 옛날부터 악행에 관해 자비가 없었다.
평소 다혈질인 제천대성이 얼마나 냉정하게 적을 바라보는지 잘 알았다.
만약 그 눈이 저를 향하고 있는 걸 직접 봤다면 저강렵은 두려움에 눈물을 흘렸을지도 몰랐다.
“무지기가 어디 있는지 알고 그랬던 거냐?”
제천대성은 저강렵을 패기 전에 던졌던 질문을 다시 했다.
저강렵은 제천대성이 그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를 모를 정도로 우둔하지 않았다.
저강렵이 여태까지 모셨던 그자가 무지기에게 손을 댄 게 분명했다.
‘하늘을 무서워할 줄 모르는 자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 정도로 무모할 줄은 몰랐구나!’
저강렵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저강렵이 그자를 위해 여태까지 획책하고 꾸민 것들은 실패하였다.
그래서 이번에 공을 세우겠다고 아득바득 수군을 끌어모아 호족의 신역에 쳐들어왔다.
그러나 그 수군은 제천대성과 용족의 손에 산산이 흩어지게 되었다.
은광고에 잠입시킨 비리 교사들은 전부 색출되었고, 은광고의 지맥을 전부 끊지 못했고, 적호를 죽이지도 못했고, 키모폴레이아호에서 차기 총수들을 암살하지도 못했다.
살인과 살인 미수에는 거대한 차이가 있었다.
어쨌든 악행인 건 마찬가지였으나, 모든 것이 실패했기에 어쩌면 모든 게 들통나더라도 제천대성만큼은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무지기가 연관된 이상 이야기가 달랐다.
‘손 형이 나를 용서하지 않겠군.’
저강렵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저강렵의 궁극적인 목표, 정단사자직까지 버리며 이런 계획에 가담한 이유가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때 그자는 제천대성을 회유할 것을 권한 적이 있었다.
―제천대성에게 말을 붙여 봤나?
―크, 크흠. 물론입니다요! 하지만 손 형은…… 그걸 원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자는 몹시 신중하여 제천대성을 바로 계획에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계획의 전모를 밝히지 않은 채, 저강렵을 경유해 은근히 제천대성에게 말을 붙였다.
그러나 제천대성은 저강렵과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기에 회유할 수 없었다.
그자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제천대성의 회유는 어렵겠군. 계획을 흘렸다가는 가담은커녕 방해하려 들 것 같으니 배제하는 게 좋겠어. 수를 써서 부하로 삼는다 한들, 언젠가 제천대성은 반드시 제 뜻을 관철해 움직일 테지.
―…….
저강렵은 그자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머릿속이 텅텅 비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야 저강렵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자는 저강렵의 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달래듯이 덧붙였다.
―제천대성이 원치 않더라도, 막상 그 상황이 닥치면 그는 네 소원대로 움직일 것이다. 제천대성은 애초에 서천취경(西天取經)의 여행을 자진해서 떠난 게 아니다.
저강렵은 그자의 말대로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이런 어리석은 짓을 거듭해 온 거다.
“무지기의 행방을 물었을 때, 네가 이상한 소리를 했었지.”
제천대성도 그때 저강렵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이 세계의 섭리가 무너지고 혼란이 닥치면, 다시 우리의 여행이 시작되지 않겠냐고.”
여행이라는 말에 저강렵이 주먹을 꽉 쥐었다.
여행을 마치고 정단사자가 되어 신의 자리에 오른 저강렵은 공허했다.
그 고단하고 지루하고 힘든 여행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자는 어그러진 세상과 여행을 약속했다.
“까마귀 가면은 상보심금파로 본 네 속이 텅텅 비었다고 하더군. 그게 네가 타락한 이유라고 생각했더니, 곧바로 그 여행 운운했던 게 떠올랐지.”
“……손 형은 다르단 말이오?”
서천취경을 마친 이들은 상위 존재에 봉해졌다.
전단공덕불(旃檀功德佛)이 된 삼장법사.
투전승불(鬪戰勝佛)이 된 손오공.
금신나한(金身羅漢)이 된 사오정.
팔부천룡(八部天龍)이 된 백마, 옥룡삼태자.
성대한 결말에 기뻐한 것도 잠시였다.
여행의 끝은 공허했다.
저강렵은 상위 존재가 된 이들과 그 엉망진창인 여행을 떠날 일이 다시는 없을 거란 걸,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손 형은 그 공허를 느낀 적이 없단 말이오?”
원족 대부분은 상위 존재가 되거나 깊은 잠에 빠졌다.
게다가 후예도 없다.
그래서 제천대성은 이계 충돌을 틈타 잠시 상위 존재 자리를 내려놓고 이 세계에 남아 있던 동생, 무지기를 찾으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제천대성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왜……!”
“팔계야, 우리의 여행은 끝났다.”
제천대성의 단호한 말에 저강렵의 말이 막혔다.
“이제 다른 이들의 여행을 지켜볼 때다. 나는 그렇게 내 안의 공허를 채우고 있다.”
제천대성의 말은 저강렵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저강렵은 땅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말을 더듬었다.
“손 형, 나는…….”
눈앞에서 자신을 내려보는 제천대성.
하늘 위로 후퇴하는 수군과 이를 추격하는 용족.
그리고 동결형 이계의 영향을 받고 있는 은광고의 결계.
이를 찬찬히 보던 저강렵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인정할 수 없소!”
파아아앗!
저강렵이 그렇게 외치며 옷 소매에 숨기고 있던 아이템 카드를 실체화시켰다.
그 순간, 성에가 은광고를 크게 뒤덮기 시작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