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긴 꼬리 (4)
은광고 서문 쪽.
권제인이 나비를 막 발견한 시점.
나비가 사라질 즈음에는 돈족의 권속도 대부분 토벌되어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영원의 호수 팀에서 선별한 공격대를 모아 이능독 해독제를 먹고 이계를 공략할 차례였다.
그러나 권제인은 자취를 감춘 나비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마치 사라진 나비가 권제인의 머리 안에서 날아다니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번에는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권제인은 맨체스터 대이계 공략 때 나비령이 부린 술수를 떠올렸다.
나비령은 권제인을 살린답시고 그녀를 따로 고립시켜 뒀다.
그 결과, 권제인은 가족과 팀원들을 잃었다.
그 공략 중에 권레나의 부모도 전사했다.
마침 연주가 끝나 팀원들의 손이 멈췄다.
재러드 리가 연주를 마치고 멍하게 서 있는 권제인에게 말을 걸었다.
“제인아, 이제 여기는 정리된 것 같으니 공략 준비를 하자.”
그때였다.
파아아앗!
동문 방향에서 강렬한 이능파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 자리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저도 모르게 놀라 동쪽을 바라볼 정도였다.
“강렬한 이능파야……! 동쪽에서 오고 있다!”
“동쪽은 용족이 담당한 곳 아닌가요?”
“용족도 제지하지 못한 사태가 터졌나 보군!”
모두의 시선과 관심이 동문 쪽에서 온 정체불명의 이능파, 저강렵이 아이템을 통해 발산한 이능파에 쏠려 있는 가운데.
권제인이 홀로 나비령의 권속이 사라진 대나무 숲을 응시하고 있었다.
권제인은 대나무 숲에 관해 생각했다.
‘은광고는 조경이 좋아서 재학 중에 여기저기 돌아다녔어. 학교 주변도 물론. 하지만 저 대나무 숲의 존재는 몰랐어. 천익산과 이어져 있으니까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방금 권제인은 대나무 숲을 보고도 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학교 가까이에 대나무 숲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권제인은 그 사실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다.
권제인은 자신의 기억력과 지금 발견한 대나무 숲 그리고 이능에 관한 지식을 동원해 저 풍경을 분석했다.
‘기억을 되짚어 봐도 원래 저 공간에 무엇이 있었는지 떠올릴 수 없어. 그동안 나는 저 대나무 숲을 눈으로 보고도 머릿속에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없었던 거야.’
즉, 저 대나무 숲은 권제인 정도 되는 플레이어조차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었다.
우연히 발각되더라도 권제인이 특별하다고 인식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운 형태로 위장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권제인은 이 학교의 배후에 호족이 있다는 점을 새삼 떠올렸다.
‘나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 공간이라면 호족에서 관리 중인 곳일 거야.’
그 공간을 굳이 나비령이 짚어 줬다는 건, 곧 무슨 문제가 발생하리라는 뜻이었다.
권제인의 예상대로 그 문제의 상황은 바로 닥쳤다.
강렬한 이능파가 서쪽에서 쏘아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나무 숲과 맞닿아 있는 학교 결계에서 성에가 퍼지기 시작했다.
쩌저적, 쩌저적…….
새하얀 성에가 눈꽃 모양으로 결계 위에 수놓아지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아무런 위협이 없는 상황이었다면 권제인이 얼어붙는 서리를 위해 노래하는 곡을 연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얀 성에는 냉기와 악의로 뒤범벅된 채로 은광고를 노리고 있었다.
“결계가 얼어붙고 있어!”
“학교 안은 어떻게 되는 거야! 레나는!”
“레나는 오늘 따뜻하게 입었나……? 괜찮을까?”
권레나의 이름이 나오자 권제인의 집중력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여전히 권제인의 시선은 대나무 숲에 꽂혀 있었다.
거리는 둔 상태였으나 권제인 정도 되는 플레이어가 온 신경을 집중하니 이상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상해. 저 성에의 냉기는 밖이 아닌 안으로 향하고 있어. 하지만 대나무 숲이 얼어붙는 것 같아.’
성에의 냉기는 안으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대나무 숲이 천천히 얼어붙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대나무 숲 주변에 있는 성에만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성에는 이능파를 매개로 그저 냉기를 뿌리며 결계를 덮어 가고 있었다.
서문 쪽을 노린 듯,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이능파를 쏘긴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그 광경을 본 권제인은 어느 결론에 도달했다.
‘대나무 숲은 학교 안과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학교 안을 향하는 냉기가 새어 나와 연결되어 있는 대나무 숲을 얼리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았다.
앞뒤가 맞지만 의문은 남았다.
‘그렇다면 대체 왜?’
성에로 결계를 덮은 건 내부에 있는 학생들을 냉기로 공격할 겸, 내부와 외부의 차단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고 치자.
그런데 왜 굳이 서문 쪽을 향해 이능파를 쏜 걸까.
어차피 성에의 냉기는 내부를 향하고 있고 학생들은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니 아무 쪽이나 노려도 상관없을 텐데.
사람이 많은 쪽이라 하면 정문인 남문 쪽을 노려야 하는 게 우선이 아닐까.
적은 서문 주변부터 얼려야 할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그 이유가 저 대나무 숲이 아닐까. 대나무 숲은 학교와 이어진 연결 통로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
호족이 대나무 숲과 학교 사이의 연결 통로를 철저히 은폐하였지만, 이렇게 냉기가 새어 나가는 바람에 그 연결 통로의 존재가 드러났다.
냉기가 흐르는 방향을 따라가면 두 연결 통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적은 하나의 수로 세 개의 효과를 얻은 셈이다.
냉기로 학교를 공격하고, 대나무 숲을 얼리고, 연결 통로까지 찾아낸다.
어쩌면 권제인이 파악하지 못한 노림수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비밀이 있다면 그건 분명 호족과 관계가 있겠지.’
쩌저적, 쩌적…….
그 와중에 성에는 은광고의 결계를 전부 뒤덮을 기세로 무섭게 뻗어 나갔다.
대나무 숲도 마찬가지로 얼어 가고 있었다.
혼란한 상황이라서 그런 건지, 아직도 대나무 숲을 은폐한 힘이 유효한 탓이라 그런 건지 권제인을 제외한 영원의 호수 팀원들은 대나무 숲에 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권제인이 동결형 이계 공략에 나서려는 재러드 리에게 말을 걸었다.
“재러드, 공격대의 통솔을 맡길게.”
“……제인아?”
재러드 리가 흠칫 놀라 권제인을 돌아봤다.
권제인은 보통 재러드 리가 예상하지 못한 사고를 치기 전에 이렇게 그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곤 했다.
재러드 리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나는 저 대나무 숲으로 가 봐야겠어.”
“제인아! 그게 무슨……!”
재러드 리는 저도 모르게 목 뒤를 부여잡았다.
권제인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저곳은 학교 안과 이어진 통로가 있을 가능성이 있어. 이계 공략의 전력은 충분하니까 학교 진입을 노려도 괜찮을 것 같아.”
“그, 그렇지만 학교 진입은 공략을 전부 마치고 그런 게 아니었어? 그렇잖아? 그렇니?”
재러드 리는 당황한 나머지 의미가 통할 듯 말 듯 한 미묘한 한국어를 섞어 발언했다.
그 말을 대충 알아들은 권제인이 답했다.
“나비가 나타났어.”
“……!”
권제인과 재러드 리 주변에 있던 간부들이 그 나직한 말을 듣고 몸을 굳혔다.
나비가 나타난 곳에는 늘 사건이 터졌다.
하지만 나비령은 유용한 힌트를 남기거나 권제인이 안전해지는 길로 유도하곤 했다.
나비령의 개입에 관해 알고 있는 영원의 호수 간부진은 그래서 늘 갈등하였다.
권제인은 나비령을 혐오하고, 증오하여 나비령이 남긴 힌트를 발견할 때마다 이를 받아들일지 망설인다.
하지만 나비령은 권제인의 가족이나 영원의 호수 팀원들이 죽건 말건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권제인만은 살리려 든다.
권제인을 위해서라면 그 힌트를 따르게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게 영원의 호수 팀원 간부진들의 주요 고민이었다.
그러나 재러드 리의 생각은 달랐다.
‘더 이상 제인이가 슬퍼하게 할 수는 없어!’
나비령의 말을 따라 권제인이 안전해지더라도 그녀는 전혀 행복해질 것 같지 않았다.
나비령은 재러드 리는 물론, 권레나의 목숨도 아무렇지 않게 희생시킬 진족이다.
재러드 리는 권제인을 막기로 했다.
“나비가 나타난 자리에 절대로, 제인이 혼자 보낼 수 없어!”
“재러드.”
권제인의 푸른 눈이 재러드 리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곧은 눈빛에서 느껴지는 박력에 재러드 리가 움찔했다.
권제인은 이미 마음을 단단히 굳힌 것 같았다.
어떻게 말려야 할지 재러드 리는 속이 먹먹해졌다.
그 순간,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그래요. 가지 마세요.”
파앗! 휙!
재러드 리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과 권제인 사이를 막아서고, 영원의 호수 팀원들이 이능 악기나 무기 아이템을 손에 들었다.
목소리는 제법 거리가 있는 곳에서 들렸는데, 저 음성의 주인은 귀가 밝은지 지금 권제인과 재러드 리의 대화를 전부 들은 듯했다.
“누구십니까!”
재러드 리가 딱딱한 한국어로 힘차게 묻자 그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누군가는 온통 검은색 일색인 파티시에 옷을 입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흰색 기조를 하는 파티시에 옷과 달라 일순 저게 파티시에 옷인지 바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서문에서 MITRON을 운영하고 있는 파티시에, 류장이라고 합니다.”
갑자기 등장한 파티시에의 존재에 어리둥절했지만, 여기에 있는 이들은 그 MITRON이라는 가게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권레나는 주로 수제 음식을 선물했지만, 가끔은 MITRON에서 나온 한정 메뉴를 같이 먹고 싶다면서 사 들고 왔기 때문이다.
권레나가 사 주는 거라면 뭐든 맛있었겠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MITRON의 제품들은 하나같이 일품이었다.
‘……그런데 MITRON의 파티시에가 왜?’
MITRON은 서문에 위치해 있으니 이 난리에 휘말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왜 굳이 영원의 호수 팀에서 발생한 일에 끼어드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오늘은 날이 추울 거라고 해서 휴업할 예정이었는데, 제가 모시는 분은 의견이 달라서요.”
류장의 말은 하나같이 이상하고 묘했다.
모시는 분은 대체 누구이고, 뭘 말하고 싶어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분은 원래 말수도 적고, 개입을 꺼리는 분이시지만 이번만큼은 최고의 환경에서 방관을 즐기고 싶다 하셨죠. 겸사겸사 어떤 아이에게 도움을 주기로 했어요.”
류장이 말한 ‘어떤 아이’라는 말에 불현듯 권제인의 머리에 권레나의 반 친구가 떠올랐다.
권제인과 작전을 논하던 은광고의 학생, 조의신이었다.
“여차하면 저도 이계 공략에 협력할 생각입니다만…… 전력은 충분한 것 같네요.”
“시간을 끌려는 건가요? 바로 본론을 말하지 않으면, 그쪽 말은 듣지 않겠습니다.”
류장이 본론을 꺼낼 생각이 없어 보이자 권제인이 딱 잘라서 말했다.
권제인의 차가운 말투에 저도 모르게 움찔한 영원의 호수 팀원도 있었는데, 류장은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조의신의 전언입니다. 대나무 숲에서 일어난 사건은 조의신이 직접 손을 쓸 테니 이계 공략에 집중해 달라고 하네요.”
조의신이라는 말에 권제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류장의 말은 계속되었다.
“당신이 오면 힘으로라도 막아 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일단 말로 막아 보려고요.”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