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긴 꼬리 (5)
은광고 안.
천익산에서 대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길.
나무 중에 드문드문 대나무가 섞여 있어 죽림에서 꽤 가까운 곳으로 추정되는 곳.
숨을 잘못 들이켜면 입안이 얼 것 같은 추위 속에, 나와 지익회 사람들 외에도 누군가가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올린 건 흑막의 존재였다.
‘벌써 그들이 와 있나? 내 수대로라면 아직 그들은 죽림 쪽을 공략하고 있을 텐데. 무엇보다 이렇게 쉽게 기척을 발견할 리가 없어.’
인기척을 느낀 직후부터 내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현재 이 시각에 이곳에 나타나고, 또 지익회에게 기척을 들킬 만한 존재는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서문 쪽에 두었던 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호족들이 황지호의 명령을 어기고 이쪽으로 오지는 않았겠지. 영원의 호수가 죽림을 통과해서 왔을 가능성은 낮아. 걱정은 되지만.’
은광고의 네 출입구에 각각 배치한 이들 중, 가장 불안한 쪽을 꼽자면 단연 영원의 호수 쪽이었다.
베테랑 중의 베테랑 송만석이 이끄는 한강 싸이클링 팀과 홍경복, 탁거산 쪽은 안정적일 것이라 예상했다.
용족 쪽은 저강렵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으니 걱정은 됐지만, 제천대성을 믿기로 했다.
붉은 사자도 딱히 별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영원의 호수는 달랐다.
영원의 호수가 저들에 비해 약하거나, 통솔력, 팀워크가 부족한 건 아니지만 나는 그 불안 요소를 눈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 불안 요소는 푸른 바이올리니스트, 권제인이었다.
권제인들의 팬들이 알면 한 대 얻어맞을 생각이었지만, 이 판단은 경험에 근거한 결과다.
‘이 세계에서 권제인이 두 번이나 흔들리는 걸 봤으니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첫 번째는 석촌 호수의 수중 이계를 공략한 후, 나비령과 마주쳤을 때.
나비령은 권제인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맨체스터 대이계 공략 당시, 수작을 부렸다고 고했다.
―[당신이 살아남더라도 다시는 바이올린을 켤 수 없는 몸이 됐을지도 몰라. 당신 정도의 플레이어, 바이올리니스트는 쉽게 나오지 않아. 그때 죽은 사람들은 우수한 편이었지만 얼마든지 대체할 만한 인력이 존재해.]
―대체라니······!
―[아직도 당신을 뛰어넘은 바이올리니스트는 없고, 지금 영원의 호수는 새 팀 메이트를 맞이해 문제없이 잘 운영되고 있잖아?]
―내 어머니, 오빠, 친구······ 그분들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어, 앞으로도 없을 거야!
나비령과 권제인이 그런 대화를 나눈 직후, 권제인은 폭주 기미를 보였다.
권제인이 전신에서 푸른 이능파를 뿜는 동안 팀원들이 아무리 말을 걸어도 그녀는 진정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 있던 황지호가 권제인의 이능파를 강제로 억누르지 않았다면 분명 폭주를 일으키고 말았을 것이다.
권제인이 매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 건 한 번 더 있었다.
청소년 수련회 당시, 그녀가 바다의 벽을 상대할 때였다.
바다의 벽을 마주하여 수면의 요영으로 그 전진을 막던 중, 나비령이 등장했다.
‘탁거산이 나비 모양의 요물을 발견했다고 했지. 그 직후에 권제인의 집중력이 흐트러졌고. 그때 나비령이 수작을 부린 걸 거야.’
문새론이 남긴 영상 기록을 확인해 보면, 권제인의 연주 페이스가 갑자기 무너졌을 때가 있었다.
아마 그때 나비령이 권제인에게 무슨 말을 하여 연주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 듯했다.
그 자리에 있던 권레나가 즉흥 합주를 하여 다시 권제인이 연주를 할 수 있도록 돕지 않았다면 피해가 커졌을 것이다.
이번에는 그때와 달리 재러드 리와 영원의 호수 팀원들이 동행하지만, 권제인이 무너지거나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강경하게 그녀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 두 사건과 영원의 호수 상황을 생각해 봤을 때, 권제인에게는 나비령이라는 불안 요소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비령은 이번 크리스마스에 흑막의 부하로서 움직일 것이다.
나비령은 흑막의 계획을 방해할 생각이지만, 흑막의 신뢰를 위해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내려 할 게 뻔했다.
‘그 두 사건 다 나비령이 개입했어. 그리고 나비령은 이번에도 끼어들 가능성이 커.’
흑막보다 나비령의 움직임을 읽는 게 더 까다로웠다.
흑막의 목적보다 나비령의 생각이 불명확하기 때문이었다.
나비령이 흑막의 계획을 방해하려는 건 확실하지만, 대체 어디까지 방해할 생각인지 이를 위해서 얼마나 희생할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비령은 권제인 하나는 살리려 하겠지만, 말 그대로 살리려 할 뿐이지 그녀의 정신적 고통이나 다른 사람들이 입을 피해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전에 수를 두기로 했다.
그게 권제인을 서문에 배치한 이유였다.
―조의신, 너는 권제인이 가장 불안정한 요소라고 판단했으면서도 영원의 호수를 서문 쪽에 배치했다. 죽림이 노려질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크리스마스 전 작전 회의 당시, 황지호는 그렇게 말하며 배치에 의문을 표했다.
황지호가 의문을 품는 건 합당했다.
위험한 자리에 불안 요소를 배치하는 건 악수(惡手)니까.
하지만 다른 수가 보조를 해 준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저것을 악수라고 판단해 적이 노리고 올 것을 대비할 수 있으니, 호수(好手)로 바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사람을 하나 더 배치할 거야. 권제인 선배님이 흔들려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로.
―권제인을 말릴 만한 이는 적다. 그런 강력한 수를 오로지 권제인을 말리는 데에 쓰는 건 효율이 나쁠 거다.
그건 황지호의 말대로였다.
흑막의 온갖 수가 쏟아지고 있어 내가 손에 쥔 수를 적재적소에 배치해도 부족할 판이니까.
하지만 얼마 전 꽤 괜찮은 수를 손에 넣었다.
―함께 싸워 주지는 않을 것 같은데, 도움은 주겠다는 상대가 서문 쪽에 있어. 권제인 선배님을 그쪽에 배치하면 그 상대한테 도움을 청하기 쉬울 거야.
그 상대의 정체는 바로 MITRON의 파티시에, 류장이었다.
까마귀 마왕 시델렌티움은 그동안 내가 가면 너머로 보여 준 광경과 직접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크리스마스에 무슨 일이 터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시델렌티움은 이 모든 걸 알고도 침묵하고, 방관할 예정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무슨 변덕인 건지 시델렌티움은 류장을 통해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이야기를 잘 들어 보니 도움을 준다기보다는 일종의 거래처럼 들렸지만.
―도움을 주마. 일종의 선의라고 생각해도 좋다. 단, 조건이 있다.
대뜸 불러내서 그런 소리를 한 시델렌티움이 말했다.
조건이 있으면 선의나 도움이라고 할 수 없지 않나?
그래도 온갖 마신의 사제가 학교 안에서 날뛸 텐데, 마족 중 하나인 시델렌티움이 이쪽에 손을 내민다는 건 나름 큰 결심을 한 결과일 거다.
시델렌티움이 어떤 식으로든 개입했다는 걸 알면 마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큰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렵겠네.’
시델렌티움에게는 2학년 때 발생할 시나리오를 대비해 ‘마계의 길잡이’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만약 시델렌티움이 이번 사건으로 그 개입이 공공연하게 드러나 마족들과 싸우게 되어 입지가 위태로워진다면, 마계의 길잡이도 없어지는 셈이다.
다시 마계의 길잡이를 구할 방법은 요원하니, 시델렌티움의 개입이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거래를 성립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가 도움을 주는 대신 학교 안에서 혼자 행동할 때에는 까마귀 가면을 쓸 것. 어떠냐?
시델렌티움은 학교 안 상황이 매우 신경 쓰였나 보다.
나는 마침 권제인 쪽에 배치할 수를 모색하던 중이었기에 알았다고 했다.
그 결과, 시델렌티움을 모시는 자인 류장이 나서기로 했다.
류장 정도면 권제인의 발목을 잡을 수 있고, 그가 영원의 호수 사이에서 움직이는 것 정도라면 시델렌티움의 존재가 쉽게 표면 위로 떠오르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불안 요소는 해결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내가 그 누군가의 정체에 관해 고심하고 있을 때.
바스락.
인기척을 느끼고 정지한 지익회 사람들을 향해 쪽지가 날아왔다.
쪽지는 비행기 모양으로 접혀 있었다.
누군가는 이능파로 바람을 만들어 이쪽으로 날린 듯했다.
‘……이런 짓을 하는 걸 보니 적은 아닌 것 같군.’
성시완도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다소 긴장이 풀린 얼굴로 쪽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권법을 사용하기 위해 보호대와 장갑을 낀 성시완의 손이 쪽지를 폈다.
소리 없이 그 내용물을 확인한 성시완의 얼굴이 굳었다.
성시완은 자신이 확인 후, 그 내용이 잘 보이도록 지익회 사람들에게 쪽지를 보여 줬다.
쪽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도망쳐라, 저 너머에 진족들이 있다.]
나와 지익회 사람들이 감지한 누군가는 진족의 정체를 알아챈 듯했다.
나는 그 진족에 관해서 감이 잡혔다.
‘혹시 긴 꼬리의 부하들을 만난 건가.’
저 너머는 아마 지금 한기의 중심으로 추정되는 대나무 숲을 가리키는 듯했다.
진족이 있다는 말에 지익회 사람들이 긴장했다.
한기의 근원에 있는 진족을 조심할 것.
이 말에 추정되는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진족이 우리 학교를 노리고 있던 걸까?”
성시완이 복잡한 표정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성시완은 아마 머릿속에서 학생회와 선도부의 비밀 결사에 얽힌 이야기를 생각하는 듯했다.
성국언도, 옛 한국 지부장도 진족을 경계했다.
그들은 어느 진족이 한반도를 노리고 있으며 그 시작이 은광고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긴장된 공기가 가시지 않은 가운데, 갑자기 훈훈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단순히 공기만 따뜻해진 게 아니었다.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고, 따사로운 온기가 결계를 덮어 성에를 지워 가고 있었다.
‘성에가 퍼져 나가는 게 멈췄다. 밖에서 누군가 손을 쓴 거야!’
여기에 있는 모두가 하늘에서 내려온 세 줄기의 빛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죽림 쪽에서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피부가 저릿해지는 기분과 함께 경고 메시지가 울렸다.
<경고, 에너미가 접근 중입니다.>
경고 메시지는 에너미의 접근을 알렸지만, 에너미만 접근한 건 아닌 듯했다.
이 기운은 분명, 진족이었다.
수가 한 둘이 아니었다.
죽림에서 일을 벌이던 이들이 성에가 가라앉고, 결계의 불안정한 상태가 진정되자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이쪽으로 온 듯했다.
“도망쳐요. 어서!”
내가 서둘러 신호를 보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진족이 이쪽을 알아챈 듯, 매서운 이능파와 살기를 날렸다.
그 독한 살기에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지익회 학생도 있었다.
그 순간, 폭발음이 울렸다.
퍼어엉! 콰아아앙!
바닥에 파묻혀 있던 폭탄이 터진 듯, 흙먼지와 파편이 여기저기에서 날렸다.
갑작스러운 폭파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에이, 씨…… 도망가라고 했잖아!”
“하, 원래 저 함정은 담임한테 쓰려고 했는데…….”
한심한 말이 들려오는 방향을 보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그들은 높은 나무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익숙하긴 한데, 몸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잠깐 안 본 사이에 또 근육을 키웠는지 두터운 겨울옷 너머로도 몸집이 달라진 티가 났다.
‘우리에게 메시지를 남긴 건 저놈들이었구나!’
천익산을 헤매는 문제아들.
은광고를 대표하는 문제아 집단이자 강한 담임에게 늘 지고 있는 패배자들.
3학년 0반 선배놈들이 나타났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