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28화 (624/925)

84. 긴 꼬리 (7)

성에가 퍼지고 있던 시점의 은광고.

1학년 건물, 교무실 안.

김신록은 결계가 펼쳐진 교무실 창문 너머로 성에가 퍼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은광고 결계 속 시간은 바깥보다 열 배 느리게 흐르기 때문에 성에가 퍼져 나가는 게 느리게 보였으나, 그만큼 냉기를 견뎌야 하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얼어붙는 하늘을 보며 김신록은 학생들을 걱정했다.

고작 이 정도 추위에 당할 아이들이 아니었으나, 냉기 속에서 에너미와 싸워야 하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가능하다면 대신 싸워 주고 싶었지만, 지금 김신록이 가면 오히려 위험해질 게 뻔했기에 이렇게 따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김신록은 역용술을 사용해 본래의 외모를 숨겼으나, 혹시라도 웅족과 마주치면 바로 후예임을 알아보고 공격하러 올 테니까.

김신록은 수심 어린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다인이는 중앙 구역에 잘 도착했을까? 지익회 아이들은 무사할까? 그리고 저 망할 용은…….’

수많은 걱정이 쏟아지는 가운데, 김신록의 심기를 가장 어지럽히는 건 바로 옆에 있는 친우의 존재였다.

용제건은 언제 피를 토했냐는 듯 쌩쌩했다.

아직 소원을 빈 여파가 남은 건지 평소보다 이능파가 부족해 보이기는 하지만, 용제건의 기분이 매우 좋은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신격이 오른 탓인지 컨디션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신격이 오르면 눈을 가려도 앞이 훤히 보이고, 오히려 오감의 발달로 세상이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던데 용제건은 지금 그 감각을 실컷 맛보는 중인 것 같았다.

지금 용제건의 눈을 가리고 있는 저 눈가리개를 볼 때마다, 김신록은 그의 피로 젖은 어깨가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부터 저 눈가리개를 준비한 걸까.’

용제건이 착용한 눈가리개는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금실로 치장된 눈가리개에는 용 모양의 수가 정교하게 놓여 있었고, 옥색의 실로 마감되어 있었다.

디자인을 고려해 봤을 때, 저 눈가리개는 용제건을 위해 준비된 물건 같았다.

그리고 눈가리개의 성능이나 질을 미루어 보면 하루 이틀 만에 구할 물건은 아닌 듯했다.

용제건이 정말 오래전부터 승천의 준비를 해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김신록의 기분은 바닥에 떨어졌다.

‘계속 들고 다닌 것 같은데, 나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어.’

마치 언제든 미련 없이 하늘로 갈 준비를 하기 위해 저 눈가리개를 소지하고 다닌 걸까.

신격이 눈에 보이게 오르자 냉큼 품에서 눈가리개를 꺼내 쓴 용제건의 뻔뻔함에, 김신록은 화가 난 건지 슬픈 건지 짜증 나는 건지 모를 심정이 되었다.

김신록의 속이 터지는 동안 용제건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밖에 무슨 일이 있나 보다. 청룡과 염방열이 와 있는데도 이런 일이 터지다니. 적도 꽤 하나 보네.”

“…….”

“동하가 지정한 위치에서 일을 벌이는 진족도 있는 것 같고. 백호 씨는 잘 싸우고 있겠지?”

현재 백호를 비롯한 호족은 천동하가 광림으로 발견한 곳에 파견되어 싸우는 중이다.

웅족이 섞여 있을 가능성을 염려해 현재 김신록은 대기하는 중이다.

덤으로 김신록을 호위할 겸, 여의보주로서 소원을 이루느라 소모된 이능파를 회복할 겸 용제건도 그 옆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용제건이 지금 하는 꼴을 보면 소모고 뭐고 당장 나가서 싸워도 문제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한편, 김신록이 답변하지 않자 용제건이 그를 휙 돌아봤다.

눈가리개를 쓴 주제에 용제건은 김신록의 표정을 살피듯 빤히 그쪽을 바라봤다.

용제건은 듣는 이의 속을 긁는 특유의 말투로 말했다.

“학생들이 그렇게 걱정돼? 1반 아이들은 중앙 구역에 도착했을 거고, 상희랑 다인이는 적호 씨가 바래다준다고 했으니까 안전할 거고, 지익회 쪽에는 의신이가 있잖아. 괜찮을 거야.”

용제건이 얄밉게 웃으면서 말했다.

웃는다고 해도 입꼬리만 보여서 표정은 뭐라 단정 지을 수 없었지만, 김신록은 눈가리개 너머로 용제건이 웃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용제건이 남의 속도 모르고 저렇게 웃고 있는 걸 보니 한 대 쳐 주고 싶었다.

비상시가 아니었다면, 방금 피를 토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압정부터 던지고 생각했을 거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으므로 김신록은 투덜거리기만 했다.

“아이들은 당연히 괜찮겠지. 딱히 별생각 없는데.”

“이것도 아니면 또 무슨 걱정을 하는 걸까.”

별생각 없다고 답했는데도 용제건은 무슨 꼬투리를 잡은 건지 계속 물고 늘어졌다.

용제건은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결론을 냈다.

“아, 혹시 내가 바로 승천할까 봐 그래?”

김신록은 여전히 답하지 않았지만 몸이 흠칫 굳었다.

용제건은 그걸 알아보고 아주 황홀하게 웃었다.

보기 흉할 정도로 기분 좋게 웃을 때마다 접히던 눈이 조금도 보이지 않아 김신록은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걱정하지 마. 바로 가지는 않아. 아직 은광고의 일이 수습이 안 됐고, 용궁에서 해결해야 할 일도 있잖아.”

곧바로 하늘로 가지 않는다는 말에 안도하면서도 속이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그 일이 끝나면 승천하겠다는 뜻인 걸까?

김신록은 저도 모르게 용궁으로 가는 날을 속으로 세어 보았다.

용궁에서 큰일이 벌어지는 건 내년 음력 정월 초하룻날 즈음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한 달이 좀 넘게 남은 셈이다.

김신록이 머릿속으로 남아 있는 날을 시간으로, 분으로, 초로 환산해 그 숫자를 가늠하는 사이, 용제건이 계속 말했다.

“그리고 나와 신록이의 은인이 비는 소원을 들어줘야지.”

조의신이 계속 소원을 빌지 않는다면, 용제건은 현세에 남는 걸까?

하지만 김신록은 곧 그 생각을 접었다.

조의신은 승천을 원하는 용제건을 두고 그런 짓을 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조의신이 이루기 무리한 소원을 말할 것 같지도 않았고, 일부러 소원을 말하지 않고 버틸 것 같지 않았다.

용제건을 생각하는 이들을 위해 시간을 벌어 줄 것 같긴 했지만.

그때, 창문 너머가 빛으로 물들었다.

파아앗!

눈이 아릴 정도로 강한 빛은 따스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아니, 그런 온기가 느껴진다고 착각할 만큼 거대한 힘을 학교 안에 뿌린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것이다.

급히 창가로 뛰어간 김신록은 그 빛의 근원인 하늘을 올려다봤다.

결계를 뒤덮은 성에의 틈 사이로 열린 하늘과 하늘에서 내려오는 세 줄기의 빛이 보였다.

그 빛과 결계를 감싼 힘으로 인해 성에가 녹아 사라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 냉기와 성에를 지워 버리다니!’

저 정도의 힘은 기적이라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실제로 상위 존재가 기적의 형태로 현세에 개입한 결과물이었기에, 기적에 비유하는 건 이상한 말이 아니었다.

용제건도 김신록과 같은 판단을 한 듯, 기적에 관해 이야기했다.

용제건은 셋이라는 숫자에 짐작 가는 바가 있는지 동쪽을 응시했다.

“상위 존재가 기적의 형태로 개입했어. 이 정도로 힘을 사용하면 패널티가 상당할 텐데. 하나도 아닌 셋이라…….”

빛은 10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사라지고, 하늘이 닫혀 버렸다.

고작 몇 초 되지 않는 개입을 위해 상위 존재 세 명은 큰 각오를 해야 했을 것이다.

김신록은 용제건이 상위 존재가 되면 정말 만날 수 없겠구나, 하고 새삼 실감하였다.

*    *    *

천익산, 학교의 경계인 서쪽.

천익산의 산길 중 워낙 험해서 산짐승도 꺼리는 구역.

3학년 0반 선배놈 같은 괴짜들이나 오는 이곳에는 현재 나 하나였다.

‘이제 곧 오겠구나.’

3학년 0반 선배놈들의 함정에 걸려 우리를 놓치는 것은 물론, 제대로 된 거동도 하지 못한 채 허우적거려야 했던 진족들은 눈에 불을 켜고 학생들을 찾고 있을 것이다.

다짜고짜 공격부터 한 걸 보니 목격자를 전부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거고, 이젠 단순히 명령 때문이 아니라 보복을 위해서라도 학생을 없애려 들 것이다.

그리고 은신처 밖으로 나오거나 스킬과 아이템 등으로 몸을 숨기지 않은 건 나뿐이다.

그들은 3학년 0반 선배놈의 함정에 걸릴 만큼 허술하겠지만, 은신하지 않은 학생 하나 찾지 못할 만큼 무능하진 않을 것이다.

예상대로 곧 날 선 기운이 느껴졌다.

속으로 그 기운들의 숫자를 세 보았다.

그 수는 은신처에서 들었던 대로 일곱이었다.

함정을 경계하는 건지 이들은 모습을 숨긴 채로 거리를 두고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대치 상태를 길게 끌고 갈 마음이 없으므로 입부터 열기로 했다.

“저는 당신들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내 말을 들었을 텐데도 상대는 답이 없었다.

하지만 공격해 오는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경계심만 깊어진 듯했다.

학생 혼자 무방비하게 튀어나와 진족의 정체를 안다는 둥 해괴한 소리를 하면 함정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금 기다리다 보니 답변이 들려왔다.

“네가 우리의 정체를 안다고?”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은광고에는 학생 외에도 진족이 출현할 가능성이 있으니 행여 마주쳐도 정체가 바로 들통나지 않도록 목소리를 숨긴 모양이었다.

대놓고 은광고를 노렸던 마족이나 웅족 같은 다른 진족들은 몰라도 긴 꼬리는 정말 철저하게 자신을 숨겨 왔으니 저렇게 방비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하여튼 긴 꼬리의 진족이 저렇게 답변을 하는 걸 보니 내가 단순히 허풍을 치는 건지, 정말로 정체를 알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건지 일단 들어는 볼 생각인 듯했다.

‘찾아내는 데 시간이 걸렸지.’

그 배신자는 아무런 흔적도, 증거도 남기지 않았다.

오로지 남긴 단서라곤 긴 꼬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뿐.

하지만 범인 후보가 12지의 수장 중 있다고 확실히 아는 이상, 증거가 없어도 범인을 찾는 방법이 있었다.

다른 후보가 결백하다고 입증하는 것.

즉, 소거법을 사용했다.

‘12지의 배신자는 긴 꼬리이며 수장 중 하나. 우선 그걸로 후보를 추렸지.’

최편득의 증언에 의하면 은광고의 결계를 제어한 이는 긴 꼬리를 가진 진족이라고 했다.

은광고의 결계를 그렇게 간섭할 수 있는 건 수장뿐이다.

그리고 12지 중 긴 꼬리가 있는 건 쥐, 소, 호랑이, 용, 뱀, 말, 원숭이, 개.

이중 배신자가 아닌 자는 피해자인 황지호가 이끄는 호족.

그리고 플마고에서는 염준열을 위해 싸우다가 깊은 잠에 빠진 청룡이 있는 용족.

나는 이 둘이 배신자가 아니란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게 남은 쥐, 소, 뱀, 말, 원숭이, 개.’

서족의 수장, 서돌은 영원의 호수를 도와 웅족을 고문하는 데에 협력했다.

마족의 수장, 흑마는 황지호와 맹약을 맺고 함께 마족(魔族)을 쓰러뜨리기로 했다.

원족의 수장, 제천대성은 무지기 건으로 호족에게 협력하고, 배신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긴고주를 내밀었다.

그리고 견족의 수장은 처음부터 호족과 깊은 인연을 맺은 사이로, 그 증거로 신수인 올무가 귀엽고 착한 천사 같은 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남은 건 우족과 사족뿐이었지.’

하지만 사족의 수장은 방윤섭을 구할 수단을 내밀어 그를 구했다.

그렇게 나는 배신자를 추려 내었다.

“당신들은 12지 동맹을 배신한 우족입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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