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635화 (631/925)

84. 긴 꼬리 (14)

천익산, 3학년 0반과 지익회의 연합 대 우족의 대결이 펼쳐지는 곳.

이곳은 현재 계이담의 광림, ‘밤정적의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농밀한 안개의 중심에 선 계이담은 거대한 해머를 들고 적을 견제하고 있었다.

계이담은 언뜻 보기에는 여유 있어 보였지만, 광림을 유지하면서 물리적인 전투에 가담하자니 죽을 맛이었다.

그 원흉은 바로 조의신이었다.

작전을 제안한 조의신은 계이담을 몹시 못 미더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전원 동시에 광림으로 제압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문제없겠지만,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죠. 한 명이라도 놓친다면 작전은 무너집니다. 제가 진족이라면 안개부터 처리하려 할 거예요.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플레이어를 찾아내어 공격하겠죠.

계이담이 안개를 펼치는 동안 그를 안전한 곳에 배치하자고 제안한 성시완이 그 말에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조의신은 냉정하게 말했다.

―대련을 해 본 성시완 선배님이라면 아시겠죠. 현 지익회장이 안개를 유지하며 은광고로 침입한 진족을 1 대 1로 상대해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안 될걸.

―안 되겠지. 은광고에 침입한 진족들은 학생들과 싸워서 이길 만한 실력을 갖췄을 거다.

성시완이 뭐라 말하기 전에 3학년 0반 부반장과 우기환이 입을 모아 부정했다.

저 두 사람은 천익산을 쏘다니는 동안 몇 번이나 계이담과 겨루어 보았기에 그의 역량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계이담과 여러 차례 대련한 성시완도 마찬가지였다.

성시완은 조의신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그 반응을 대답이라고 생각한 듯, 조의신이 말을 이었다.

―이번 작전의 관건은 광림의 유지입니다. 안개 밖으로 탈출한 우족이 있더라도 그 안에 있는 선배님들은 무사하겠죠. 단, 광림의 사용자가 누구인지 숨기기 위해서 지익회장도 전투에 참가해야 합니다.

―…….

모든 시선이 계이담 쪽으로 쏠렸다.

조의신은 계이담을 여전히 쓰레기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성시완을 배려해 인간을 대하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긴 했다.

그러나 조의신의 눈빛에선 숨기지 못한 불신이 묻어났다.

계이담은 자꾸 움츠러들 것 같은 어깨를 펴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지익회장이 안개를 30분 이상 유지하며 전투에 참가할 자신이 없다면 다른 작전을 고안하겠습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다면, 계이담은 도망간다는 선택지를 골랐을 것이다.

그러나 계이담은 플마고의 콘붕 사건을 대강이나마 알고 있었고, 지익회가 전멸할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도 그에 못지않게 솟아났다.

‘내가 여기에서 못 하겠다고 하면 저 독종이 다른 작전을 세우지 않을까?’

그러나 계이담을 극히 혐오하는 조의신이 밤정적의 안개를 사용한다는 작전을 입에 담지 않았는가.

조의신도 계이담의 광림을 사용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에 참고 저런 작전을 제시한 거다.

할 수 있다고 답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성시완과 눈이 마주쳤다.

성시완은 평소대로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무슨 대답을 해도 괜찮다고 하는 것 같았다.

‘도망 안 갈 거니까, 나도 싸우라고 했으면서……!’

갑자기 울컥한 기분이 들어 계이담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하겠다.”

그렇게 답하는 계이담의 모습은 그의 속과 달리 담담하고, 결연해 보였다.

3학년 0반 학생들이 과연 성시완의 뒤를 이은 지익회장답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조의신만 홀로 ‘꼴값하는군.’이라고 생각하며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퇴로와 대피할 은신처를 제안했다.

그게 지금까지 이르렀다.

‘……30분이 이렇게 길었나!’

계이담은 전투에도 참가하며 밤정적의 안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숫자 차이와 3학년 0반의 광기 어린 기세에 힘입어 순조롭게 우족들을 진압하고 있지만, 계이담이 광림을 거두는 순간 얘기가 달라진다.

이능을 회복한 이들이 무슨 스킬과 광림을 사용할지 알 수 없으므로 제압이 끝날 때까지 밤정적의 안개를 유지해야 했다.

계이담은 긴장과 체력 소모로 인해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말 한마디 못 할 정도로 넋이 나간 상태였는데, 다른 이들에게는 그런 계이담이 진중하고 과묵하게 전투에 임하는 중인 것으로 보였다.

‘언제까지 버텨야 되는 거야! 저 진족 새끼들 기절시킨 다음에는 안개를 거둬도 되나? 미치겠네.’

하지만 우족들은 쉽게 기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3학년 0반과 지익회를 제치고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쓰러뜨리지는 못했으나, 눈을 번뜩이며 버텼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덩어리를 이 자리에 묶어 두는 기분이었다.

계이담의 안개가 사라지면 분명 저 폭탄들은 바로 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계이담은 욕지기가 올라오는 걸 참고 이능파를 끌어올려 버텼다.

다행히 조의신이 말한 30분이 되기 전, 이변이 일어났다.

쉬이익!

안개를 가르고 화살이 날아왔다.

학생들 사이를 절묘하게 제치고 날아온 화살은 우족의 몸통을 관통했다.

푹!

화살은 이능 금속처럼 단단했던 우족의 피부를 쉽게 갈라 버렸다.

화살에 관통당하자 주먹과 둔기로 매찜질을 당해도 버티던 진족이 고꾸라졌다.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고개를 휙휙 돌리며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찾았다.

“뭐야, 누가 쏜 거야?”

“학생부장 선생님이다!”

쉬이이익!

화살은 연달아 날아들어 우족을 꿰뚫었다.

함근형이 안개 밖에서 광림 ‘명사수의 시선과 광궁(光弓)’으로 저격 중인 듯했다.

계이담은 우족의 몸에 꽂힌 화살을 보고 경악했다.

‘이 짙은 안개 속을 꿰뚫어 보고, 학생들과 진족이 난전을 벌이고 있는데 정확히 표적만을 맞힌다고?’

계이담은 처음 선도부에 들어갔을 때 본 함근형의 무서운 얼굴이 떠올랐다.

가까이에서 봤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선도부 가입을 제안하자 거절의 말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 무서운 얼굴에서 느낀 본능적인 공포는 크게 잘못된 게 아니었다.

함근형은 무시무시한 수준의 명궁이었다.

한 발씩 쏘아질 때마다 우족이 하나씩 쓰러져 갔다.

이윽고 모든 우족이 전투 불능이 되었다.

“저걸 다 맞힌 거야? 헐.”

“전부 쓰러졌다……!”

“우리의 승리다!”

3학년 0반이 자축하였다.

막타는 전부 함근형이 친 셈이니 우리의 승리라고 하긴 뭣했지만, 계이담은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안개가 사라지자 전황이 확실히 보였다.

학생들은 모두 서 있었고, 우족들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몸싸움 중 다친 건지 타박상을 입은 학생들이 있었으나 중상을 입은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계이담은 3학년 0반 사이에 서 있는 지익회 멤버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마음속 깊이 안도했다.

‘다들…… 무사하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질수록 계이담의 머릿속에선 ‘지익회 전멸’이라는 글자가 떠나가지 않았다.

그 원흉은 분명 지익회가 관리하는 천익산에 침입한 이 진족들임에 틀림없었다.

성시완의 성격을 고려하여 플마고 속 행적을 유추하면, 그는 한파 속에서 이 진족들과 마주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진족들은 쓰러졌고, 지익회는 살아남았다.

계이담이 감회에 젖어 있을 때, 성시완이 농담조로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 도망갔네. 다행이다.”

성시완은 우족이 아니라 계이담을 상대로 말하는 것 같았다.

성시완은 계이담이 도망갈 가능성도 생각했던 것 같았다.

실제로 계이담은 도망치고 싶었으니까 저런 생각을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성시완은 이어서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고생했어, 이담아.”

“……아닙니다.”

“중간에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던데, 뭘.”

다른 사람들은 다 못 알아보는 것 같던데, 성시완은 계이담이 속으로 죽을 맛이었던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성시완은 계이담의 계상중 시절을 본 후, 그의 속마음을 잘 읽을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한편, 안개가 걷히자 따로 행동했던 조의신과 3학년 0반 부반장이 돌아왔다.

그들의 뒤에는 함근형이 따라오고 있었다.

함근형의 손에는 화살이 여러 발 꽂힌 검은 피부와 뿔을 가진 진족이 있었다.

‘……저놈 표정이 왜 저러지?’

계이담은 3학년 0반 부반장, 국악부 소속 학생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매우 억울하고 분하고 짜증 나는 표정이었다.

막 진족으로부터 승리를 취한 학생이 지을 법한 표정이 아니었다.

곧 3학년 0반 부반장은 이상한 소리를 했다.

“야, 혼자서는 말싸움 못 이기겠어! 도와줘!”

“말싸움?”

도움을 요청받은 우기환이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그런데 우리 담임은 어딨어?”

*    *    *

아피스의 화신을 쓰러뜨린 후, 3학년 0반 선배놈들, 지익회 사람들과 합류하였다.

합류하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사로잡은 우족은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하려 했는데 화제가 다른 쪽으로 튀었다.

3학년 0반 선배놈들의 관심은 하나같이 ‘우리 담임은 어디에 있는가’였다.

‘반장하고 부반장이 하는 말이 똑같네.’

3학년 0반 부반장에게는 잘 설명했는데,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다.

부반장은 우기환 일당과 합류하기 무섭게 말싸움이 어쩌고 하는데, 난 말싸움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저는 담임 선생님이 계시다고 했는데요.”

나는 함근형 선생님 쪽을 흘끗 보며 말했다.

함근형 선생님은 다친 학생들이 없는지 확인하고는 우족들의 급소를 향해 화살을 한 방씩 더 쏘고 있었다.

학생들을 걱정하고, 철저하게 적을 제압하는 멋진 담임 선생님을 자랑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렇긴 한데.”

“우리 담임인 것처럼 말하지 않았냐?”

“누가 들어도 강한 담임 이야기하는 것 같았는데!”

임연화도 강하긴 하지만, 우리 담임 함근형 선생님도 강하니까 별문제 없지 않나?

3학년 0반 선배놈들은 매일매일 임연화랑 싸우고 지고 분해하는 주제에 얼굴은 보고 싶나 보다.

“우리가 진족을 더 많이 때려잡으면, 우리의 승리였는데!”

“맞아!”

……딱히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승부를 내고 싶어서 담임을 찾고 있던 걸까?

이 비상시에도 강한 담임과의 승부를 놓지 못하다니, 참 대단한 선배놈들이다.

어차피 난 틀린 말을 한 적이 없으니 말싸움할 거리도 없었다.

내가 뭐라 말하기 전, 함근형 선생님이 먼저 말했다.

“내가 조의신의 담임 선생님이다만, 문제 있나?”

“…….”

은광고에서 가장 흉흉한 얼굴을 하고, 방금 우족을 쏘아 잡은 함근형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니 3학년 0반 선배놈들이 입을 다물었다.

함근형 선생님은 진족을 잡을 만큼 센 것뿐만 아니라 0반 선배놈들의 입을 다물게 할 만큼 강했다.

3학년 0반 선배놈들은 강자에게는 도전하되, 도전해도 진다면 승복하는 원시적인 힘의 논리를 따르는 것 같다.

함근형 선생님한테 뭐라 말하는 대신, 3학년 0반 선배놈들이 나한테 투덜거렸다.

“너희 담임이 여기 있어서 좋냐?”

“0반 후배놈 뿌듯해하는 거 보니까 더 열받네.”

그야 함근형 선생님 같은 담임 선생님을 두면 담임 부심에 마음이 뿌듯해질 수밖에 없지 않나?

당연한 소리를 하며 부들거리는 우기환을 상대로 함근형 선생님이 한마디 했다.

“후배놈이라고 했나? 우기환, 후배한테 말이 심하다.”

“…….”

우기환이 입을 다물었다.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우리 담임 선생님은 최고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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