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기청제 (2)
중앙 구역, 학생회관 1번 출구 주변.
학생들의 체감상 약 10시간이 흐른 가운데, 사태는 여전히 별 진전이 없었다.
1번 출구 주변에 나타난 마족, 인비디우스의 사제와 권속들을 격퇴한 후에도 산발적으로 에너미가 나타났으나 점차 그 수가 줄었다.
그러나 거듭된 전투로 학생들이 지쳐 갔다.
학생들이 쉴 수 있도록 학생회가 출구별로 조를 편성하여 이능파와 체력 소모를 막았으나 정신적인 피로가 쌓여 갔다.
할당된 시간을 채우고 쉬기 위해 학생회관으로 향하던 학생들이 지금 상황을 두고 대화를 나눴다.
“이벤트 입장 시각 이후로 열 시간 정도 지나지 않았나? 배고프다. 컵라면은 남아 있겠지?”
“식량은 많으니까 있을걸. 그런데 벌써 열 시간 지났냐? 밖은 한 시간 정도 지났겠다.”
“슬슬 지원군이 올 시간 아님? 밖에 줄 서 있던 사람들 많았잖아. 한 명쯤은 협회에 신고했을 텐데…….”
학생들은 현재 은광고가 처한 위기에 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전 학생회장 도원우는 교내 방송을 통해 현재 은광고 결계의 안과 밖 사이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고 알렸고, 사태 장기화의 가능성을 상기하며 지구전을 각오하라고 말했다.
은광고 내부와 외부의 시간이 10배 차이 난다는 말에 패닉을 일으킬 뻔한 학생들도 있었으나, 그런 학생들은 대부분 이계 경험이 별로 없는 1학년 학생들이었다.
높은 희귀도의 이계 공략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2, 3학년 학생들은 시공간이 왜곡되는 SSR급 이계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실제로 공략 경험이 있는 이들도 많았다.
2, 3학년 학생들이 태연하게 후배들을 달래고, 1학년 학생들이 진정할 때까지 자진하여 학생회관 방어를 맡아 사태는 금방 진정되었다.
물론, 모든 1학년 학생들이 패닉을 일으킬 뻔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2, 3학년보다 의연하게 이 사태를 맞이하는 1학년 학생들도 있었다.
바로 1학년 0반 학생들이 그러했다.
이들은 1번 출구 방어를 맡을 시간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밖으로 향했다.
“드디어 저희 차례네요! 레나 바이올린의 파편을 찾고 싶었는데, 다행이에요.”
“빨리 갑시다. 스크롤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바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지정한 구역을 벗어나면 안 되지? 아쉽다. 파편이 멀리 날아갔을지도 모르는데…….”
이번에 출구 방어를 담당할 1학년 0반 학생들은 사월세음, 목우람, 민그린 셋이었다.
이들은 출구 방어를 맡은 다른 반, 학년 소속 학생들과 섞여 이동하는 사이, 1번 출구 주변 중 어디를 수색할지 범위를 정했다.
그들이 찾는 것은 권레나의 이능 바이올린의 파편이었다.
마족과의 전투가 막 끝난 직후에는 경황이 없고, 여전히 에너미도 남아 있었기에 그리 많은 파편을 회수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시 방어를 담당할 시각이 되면 파편을 더 찾아내자고 결의했다.
“혹시 나무 위로 날아갔을지도 모르니까 날면서 위쪽에서 살펴볼게요!”
“비행종 에너미랑 마주칠지 모르니까 너무 높이 날면 안 돼.”
“의신이한테 하늘을 날면 위험하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3미터 이내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 정도 높이면 문제없을 것 같군요. 만약 비행종 에너미가 접근하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근처에 나무가 있으면 지지대로 삼아 타고 올라가 공격할 수 있습니다.”
“우람이는 벽 타기 말고도 나무 타기도 잘하나 보다.”
사월세음이 허공에 조금 떠서 나무 주변을 살피는 사이, 민그린과 목우람은 그 주변에서 탐색을 했다.
만일의 경우 전투력이 떨어지는 사월세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들이 하고 있는 건 본래 목적인 출구 방어와는 다소 거리가 먼 행위였으나, 1번 출구 지휘를 맡은 곽경구를 비롯한 학생들은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이 권레나의 선택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1번 출구 방어를 맡던 학생들은 권레나가 반 친구를 구하기 위해 귀한 이능 악기를 던지는 장면을 보았다.
그들은 1학년 0반 학생들이 파편 수색에 집중할 수 있도록 주변 방어에 더 힘을 기울였고, 이능 바이올린 파편으로 추정되는 물체를 발견하면 1학년 0반 아이들에게 건넸다.
학생들의 조용한 배려 속에서 1학년 0반 아이들의 파편 수색이 계속되었다.
전투의 여파로 엉망이 된 출구 주변에서 조각조각 난 바이올린 파편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목우람은 바이올린의 현으로 추정되는 얇고 긴 이능 금속 조각을 줍다가 말했다.
“……레나를 남겨 두고 온 게 마음에 걸립니다.”
“현악부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같이 찾으러 다니면 레나가 힘들어할지도 모르고.”
근처에서 넓은 평붓으로 파편에 붙은 먼지를 털어 내던 민그린이 답했다.
민그린의 말대로 현재 권레나는 현악부 사람들과 함께 학생회관에 남아 있다.
학생회 측에서 권레나의 낮은 전투 능력을 고려해 보호 차원으로 조 배정에서 제외한 건지, 권레나의 사정을 알고 배려를 한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어쨌든 1학년 0반 학생들은 지금 권레나가 쉬었으면 하는 바람이었기에 조 배정을 두고 따로 항의하지는 않았다.
처음 조 배정을 봤을 때 목우람은 권레나가 쉬는 걸 보고 다행이라 여겼으나, 막상 이렇게 따로 행동하니 걱정이 되었다.
목우람은 파편을 찾는 내내 권레나를 걱정하는 말을 던졌다.
목우람의 걱정은 자책으로 끝났다.
“저 때문입니다. 제가 약해서 부반장이 무리하게 저를 구하려고 했고, 그런 부반장을 지키기 위해 레나가 이능 바이올린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이능 바이올린이 저렇게 부수어지고 만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마찬가진데. 나도 네 옆에 있었는데. 나 때문이기도 한데.”
목우람과 민그린은 우울해하며 같이 자책했다.
옆에 김유리나 조의신이 있었다면 눈치 있게 화제를 바꿔서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을 거다.
송대석이 있었다면 눈치 없는 소리로 목우람에게 ‘왜 그린이 탓처럼 들리는 헛소리를 하는 건데.’라며 면박을 줄 거고, 한이가 있었다면 늘 가지고 다니는 간식을 나누어 주며 달래 줬을 거다.
황호는 ‘하하하하! 그건 저 아이의 선택이다. 그 선택을 존중해 줬으면 좋겠군.’ 하며 1학년 0반 학생들의 예상외로 진지하게 반응했으리라.
그러나 여기엔 셋뿐이었고, 그나마 사월세음은 나무 주변을 날아다니느라 대화 내용을 듣지 못했다.
이 자리에 있는 두 사람은 ‘나 때문에’라는 말을 반복하며 끝없이 자책만 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두 사람의 자책은 민그린의 말로 갑작스럽게 끝났다.
“……너, 만들던 바이올린 있지 않았어?”
“…….”
민그린의 말에 목우람이 입을 꾹 다물었다.
민그린과 목우람은 언뜻 보기엔 접점이 없어 보이지만, 두 사람 다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 장인으로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학급 행사나 이벤트에서 기념품, 무대 장식 등을 만들며 두 사람은 서로의 재능을 알아봤고, 가끔 의견을 주고받곤 했다.
목우람은 이능 바이올린 제작을 두고 민그린에게 상담한 적이 있었다.
목우람은 이능 바이올린의 제작법에 관한 지식이 충분히 있었으나, 완벽한 건 아니었다.
목우람은 자신에게 결여된 것 중 하나가 미적 감각이라고 여겼다.
아무리 생각하고 디자인해도 권레나에게 어울리는 바이올린을 떠올릴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목우람은 민그린에게 조언을 구했다.
“지난 기말고사 때, 잠도 안 자고 계속 만들고 있었잖아. 최근엔 생활 습관이 원래대로 돌아온 걸 보니까 완성한 거 아니야?”
목우람은 기말고사 기간 내내 공방에 틀어박혀 이능 바이올린 제작에 몰두했다.
목우람이 이능 바이올린 제작에 박차를 가한 계기는 기말고사 준비 기간에 발생했다.
권레나는 시뮬레이터 룸에서 실기 연습을 하던 중, 가상계 비사종을 상대로 이능 바이올린을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이능 바이올린은 노래하기를 거부했다.
이능 바이올린은 연주자의 이능파 상태에 영향을 받는데, 당시 극도로 긴장하고 겁에 질린 권레나의 상태로는 연주가 불가능했다.
목우람은 그 장면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목우람의 스승이 만드는 이능 바이올린은 하나같이 훌륭한 작품이었고, 최고의 소리를 연주했다.
하지만 목우람은 권레나의 연주에 응해 주지 않는 바이올린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목우람은 기말고사 기간에 잠을 줄여 가며 서둘러 이능 바이올린을 제작하였다.
“……네, 저는 레나가 원한다면 언제든 노래를 불러 주는 바이올린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완성했습니다.”
목우람이 카드 홀스터에서 아이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그가 꺼낸 아이템 카드에는 바이올린이 그려져 있었다.
카드화가 가능한 수준의 이능 악기라는 증거였다.
민그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아이템 카드를 바라봤다.
“지금 제 솜씨로는 그리 만족스러운 작품을 만들 수 없었지만, 현재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이템 카드 제작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도 이능 악기 같은 희귀한 아이템 카드라면 그랬다.
게다가 아이템 카드의 테두리를 보았을 때, 저 이능 바이올린의 희귀도는 SR급이었다.
권레나가 기존에 사용하던 SSR급의 이능 바이올린보다는 격이 낮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굉장한 일이었다.
고작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이 정도 수준의 이능 악기를 만들었다는 게 알려지면 그를 특집으로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한 편쯤은 나올 거다.
민그린은 아이템 카드에 나타난 바이올린을 꼼꼼하게 관찰하다가 말했다.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아니, 좋은 거 같은데.”
딱히 반 친구가 만들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었다.
민그린 눈에 목우람이 만든 이능 바이올린의 디자인은 꽤 괜찮았다.
이능 악기에 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저 정도 희귀도면 상당한 가치가 있는 걸 알았다.
하지만 목우람의 표정은 계속 어두웠다.
완성하고도 권레나에게 내민 적이 없는 것 같으니, 영 마음에 차지 않는 듯했다.
“레나한테 주려고 만든 거 아냐? 이 바이올린은 레나가 연주를 원하면 언제든 소리를 내니까 오히려 더 좋은 거 아냐?”
민그린은 부족한 말솜씨로 계속 질문을 던졌다.
목우람의 답변은 계속 들리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던 목우람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레나에게 이 이능 바이올린을 주는 건…….”
그러나 답하기 전, 그들 앞으로 뭔가가 내려왔다.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사월세음이 앞에 착지했다.
사월세음은 두 사람의 분위기와 맞지 않게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생각난 게 있어요!”
목우람과 민그린이 멈칫하다가 사월세음을 바라봤다.
사월세음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눈을 깜빡였다.
“……?”
“어, 아냐. 왜?”
민그린이 허둥지둥 수습하자 사월세음이 말했다.
“앗, 네. 하늘을 보다가 궁금한 게 생겨서요.”
사월세음은 하늘 높이 은광고를 지키고 있는 용제건의 기적을 가리켰다.
조의신이 비행 스킬을 금지시키지 않았더라면, 사월세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관찰해 봤을 것이다.
“저 위 말인데요, 지금 용제건 선생님이 친 결계 밖에 이상한 눈이 내리고 있는 거잖아요.”
“그럴걸……?”
민그린이 자신 없어 하는 말투로 답변했다.
사월세음은 처음보다 조금 짙어진 것 같은 시안색의 결계를 보며 말했다.
“그러면 쌓인 눈은 어떻게 된 걸까요?”
이 자리에는 사월세음의 질문에 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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