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기청제 (4)
옥토연은 제석천이 내린 회토(懷兎)의 가호를 받아 죽음을 초월했다.
달에 새겨진 토끼라고 여겨지는 옥토연은 수많은 죽음과 부활을 경험했다.
옥토연은 죽음이 무섭지 않았다.
은호가 허수아비를 선물하기 전까지 정월에 천제석도량(天帝釋道場)이 열릴 때마다 기꺼이 몸을 불태울 만큼, 죽음의 고통도 어렵지 않게 견뎠다.
그래서 황호가 진심으로 옥토연을 죽이려 한 적이 있었는데도 두려움을 모르고 깐족거릴 수 있었다.
그런 옥토연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게 있었다.
그 공포가 심어진 건 올해 초, 만우절.
그 공포의 시작은 아무 전조가 없었다.
처음 문제는 결계의 이상으로 시작되었다.
―토윤 언니, 왜 그래?
평소 대부분의 토족들은 토족의 본거지가 아닌, 달토끼떡 본사에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만우절을 맞이해서 토족들은 모두 본거지로 돌아왔다.
아직 어린 은호의 후예들이 만우절 장난을 준비했을 거고, 토족들은 이에 어울려 주려고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부하의 보고를 듣던 옥토윤이 말했다.
―결계 쪽에 문제가 생겼어. 수장인 네가 직접 가 봐야 할 거야.
―에이, 귀찮게. 야구 중계 보기 전에 서호랑 이호랑 재호랑 놀아 주고 좀 쉬려고 했는데.
―온종일 놀겠다는 소리로 들리네. 토연아, 농담이지?
―어? 어, 농담이지!
옥토윤이 주먹을 쥐는 게 보이자 옥토연이 허둥지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중간에 옥토연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옥토윤은 그 옆을 따라왔다.
두 토끼가 결계 가까이에 다가간 순간, 하늘이 열리고 빛이 번쩍하고 내려왔다.
파지지직!
―이, 이게 뭐야.
―갑자기 하늘이 열렸어!
―이게 뭐지……? 상위 존재의 힘 같은데…….
옥토연은 하늘을 본 순간, 그 빛의 정체를 알아봤다.
따스한 빛은 눈이 따끔따끔해질 정도로 강렬한 힘을 머금고 있었다.
그 힘은 상위 존재 제석천의 것이었다.
―이건 제석천 님의 힘이야! 갑자기 기적을 내려 주셨어! 그런데 왜 현세에 개입하신 거지? 저렇게 기적을 내리는 건 엄청 힘든 일이라고 들었는데…….
옥토연의 중얼거림이 끝나기 전, 결계가 굉음을 뿜었다.
‘콰직’, ‘파아앗’ 하고 스파크가 터진 소리에 모든 토족들이 놀라서 소리의 근원을 바라봤다.
그러자 결계 밖에 몰려온 정체불명의 진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토족의 결계를 해제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계에 제석천의 힘이 더해지자, 결계의 성질이 변하는 바람에 원만하게 해제하지 못하고 파괴하려는 듯했다.
결계 너머로 진족들이 토족을 향해 적의를 불태우는 것이 보였다.
―12지 동맹이 만든 결계는 쉽게 못 부술 텐데, 뭐지? 대체 뭐야?
옥토연은 눈을 불안하게 데록데록 굴렸다.
저 진족들은 12지 동맹의 결계에 관해 잘 아는 듯했다.
게다가 도저히 토족이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아마 제석천이 급히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토족들은 갑자기 밀려온 진족들에게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옥토윤은 제석천이 시간을 벌어 준 틈을 이용해 살길을 찾으려 했다.
―외부에 도움을 청하자. 호족은 안 되겠지만, 어디든! 협회에라도…… 아니면 용…….
옥토윤이 ‘용제건’의 이름을 입에 담으려다가 말을 멈췄다.
연락처를 아는 강한 진족을 떠올리다가 저도 모르게 유희계 용족 이름을 댈 뻔했다.
하지만 밖에 있는 누군가는 12지 동맹의 결계에 관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결계에 접근했거나 정보를 흘린 것은 12지 동맹일 가능성이 크다.
범인 후보 중 하나인 용족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토족들은 큰 빚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협회에 연락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디바이스는 연결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토족의 거점 주변에 통신 장애를 일으킨 것이다.
―어, 어떡해. 어떻게 도망치지? 샛길에도 에너미가 있어! 결계 밖으로 나가면 바로 당할 거야.
옥토윤이 척후를 보내 도망갈 길을 찾아봤지만, 토족들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저들은 권속들로 추정되는 에너미를 배치해 뒀는데, 토족의 힘으로 에너미를 쓰러뜨려도 그들을 토벌하는 사이에 저 흉악한 진족들이 몰려올 게 뻔했다.
그때, 적습과 제석천의 기적에 이어 또 다른 이상이 발생했다.
우우우웅!
거점 한가운데, 아직 날이 밝은데 달빛이 내려왔다.
그 달빛은 또 다른 상위 존재의 개입을 시사하고 있었다.
바로 월궁의 항아였다.
항아는 제석천이 내린 기적만큼 파격적인 기적을 내리진 않았으나, 넌지시 살길을 열어 주고 있었다.
―월궁 쪽 출입구야! 항아 님도 개입하시나 봐!
―월궁으로 도망치라는 거야? 하지만 월궁엔 나랑 토윤이 언니밖에 못 가잖아!
그러나 항아가 열어준 살길에 오를 수 있는 건 단둘뿐이었다.
월궁의 출입 자격을 얻은 달토끼는 이 자리에서 옥토연과 옥토윤뿐이었다.
또 항아가 도와주고 있다고는 하나 월궁으로 가는 길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보름달이 떠야 뱃사공이 월궁을 오가는 배를 타고 노를 저어 올 수 있었다.
항아가 열어 준 길을 따라 배가 서둘러 온다고 해도 한참 걸릴 게 뻔했다.
―결계가 무너지는 속도를 보니까 어차피 배는 못 탈 거 같은데에…….
옥토연이 결계와 달빛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옥토윤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토족의 본거지를 감싼 결계의 파괴 속도를 본 옥토윤의 낯빛이 흐려졌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결의한 듯, 단호하게 말했다.
―토연아, 우리가 막고 있는 사이에 월궁으로 돌아가.
눈치 없는 옥토연도 옥토윤이 뭔가 불길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저 말을 듣자 화들짝 놀랐다.
옥토윤 뒤에 있는 토족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옥토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옥토연을 월궁으로 보내기 위해 토족 모두가 희생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무슨 소리야! 난 죽어도 안 죽잖아. 갈 거면 토윤이 언니가 가!
옥토연의 말은 언뜻 듣기에 말이 안 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옥토연은 죽어도 살아난다.
하지만 회토의 토끼가 아닌 옥토윤이나 다른 토끼들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이 중에 누가 죽는다면 옥토연이 죽는 게 나았다.
―넌 잘 못 싸우잖아. 내가 남아서 싸우지 않으면 월궁으로 길을 열 시간을 못 벌어.
―그,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내가 남나 안 남나 죽는 건 똑같잖아!
떼를 쓰는 옥토연을 상대로 옥토윤이 부드럽게 웃었다.
―같은 결과라면 네가 안 아픈 게 낫지.
은호의 제안으로 천제석도량 때 옥토연을 대신하여 허수아비를 불태울 때까지, 옥토윤은 늘 불에 타는 옥토연을 보며 슬퍼했다.
옥토윤은 자신에게 옥토연을 대신할 만한 허수아비를 만들 재주나 지혜가 없던 것을 늘 가슴 아파했다.
재주와 지혜가 없던 옥토윤은 전투 능력을 키우기로 했다.
그래서 옥토윤은 전투에 능하지 않은 토족인데도 힘을 길러 왔다.
마치 옥토윤은 지금 이 순간을 기다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본 옥토연은 더 악을 썼다.
―시, 싫어, 안 갈래! 안 갈 거야!
―토연아…….
옥토연은 자리에 주저앉아 절대 월궁에 안 가겠다며 소리를 질렀다.
‘대체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선택을 해야 해!’
활기차게 소리를 질러 대는 것과 달리 옥토연은 공포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옥토연은 토족들을 죽이기 위해 결계를 부수려 드는 진족들을 떠올렸다.
그 진족들의 주변에는 죽음의 기운과 악의가 짙게 묻어 있었다.
죽음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기운은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해졌다.
특히 가장 앞장서서 결계를 부수려 드는 진족 주변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진득하고 섬뜩한 기운이 묻어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런 기운을 품고 있는 진족들이 곧 결계를 넘어 토족들을 죽이려 들 거라는 생각에 벌벌 떨렸다.
‘어떡해, 어떡해…… 토윤 언니는? 다른 토족들을 어떻게 구하지? 서호랑 이호랑 재호는 비밀 장소에 잘 숨어 있겠지? 저 진족들이 그건 못 찾겠지?’
옥토연이 옥토윤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앞뒤 안 맞는 소리를 왁왁 질러 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밖이 조용해졌다.
결계를 부술 기세로 가해지던 공격도, 그로 인해 결계가 지르던 비명도 멈춰 있었다.
잠깐 바깥의 기운을 느껴 보니 옥토연에게 공포를 주던 그 기척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밖으로 나갈 생각을 못 했다.
‘결계를 부수는 작업이 생각보다 잘 안 돼서 함정을 판 거 아니야?’
다른 토족들도 옥토연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의 경계심은 점점 굳어져 갔다.
그때, 이능파를 담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망할 달토끼들아, 이 몸이 오셨다. 당장 문을 열지 못할까!
그 목소리를 알아들은 옥토연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굳이 따지고 들면 미성이었으나 옥토연의 귀에는 아주 짜증 나게 들리는, 아주 잘 아는 목소리였으니까.
바로 호족의 수장, 황호의 음성이었다.
―황, 황호? 걔가 어떻게 알고 여기에 온 거야……?
―호족이 도와주러 왔나 봐, 나가 보자!
토족들이 허술하게 세워 둔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결계의 경계로 가까이 갔다.
토족들은 지금 습격하는 진족들이 12지 동맹 소속 중 누군가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 후보에는 호족이 없었다.
비록 옥토연과 황호의 사이는 아주 나쁘고, 도움을 청하지 못할 정도로 큰 비밀을 숨기고 있었으나 토족은 호족들이 자신들을 배신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꾸지 못했다.
호족은 한때 은호가 수장으로 지냈고, 또 그 은호의 후예들이 토족과 가족처럼 지냈으니까.
결계 가까이에 가니 황호와 그 부하들이 보였다.
그들 주변에는 에너미의 잔해로 추정되는 것들이 보였다.
정체불명의 진족들은 호족들이 공격해 오자 그 수많은 권속들을 방패로 도망친 듯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호족은 구세주나 다름없었으나, 그 구세주는 아주 흉악한 표정으로 적의를 담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잘도 그 긴 시간 은호의 후예를 셋이나 숨겼겠다.
이를 바득바득 가는 황호를 보고 얼어붙는 토족도 있었으나 옥토연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아까 느꼈던 그 불길한 기운에 비해서 황호의 저 짜증은 별것 아니었다.
어차피 황호는 자신을 죽이지 못하고, 옥토연을 괴롭힌답시고 토족을 죽일 만한 성격이 못 된다.
그런데 그 불길한 기운이, 지금 옥토연의 눈앞에 있었다.
“이게 뭐야? 나비……?”
송대석은 그 기운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옥토연의 눈에 보이는 저 끔찍한 공포의 덩어리가 송대석에게는 나비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비? 저게 나비 모양으로 보여?”
마치 송대석은 사기(邪氣)가 뚝뚝 떨어지는 그림자를 짊어진 것처럼 보였다.
나비 같은 귀여운 게 아니었다.
‘나비의 진족인 거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옥토연이 송대석보고 당장 도망치라고 소리 지르려 할 때였다.
파직, 쩌저적…….
그 불길한 기운이 갑자기 금이 간 것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처럼, 틈이 벌어졌다.
이계의 틈이 열리는 것 같았다.
아니, 지금 옥토연 앞에서 이계가 열리고 있었다.
“도망쳐!”
옥토연이 비명을 지르고, 송대석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계의 틈을 비집고 나온 에너미의 발톱이 송대석의 등을 가를 기세로 날아왔다.
카아앙!
그 순간, 누군가가 송대석의 등 뒤를 감쌌다.
송대석의 등 뒤, 이능파로 된 실드가 펼쳐져 있었다.
그 실드는 아이템 카드로 전개한 건지, 방금 나타난 누군가의 손에는 카드가 여러 장 들려 있었다.
그 손은 가죽 장갑으로 감싸져 있었다.
“협회 규정 집행부……?”
송대석이 중얼거리자 검은 코트와 가면을 착용한 인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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