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기청제 (8)
박 팀장은 현재 이성이 한 줌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에게 남은 건 오로지 원초적인 감정뿐.
홍규빈을 향한 증오가 그러했다.
저보다 한참 어린 홍규빈이 같은 직위, 아니, 좀 더 위에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홍보 1팀과 2팀은 표면상 동등한 위치였으나 중요한 업무는 1팀에 먼저 배정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박 팀장은 홍규빈이 규정 집행부 소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박 팀장에게는 단 한 번도 제의가 오지 않았던 자리였다.
이 모든 건 박 팀장이 그저 홍규빈보다 무능했기에 파생된 결과일 뿐이었으나, 그는 납득하지 못했다.
박 팀장이 패배감에 무너지려 할 때, 나비 같은 여자 친구가 속삭였다.
―그래도 전 알아요. 당신은 언젠가 중요한 역할을 해낼 거예요. 당신은 제게 필요한 사람이랍니다.
그 진실된 말을 들을 때마다 박 팀장은 그녀에게 점점 빠져들어 가고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나는 걸 느꼈다.
실제로 나비령은 박 팀장을 중요한 국면에 써먹을 요량이었기에 저 달콤한 말에는 한 점의 거짓도 없었다.
그 달콤한 말에 안심해야 하는데, 박 팀장은 초조해져만 갔다.
‘더, 더 위로 가야 해. 홍 팀장이, 윤 대리가 방해돼. 그녀가 그 자식에게 돌아가 버리기 전에……!’
나비령은 윤 대리에 미련이 남아 보였다.
우연히 마주쳤을 때 지었던 아련한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나비령은 유능한 윤 대리를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한 걸 아쉬워했고, 그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 박 팀장을 부추기기 위해 써먹었다.
박 팀장의 타고난 비뚤어진 성품, 욕심, 열등감은 점점 일그러져 그를 망쳐 갔다.
박 팀장이 나비령에게 심취할수록, 나비령은 그의 이능파에 점점 깊숙하게 간섭해 갔다.
박 팀장의 정신과 이능파는 그렇게 나비령의 의지에 잠식되었다.
그 잠식된 이능파는 나비령이 신호를 보내자마자 폭주를 일으켰고, 날뛰는 이능파를 향해 서돌의 쥐 떼가 달라붙었다.
“아아아아악!”
우드득, 우직, 갉작, 갉작갉작…….
박 팀장의 비명과 쥐 떼의 이빨이 물어뜯는 소리가 복도를 뒤흔들었다.
박 팀장은 쥐를 밀쳐 내고 공격을 해 댔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쥐 떼는 박 팀장이 뿜어대는 이능파를 무자비하게 갉아 먹었다.
이능파만 뜯어내는 게 아니라, 이능파를 머금은 피부도 물어뜯었다.
서돌이 불러내는 쥐는 발산된 이능파를 먹는다.
플레이어가 체내에 갈무리한 이능파를 먹는 건 어렵지만, 박 팀장처럼 폭주하여 전신으로 이능파를 발산하면 먹기 쉬워졌다.
서돌의 쥐가 이능파를 먹었다고 해서 서돌이 그 이능파를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폭주한 상대를 제압하기에는 제격이었다.
그렇게 폭주한 이능파가 어느 정도 뜯겨 나가자 박 팀장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쥐 떼 사이로 보이는 박 팀장을 흘끗 보던 서돌이 눈살을 찌푸렸다.
“육체에 변형이 일어날 정도로 비뚤어진 심성과 이능파라니. 내 쥐가 먹을 것을 가리지 않아 다행이네.”
서돌의 말대로 박 팀장은 인간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었다.
표정이나 얼굴, 분위기에서 사람의 품성이 묻어나는 것처럼, 플레이어의 감정과 이능파는 육신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홍규빈은 냉정한 눈으로 박 팀장을 살피다가 말했다.
“신체가 이능파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지만, 이건 지나치게 극단적입니다. 아침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습니다.”
“신체의 변형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도 있겠지.”
“그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만…….”
홍규빈은 쥐에 파먹히고 있는 박 팀장을 바라봤다.
박 팀장은 여전히 폭주 중이었기에 불규칙적으로 이능파를 발산했으나 족족 서돌의 쥐에 잡아먹혔다.
그 와중에도 박 팀장은 홍규빈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능파가 타의로 사라지는 감각은 신체에도 고통을 줄 텐데, 박 팀장은 고통보다 더 강렬한 감정에 지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서돌이 어처구니없어했다.
“폭주한 이능파를 먹히고 있으니 슬슬 제정신이 돌아올 텐데, 그 제정신으로 생각하는 게 고작 그거야?”
지금 박 팀장이 느끼는 감정은 자신이 처한 위기나 고통에 대한 것보다는 홍규빈을 향한 적의가 더 큰 것 같았다.
그걸 알아채고도 홍규빈은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고 박 팀장을 바라봤다.
홍규빈은 살면서 박 팀장 같은 인간을 세기도 어려울 만큼 많이 만나 왔고, 앞길을 방해하지 않는 한 별다른 관심이나 감정을 쏟지 않았다.
박 팀장은 그저 홍규빈이 처리해야 하는 폭주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홍규빈의 얼굴에서 그 사실을 읽어 낸 박 팀장이 분개했다.
“너만, 너만 없었더라면! 아아악!”
홍규빈이 없었어도 박 팀장의 직급은 별로 달라질 게 없었다.
여전히 홍보팀의 팀장이고, 규정 집행부에는 들어가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제 탓을 할 생각이 없는 박 팀장은 모든 감정을 홍규빈에게 부딪치기로 했다.
박 팀장은 제 몸을 물어뜯는 쥐들을 매단 채로 괴성을 지르며 홍규빈에게 돌진했다.
홍규빈은 박 팀장의 돌진 따윈 막을 필요도, 피할 필요도 없다는 듯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게 박 팀장의 분노를 더욱 부추겼다.
박 팀장이 한 걸음을 남겨 둔 순간.
퍼억!
박 팀장의 얼굴에 주먹이 날아왔다.
주먹이 날아왔다고 표현했지만, 박 팀장은 둔기에 얻어맞은 것처럼 골이 텅텅 비는 감각이 들었다.
박 팀장은 반쯤 뒤집힌 눈으로 주먹을 쥐고 있는 임지화를 보다가 기절했다.
임지화는 맨주먹으로 박 팀장의 얼굴에 닿은 게 불쾌한지,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
“괜찮으십니까?”
“늑골에 금이 가고 잠깐 기절하긴 했는데, 동생이 때리는 것보단 별로 안 아팠어. 괜찮아.”
그 말을 들은 홍규빈은 그 동생이라는 인물을 떠올렸다.
임지화의 동생이라면 임연화를 말하는 건가?
꽤 사이가 좋은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 말을 들어 보니 물리적인 자매 싸움을 할 때도 있는 듯하다.
강한 동생을 상대로 싸우며 커서 그런지 임지화의 맷집은 남달랐다.
그래도 홍규빈은 부상당한 임지화를 염려해 제안했다.
“뒤처리는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아니, 됐어. 부하가 저 자식을 한 대 정도 때려 달라고 부탁했거든. 일어날 때마다 패야지.”
임지화는 박 팀장을 처리할 생각에 의욕에 가득 찬 듯했다.
임지화는 이능파로 금이 간 늑골을 고정시키며 말했다.
“이 자식 기절한 틈에 봉인이나 해 줘. 일어나면 또 귀찮아지니까.”
박 팀장은 협회의 규정을 다섯 개는 넘게 어겼다.
박 팀장의 처분은 징계 위원회를 소집하여 결정하겠지만,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 그의 이능은 봉인되어야 할 것이다.
이능이 강한 상대로는 봉인술식 아이템이 제힘을 발휘하려면 시간이 걸리므로, 홍규빈은 임지화의 말대로 박 팀장이 기절했을 때 봉인 과정을 처리하기로 했다.
홍규빈은 봉인술식 아이템을 꺼내 쥐의 이빨 자국이 남은 박 팀장의 팔에 검은 인장을 새겼다.
“협회 규정에 따라 귀하의 광림, 스킬, 카드화와 실체화 능력을 봉인한다.”
봉인술식 아이템 사용 과정을 지켜보던 서돌은 금방 흥미가 식었는지 쥐를 거두고 따분해하는 얼굴을 했다.
서돌은 가끔 은광고 쪽을 돌아봤다.
지금 당장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협회에 또 적습이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 남을 생각인 듯했다.
홍규빈도 은광고에 있는 은사, 제갈재걸이 마음에 걸렸으나 조의신을 믿기로 했다.
이토록 촘촘하게 전략을 짠 조의신이 제갈재걸의 안전을 보장했으니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제갈 선생님은 무사하시겠지. 그런데…….’
홍규빈은 조의신이 어떻게 움직일지 자세히 듣지 못했다.
은광고 내의 대략적인 전력 배치는 들었는데, 조의신의 안전을 고려하여 배치한 것 같지는 않았다.
조의신이 연락을 할 때마다 야근을 해야 하는 몸이지만, 그가 홍규빈의 은인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기에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의신이는 괜찮을까?’
* * *
천익산, 천단수(天壇樹) 앞.
나는 천단수의 수피 위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가 배치한 수가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결말에 다다랐을지 예측해 보았다.
어렵지 않게 결과를 예측한 곳도 있었지만, 변수가 많아 추측하기 어려운 곳도 있었다.
그 어려운 곳 중 하나가 플레이어 협회 쪽이었다.
‘협회는 플마고에 비해 많이 변했어. 숙청된 인물도 많고, 살아남은 인물도 많고. 무엇보다 플마고의 협회가 할 수 없던 일이 가능해졌지.’
환몽 게이트로 인한 물갈이, 위성 시스템 수정.
송대석과 옥토연의 월궁계도.
이 둘의 존재와 홍규빈 등등 달라진 점이 많았다.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 때 은광고의 고립은 협회의 혼란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협회가 멀쩡히 돌아가고 있다면 제시간에 은광고에 지원이 도착할 수밖에 없으니까.
흑막이 협회를 노리는 건 예측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협회 내에는 이미 누군가가 손을 쓴 것 같았지.’
홍규빈이 방송국 사건 조사에서 난항을 겪었던 걸 생각하면 그렇다.
홍규빈은 사내 정치에 휘말려서 조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데, 내 생각은 달랐다.
흑막이라면 홍규빈이 그렇게 판단할 만큼 교묘하게,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그를 방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홍규빈이 고생 중이라는 것 외에 협회 내에선 별다른 문제점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었어.’
그렇기에 협회 쪽에는 홍규빈의 주변을 중심으로 심혈을 기울여 수를 배치했다.
위성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대응할 수 있는 옥토연과 송대석.
무장한 상태로 대기 중인 홍규빈과 그가 신뢰하는 부하들.
그리고 홍규빈에게 가호를 내린 서돌을 배치했다.
‘서돌을 설득하는 건 좀 까다로웠지만, 결과가 괜찮으니까 됐어.’
서돌은 은광고 쪽에 가고 싶다며 강력하게 어필했으나 고집을 꺾었다.
서돌과 협상하기 위해서는 나도 각오를 좀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의외였다.
그래서 나는 서돌에게 물었다.
―모델을 조건으로 제안할 줄 알았는데요.
―아뇨,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협상하는 내내 서돌이 반말을 쓰다가 갑자기 존댓말로 마무리 지은 것도 그랬다.
찝찝하지만, 지금은 서돌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나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천단수를 향해 혼잣말하듯이 물었다.
“운명력을 발동시킬 거면 지금 하지 그래?”
하지만 아무런 반응 없이 조용했다.
천단수는 초상 우주와 가장 가까운 장소다.
그러니 만약 내가 두는 수에 문제가 있다면 바로 천단수 앞에서 운명력이 발동하리라 생각했다.
제어가 불가능한 운명력 스킬을 나름 생각해 보고, 이용할 가능성을 고려해 수를 두었지만 이건 빗나간 듯했다.
‘내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뜻인가.’
우주나 운명의 뜻을 읽을 수 없으니, 내 힘으로 수를 두기로 했다.
나는 용제건의 힘으로 덮인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상대해야 하는 건 저 하늘 위의 구름이었다.
“이제 눈을 그치게 해 볼까.”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내가 택한 캐릭터는 저 구름을 다룬 자의 계략에 의해 사망한 인물.
용왕신의 무녀 후보생, 윤여랑이었다.
〈해당 캐릭터의 광림, ‘제의(祭儀) 기구 소환’을 사용합니다.〉
한 손에 부채를 쥔 나는 ‘무명의 운명’으로 다음 광림을 사용했다.
구름을 부수고 번개를 베어 내는 이빨을 부르기 위해서.
〈해당 캐릭터의 광림, ‘파운참뢰(破雲斬雷)의 백아(白牙) 소환’을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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